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전, 광화문의 약속과 금남로의 약속
1980년 5월, 그 때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2007년 5월, 국립5.18민주묘지를 방문해 묘역을 둘러보던 중 '상석(床石)'을 밟아 논란이 됐다. 이 전 시장은 지난 13일 고 홍남순 변호사의 무덤 비석을 어루만지면서 상석을 발로 밟았다. ⓒ 광주드림 임문철
작년 이맘때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는 망월동을 찾았다. 하얀 장갑을 끼고 엄숙히 5·18 기념탑에 참배한 그는 묘역을 돌아보다가 한 무덤 앞에 발을 멈춘다. 그 무덤은 홍순남 변호사의 것이었다. 그는 무덤으로 다가가 한 손으로 비석을 어루만졌다. 그때 몇 사람의 시선은 이명박 후보의 손이 아닌 발로 모였다. 그의 검은 구두가 성큼 무덤의 상석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 사람들은 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이어 한나라당은 총선에서 압승했다. 이 후보와 한나라당의 득세는 서울 사람들의 지지가 결정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지난 대선에서 서울 사람들은 이 후보에게 전국 평균을 훨씬 상회하는 지지표(56%)를 던졌으며, 총선에서는 48개 지역구 중 무려 40개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당선시켰다.
서울 사람들이 변한 것이었다. 광주 사람들과 표를 합쳐 김대중과 노무현을 당선시켰던 서울 사람들, 옛날 박정희보다는 윤보선에게 표를 더 주었던 서울 사람들 아니었던가? 그랬던 서울 사람들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한나라당으로 돌아서버린 것이었다.
'민심은 천심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시인 김수영에 의하면 민심이란 조변석개하는 것, 즉 급변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다
우리의 기억은 28년 전 이맘때로 돌아간다. 1979년 박정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는 막을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 해 겨울이 깊어지도록 사람들은 12·12를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를 넘기면서 서울에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다. 박정희를 섬기던 정치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의 권력을 찬탈했다는 것이었다.
5·18, 그때 서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5월 18일, 그 날 나는 아주 이른 아침에 일어나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당시 나는 며칠의 시간을 대부분 길거리에서 보냈다. 전두환 규탄 데모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의 봄'이 왔다고 말하며 연일 세 김씨의 사진과 화면을 냈지만,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의 숫자는 급격히 줄어든 지 오래였다. 대학생들은 이제 노태우와 정호용의 이름과 실체까지도 전해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침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의 사형이 전격적으로 집행되었다. 대학생들은 매일 가두 진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박정희가 죽은 다음 날 친구들과 축배를 들이켰었다. 그랬는데 또 군인이 반란에 성공했다는 것은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소식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때 유신 선포를 처음 알았을 때와는 아주 다른 감정에 휩싸여 들었다. 유신 때에는 '박정희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하는 의혹과 놀람이었는데 비해 전두환에게는 선명한 경멸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나는 데모에 적극 가담하기로 했다.
그 당시에는 '페퍼포그'라는 유독가스를 분출하는 장갑차가 가장 무서운 데모 진압 장비였다. 검은 장갑차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엄청난 공포감을 주었다. 사과탄이라는 근거리 발사용 가스탄도 있었다. 그러나 시위가 반복되면서 시위대는 페퍼포그나 사과탄에 요령껏 대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래서 나온 신무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공중에서 럭비공 튀듯이 거칠게 비행하면서 터진다. 우리가 '지랄탄'이라고 불렀던 그 신무기는 너무 위험했기 때문인지 그다지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아마 계속 사용되었더라면 또 그에 대응하는 데모 방식도 나왔을 것이었다.
아무튼 그 때 며칠간은 군부 집단의 위기였다. 수도의 중심 시가지가 거의 일주일 동안 시위대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4.19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군사 반란자들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고 단정했다.
