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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졸업식날은 선생님 혀가 꼬이는 날?

[해외리포트] 외국 이민자와 유학생 늘면서 미국 학교는 이름 부르기 연습 중

등록|2008.05.18 17:43 수정|2008.05.18 18:25

▲ 미국 버지니아 주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10학년 여학생인 제리카 시챔파나콘. 이민자와 외국인 유학생이 늘면서 졸업생 중에 복잡하고 긴 이름들이 많아지고 있다. 졸업식날 되면 이름들을 불러야 하는 학교 관계자에겐 곤혹스런 일이다. ⓒ 한나영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이 학교 10학년 여학생인 제리카 시챔파나콘(Jerrika Sychampanakhone)의 성(姓)은 아주 길다. 영어 알파벳으로 무려 15자나 된다. 길이가 긴 만큼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그녀의 성을 제대로 불러주는 친구는 거의 없다. 그냥 에스(S)라고만 부른다. 수업 시간에 성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는 미국 학교에서 제리카가 성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없다.

하지만 공식 행사가 있을 때면 문제가 달라진다. 시상식이나 졸업식 등의 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학교에서는 언제나 학생의 풀 네임을 부른다. 그럴 때면 제리카의 성과 이름을 같이 불러야 하는 선생님은 곤혹스러워진다. 우리처럼 그냥 간단하게 두 글자, 세 글자, 혹은 네 글자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은 미국의 어느 특정 지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은 '인종 전시장'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지구상의 모든 인종과 민족이 뒤섞여 있는 나라다. 미국을 가리키는 '용광로'라는 뜻의 멜팅 파트(melting pot)는 바로 미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성(姓) 1위에서 5위까지는 스미스, 존슨, 윌리엄스, 브라운, 존스다. 흔한 성이 아니어도 일반적인 미국의 성은 발음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최근에는 히스패닉을 비롯한 이민자들이 점점 늘고 있어서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진 미국 사람들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 자기 이름이 불리면 한 명씩 단상에 올라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졸업장을 받고 내외 귀빈과 악수를 하게 된다. 지난해 해리슨버그 고교 졸업식 장면. ⓒ 한나영



떠나는 학생들을 위한 학교 쪽의 가상한 노력, 이름 부르기 연습

이런 가운데 졸업식장에서 졸업생을 호명하는 대학 관계자들이 혀가 꼬이는 어려운 이름들을 연습하느라 벼락치기 공부를 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바로 AP 통신이 전하는 '졸업식날은 혀가 꼬이는 날?'이라는 기사다. 이 기사는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많은 미국의 현실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미네소타 주 세인트 폴에 있는 마칼레스터 대학. 이 대학 행정 담당관인 니에미는 졸업식이 가까워지면 고민이 많아진다. 바로 바트나이람달 오트곤샤르(Baitnairamdal Otgonshar), 노쿠툴라 시케티웨이 키티키티(Nokuthula Sikhethiwe Kitikiti), 우도츄쿠 친예레이 오보도(Udochukwu Chinyere Obodo)와 같은 학생들 때문이다. 이들은 각각 몽골과 짐바브웨, 나이지리아에서 왔다.

왜 니에미는 이런 학생들 때문에 고민을 하는가. 바로 자신이 해야 할 일 때문이다. 니에미는 졸업식날 가족, 친구, 친척들이 다 모인 졸업식장에서 졸업장을 받게 될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다.

귀에 익숙한 미국 이름만 부른다면 사실 니에미의 고민은 고민도 아니다. 하지만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그녀는 졸업식 당일에 혀가 꼬이지 않도록 맹연습을 해야 한다. 학생들이 제출한 카드를 보면서 한 음절, 한 음절씩 또박또박 발음 연습을 하는 니에미. 그녀는 보통 4, 5일 정도 연습을 한다.

"바-트-나-이-람-달-오-트-곤-샤르.
노-쿠-툴-라-시-케-이-티-웨-이-키-티-키-티.
우-도-추-쿠-친-예-레-이-오-보-에-도-우"

사실 졸업장을 받으러 단상에 올라오는 학생들은 금방 시야에서 사라질 얼굴들이다. 이름 역시 대충 불러도 크게 문제가 될 게 없어 보인다. 그런데도 뭘 이렇게까지 시간을 보내면서 공을 들이는 것일까. 니에미의 소신은 분명하다.

"우리 대학에서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교육을 받은 졸업생이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축하를 받게 되는 날, 저의 실수로 거기 모인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아주 먼 데서 온 가족들이니까요."

외국인 유학생의 숫자가 점점 늘고 있는 미국에서 이런 문제는 다른 주에서도 마찬가지다. AP 통신이 전하는 또 다른 흥미로운 기사다.