이미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마다 평교수협의회가 부활되었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 교수와 제적생들이 돌아와 민주화의 주도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분노한 학생들과 분개한 교수 "유신 잔당이 뭐야? 유신 어른이지"
교정은 바야흐로 데모 출정식으로 붐비고 있었다. 그들은 노래와 구호를 번갈아서 부르고 외쳤다. 나는 따사로운 봄 햇살을 받으며 출정식 토론회를 경청했다.
"여러분! 지금은 서울의 봄이 절대 아닙니다. 안개 어두운 혼미 정국입니다. 권력에 알아서 기는 신문을 믿지 마십시오. 세 김씨는 이제 개털입니다. 박정희가 대가리에 총 맞아 죽은 지 불과 47일 만에 그의 충견들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이가 하극상 군사 반란에 성공했습니다. 놈들에 의해 유신 연장 음모가 획책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민주화는 우리 손에 달렸습니다. 우리 다 함께 외칩시다. 유신 잔당 물러가고 전두환은 자폭하라!"
이어서 흘러간 노래 '홍도야 우지마라'가 뜬금없이 터져 나왔다. 음악을 배경으로 박근혜와 비슷한 음성이 나왔을 때야 비로소 나는 그 배경음악의 의미를 알아 차렸다.
"오~빠, 아버지의 원수를 가~파 주세요."
오빠는 전두환이었고 홍도는 박근혜였다.
다음으로 그들은 노래를 불렀다.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에 곡을 붙인 노래였다.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그때 머리가 벗겨진 웬 교수 한 분이 사회자에게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회자가 머뭇거리자 그는 마이크를 낚아채 버렸다. 대머리 교수의 얼굴에는 분기와 노기가 얼크러져 있는 듯했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훈계를 하려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교수님, 여기는 우리들의 토론장입니다."
"알아. 그래도 내가 한마디 할 수 있는 거잖아?"
교수는 심한 경기 사투리 억양을 쓰고 있었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민주주의라는 게 뭡니까? 반대 의견도 경청하는 거 아니우?"
곳곳에서 이런저런 고함이 터져 나왔다. 교수에게 발언권을 주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줘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반대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그 교수를 알고 있다는 기색을 보였다. 심지어는 빨리 끌어 내리라는 과격한 외침도 있었다.
"저 또라이는 왜 또 나서는 거야?"
"문교부장관 생각 있나 봐."
"야, 니 연구실로 얼른 꺼져!"
학생들은 교수에게 반말을 넘어 욕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입대하기 전만 해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교수는 한사코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여러분의 주장은 정당해요. 하지만 지성인의 언어가 너무 상스러워요. 대가리에 총 맞아 죽다니요?... 그리고 어떻게 사람에게 그것도 윗사람에게 자폭하라고 합니까? 자폭이 뭔지 알긴 해요 ? 그것은, 그것은,... 터져 죽으란 거 아니우? 또 유신 잔당이 뭡니까? 잔당이란 말을 알기나 해요? 그건 빨치산한테 썼던 말이라구요. 정 하고 싶으면 유신 어른이라고 하세요. 유신 어른!"
한꺼번에 폭소가 터졌다. 통렬하게 웃고 난 나는 이게 결코 웃을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냐하면 교수는 진정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그가 아닌 진정이었기에, 그리고 그 사람이 교수였기에 끝까지 웃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저런 분들이 계시니까 전두환이 같은 이가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구나. 민주화는 생각보다 어렵겠구나.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 대체로 이런 연상이 연쇄적으로 막막한 의혹의 연기를 지피고 있었다.
교수의 발언을 끝내게 한 것은 학생 두세 명의 완력이었다.
출정식을 마친 시위 대열이 잔디 광장을 몇 바퀴 도는 동안 참가 인원은 급격히 늘어났다. 주동자 측의 확성기는 방관하거나 주저하는 학생들을 향해 민주화의 파도에 합류할 것을 종용했다. 나는 대열의 뒤를 따랐다. 나중에 경찰과 대치하게 될 때쯤이면 그때 가서 맨 앞으로 나설 계획이었다.
▲ 18대 총선 개표가 완료된 10일 새벽 여의도 한나라당사 상황실. 한나라당은 수도권 48개 지역구 중 40개 지역구에서 승리했다. ⓒ 남소연
"시청 앞으로! 광화문으로!"... 가두 진출 방관하는 경찰
우리는 정문을 향했다. 며칠 간 계속 증가해 온 시위자 수는 그 날에 이르러 절정 선에 도달한 듯싶었다. 그런데 정문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제까지는 굳게 잠긴 철문 밖에서 경찰이 학생들의 교외 진출을 온갖 수단으로 막았는데, 오늘은 확연히 달랐다. 경찰은 정문 옆의 샛문은 열어 둔 채 그곳으로 시위대가 통과하도록 방관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 날 모든 대학에서 이런 식으로 했기에 이삼십 만에 이르는 데모대가 서울 중심지를 점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광화문부터 시청 앞과 남대문, 그리고 서울역과 삼각지와 한강 인도교까지 시위 대열은 무섭게 불어나고 있었다.
데모를 방치, 조장한 그들의 유인책에 학생들이 설령 넘어갔다고 하더라도, 이삼십만 명의 피 뜨거운 젊은이들이 수도의 심장부를 점거하고 있는 이 시간만은 반란자들의 절대적 위기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새로 지어진 광화문에서 불과 10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앉아 있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경찰은 온 힘을 다해 저지했지만 우리는 세종문화회관 이면도로를 통해 저지선을 붕괴시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뒤를 받치고 있었다.
상황이 길어지고 있었다. 별이 하나도 없는 구름 짙은 밤이었다. 들리는 말로는 각 대학의 대표가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결정을 기다리며 계속 노래를 부르거나 구호를 외쳤다.
그 날 내가 한없이 외쳐 본 구호는 '독재 타도'였다 . '독재 타도'는 아주 그럴 듯한 음성효과를 내는 구호였다. '독재'와 '타도'라는 두 단어는 강렬한 대구를 이뤄 낸다. '독재'와 '타도'를 나눠서 주고받으며 서로의 교감과 동질감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구호였다.
'굿바이' 아닌 '쏘롱'으로 작별... 그러나
대표자 회의의 결정이 발표되었다. 그들의 결정은 나의 모든 예상 중 어느 것 하나와도 같지 않았다. 그들은 세 가지 안건을 놓고 약식으로 토론했다고 경과를 보고했다. 제 1안은 여의도 광장으로 가서 규탄대회를 한 후 해산, 제 2안은 현 위치에서 밤샘 농성, 그리고 제 3안은 우리의 의사를 알릴만큼 알렸으니 일단 해산 후 관망한다는 것이었다. 결정은 제 3안으로 났다고 했다. 단 반란자들이 우리를 악용하여 휴업령이나 계엄령을 내리면 무조건 다음날 아침 광화문으로 다시 모이기로 한다는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
나는 실망했다. 그러면서도 웃었다. 제 1안 때문이었다. 여의도도 물러날 거면 뭐 하러 이곳까지 왔냐고 그들에게 묻고 싶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대학생 지도부에는 성균관대의 민병두 그리고 서울대의 심재철, 유시민 등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결정 사항과 사후 약속은 모든 이에게 철저히 알려야 했다. 시간이 들더라도 앞에서 뒤로 릴레이식 구두 전달 방식을 쓰기로 했다.
"오늘은 이만 해산. 계엄령 내리면 다음 날 아침 8시 광화문 집결."
약속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전달되고 있었다. 마침내 약속이 한강까지 전달 완료됐다는 연락이 오자 우리는 모두 이산가족처럼 남녀 없이 얼싸안고 서로 노고를 치하하며 다짐했다.
광화문입니다. 광화문으로 모입시다. 광화문에서 다시 봅시다.
그 날 우리 모두의 작별 인사는 이것이었다. 영어로 말해서 우리는 모두 '굿바이'가 아닌 '쏘롱'으로 작별한 것이었다. 때마침 내린 적지 않은 양의 봄 소나기가 우리들의 열기를 삽시에 식혀 버리고 있었다.