베일러 대학 4학년생에 재학중인 샤디 라자이 주무트(Shadi Rajai Zumut). 샤디는 텍사스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학교에서 자신의 이름을 엉터리로 부르는 바람에 식장에 온 가족들이 아무도 자신을 몰라봤던 끔찍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졸업하게 되는 샤디는 아예 미리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는 졸업식 준비 담당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자신의 이름 가이드를 만들어주고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줄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고등학교 졸업식 때를 떠올리며 이번 대학 졸업식에서도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다. 그래서 이번에도 샤디의 이름이 제대로 불리지 않을 거라고 서로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미국에서의 이런 현상은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기자가 살고 있는 해리슨버그도 최근 들어 이민자들의 수가 급격히 늘었다. 주로 히스패닉이 많은데 이들 외에도 이란, 이라크 등 중동과 러시아에서 온 이민자들의 수가 많이 늘었다. 그래서 해리슨버그 고등학교에도 이민자 자녀들이 많아졌다. 그런 만큼 이들 이민자 자녀들의 특이한 성(姓)을 부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졸업식 때는 1, 2주일 연습할 작정"

▲ 해리슨버그 고등학교 교감인 미스터 냅. 졸업식에서 학생들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 위해 맹연습을 한다. ⓒ 한나영


해리슨버그 고등학교의 멋진 총각 교감 선생님인 미스터 냅(Mr. Knapp). 그는 졸업식이나 기타 수상식과 같은 공식 학내 행사에서 학생들의 이름을 도맡아 부르는 담당자이다.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았다.

- 이민자 수가 점점 늘고 있는데 해리슨버그 고등학교의 경우에는 이민자 자녀들의 현황이 어떠한가?
"우리 학교 전체 학생 1350명 가운데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학생은 약 5백 명(37%) 정도 된다. 인종별로 구분하자면 백인은 54%, 히스패닉은 29%, 흑인은 12%, 아시아계가 4%이다."

- 학교 행사가 있을 때 언제나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 것은 교감선생님 몫이던데 얼마나 연습을 하는가? AP 기사를 보면 이런 행사에서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 4, 5일 연습을 한다던데.
"나도 그 기사를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남의 일 같지 않아서다. 나도 이와 관련해 글을 하나 써 볼 작정이다. 연습을 얼마나 하냐고? 작년 졸업식의 경우에는 우리 학생들 이름을 연습하는 데 3일이 걸렸다. 이번 졸업식에서는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연습할 생각이다. 학생들 명단이 나오는 대로 1, 2주일 계속해서 연습하려고 한다.

- 그 많은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텐데 할 수만 있다면 그만두고 싶은가?
"아니다. 사실 학생들 이름을 부르는 것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고 전임 교감선생님이 했던 일이라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통해 학생들을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좋아한다. 학기 중에는 학생들 이름을 다 알지 못했는데 이런 일을 통해 더 잘 알게 되었다. 학생들 역시 내가 자신들의 이름을 다 알려고 한다는 사실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 하고 싶다.

-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은 무엇인가?
"가장 힘든 이름은 쿠르드족이나 러시아계통의 이름이다. 하지만 연습을 통해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이름 부르는 일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가?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니까 오히려 쉽고 흔한 이름을 실수하는 경우가 많았다."

▲ 미국 고등학교 졸업식. ⓒ 한나영



제대로 이름을 부르기 위해 이렇게 노력해요

운동장이나 잔디밭 등 실외에서 벌어지는 대학 졸업식에서 몇 시간 동안 가운을 입고 뙤약볕 아래 서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수백명의 이름까지 신경 써서 불러야 한다면 여간 공력이 드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학 측이 이렇게까지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이름이란 바로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남과는 다른 오직 나만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이름을 엉터리로 발음해서 마지막으로 모교를 떠나는 졸업생들에게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게 대학 측의 바람이다. 그런 까닭에 대학 관계자들은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매사추세츠에 있는 윗튼 컬리지에 근무하는 학생처장인 수 알렉산더. 그녀는 졸업식 예행 연습을 하는 동안 학생들 곁을 걸어 다니면서 자신의 발음이 옳은지에 대해 도움을 청한다. 학생들은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거나 상관없다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어려운 이름을 갖고 있는 이들 학생들은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의 이름이 엉터리로 불리는 것에 익숙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임을 앞두고 있는 수는 이번이 21번째로 마지막이 될 졸업식 리허설 현장에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아니야, 상관없지 않아. 네 어머니나 할머니가 너를 어떻게 부르는지 내게 정확히 알려다오."

이처럼 학생들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려고 하는 대학 측의 가상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바로 최첨단 테크놀로지까지 동원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의 이름을 연습하기 위해 휴대용 녹음기가 동원되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학생들의 이름을 MP3 파일에 저장하거나, 컴퓨터 소프트웨어를 이용하여 정확한 이름이 나올 때까지 학교와 학생간의 공조를 통한 편집과 녹음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는 미국의 대학 이야기가 어쩌면 다소 과장돼 보이고 코믹하게까지 느껴지는 편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까지 학생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는 대학 측의 정성이 부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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