모든 이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계엄령 확대와 휴업령이 내려졌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화 끈을 묶었다. 집에서 광화문까지는 버스로 20분 거리였지만, 나는 버스가 그곳까지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삼십만 명이 한꺼번에 몰려들 터인데, 도로가 막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껏해야 종로 3,4가 쯤까지나 버스 타고 갈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 날 나는 운동화와 어울리지 않게 양복을 꺼내 입었다. 혹시 검문을 받게 되면 대학생이 아니라는 나의 주장을 그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예상과 달리 버스는 종로 시가지를 질주하더니 불과 10여 분만에 나를 광화문 바로 옆 종로1가에 내려 주었다. 나는 내 귀와 눈을 의심했다. 주위는 평소보다 조용했으며 넓은 교차로에는 거의 사람의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네거리 모퉁이마다 장갑차량과 무장 군인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처음 나는 내가 약속을 잘못 알고 온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었던 시간과 장소에는 전혀 착오가 없었다.
▲ 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80년 5.18 당시 전남대 정문 ⓒ 5.18기념재단
계엄령 이후 다시 찾아간 광화문은 썰렁했다, 금남로와 달리
나는 종각 뒷골목으로 걸어가 보았다. 힐끔힐끔 주변을 살피는 교련복 차림의 대학생 몇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나는 미국 대사관 쪽으로 앞서 갔다. 아무래도 거기서 시작하는 것이 나을 성싶었다. 또 다른 대학생 두셋이 차도 가까운 곳에 서서 마주 오는 우리를 무연히 보고 있었다.
나는 나지막하게 읊조려 보았다. "도옥재". 그러자 교련복 몇이서 화답해 왔다. "타아도" 나는 약간 소리를 높여 불러 보았다. "도옥재" 그러자 다시 응답이 왔다. "타아도"
순식간에 우리는 열 명 가까운 인원으로 불어났다. "독재 타도, 독재 타도." 우리는 공포감을 이기기 위해 구호 복창의 속도를 높였다. 우리는 차도로 나서 이순신 동상을 향해 발맞추어 뛰었다. 맞은 편 세종문화회관 골목에서, 그 위쪽의 녹지 나무 사이로, 아래쪽의 신문 가판대에서, 서너 명씩의 학생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독재 타도. 독재 타도, 독재 타도. 어느새 우리는 독재와 타도를 나눠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이순신 동상을 구호에 맞춰 돌았다. 나는 눈어림으로 인원을 헤아렸다. 이십 명 정도였다.
그때였다.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새로 지어진 광화문 쪽에서 무려 이삼천 명 정도의 무장 군인들이 우리를 포위하기 위해 대열을 갖추고 있었다.
"각자 도망치자!"
나는 고함을 지르면서 시청 방향으로 튀었다. 무장 군인 대여섯 명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군인들의 다리와 다리 사이로 다이빙하듯이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재빨리 일어나 다시 달렸다.
나는 시청 앞에 있는 프라자 호텔의 로비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양복 깃을 추스르며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커피숍은 광장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2층에 있었다. 의외로 광장은 평온하고 한가해 보였다. 모두 잡혔을 것이었다. 체포되지 않은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약속을 지킨 사람은 20만 중에 20여 명, 즉 만분의 일이라는 계산을 해 보았다. 당시 지도부에 있었다는 심재철과 민병두와 유시민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광화문에 나왔을까?
아무튼 이렇게 됨으로써 서울의 투쟁은 끝나고 말았다. 약속을 지킨 것은 광주의 학생들뿐이었다. 그리고 광주의 학생들이 약속을 지킴으로써 서울의 학생들은 광주의 학생들을 배신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광주의 학생들은 광화문 대신 금남로로 모여 들었다.
서울 사람들은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이명박과 한나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버렸다. 이것을 광주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덧붙이는 글
김갑수 기자는 작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소설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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