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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밥 자시러 와유"

[북한강 이야기292] 고향 논둑 '못밥맛'을 어찌 잊을까

등록|2008.05.18 14:50 수정|2008.05.19 14:12
농촌 들녘에 모심기가 한창이다. 나는 벼농사는 짖지 않지만 일꾼이 딸리기 때문에 모내기 일손을 돕는다. 모판도 날라 오고 모종도 이앙기에 실어주고 빈 모판들을 물에 씻어 정리도 한다. 그 때마다 뻐꾹새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온다. 해가 좀 기웃하면 참을 먹는다. 또 한참 모를 심다보면 못밥 먹을 시간이 된다. 논두렁에 모여앉아 먹는 못밥맛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고향의 향수와 구수한 고향의 맛을 배속 그득하니 담아준다.

▲ 이앙기가 '따박따박' 모를 심고 있다. ⓒ 윤희경


논배미에 물이 그득하게 고여 파란하늘이 잠겨오면 써레로 논을 썰고(써레질), 나래로 논바닥을 노골노골 다듬어 놓는다(번지질). 옛날 같으면 일소들의 몫인데 지금은 트랙터와 관리기가 대신한다. 트랙터가 질퍽거리는 논 속으로 들어가 철버덩거리며 써레질이 시작되면 흑 탕 물이 툭툭 튀어 오르고 논바닥은 금세 곤죽으로 변한다.

써레질과 나래질 후 이삼일이면 흙탕물이 가라앉고 논배미마다 하얀 물이 찰랑거린다. 물이 차오르고 파란하늘이 논다랑에 가득 잠겨오면 이때부터 밤잠을 못 이룬다. 온 세상 개구리들이 논 안으로 모여들어 와글거리기 때문이다.

▲ 한 농부가 하얀 물이 차오른 논둑을 건너오며 논물을 보고 있다. ⓒ 윤희경


요즘 논배미 속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소리는 봄밤의 듣던 그 소리가 아니다. 봄의 소리가 전원 교향곡이라면 지금 소리는 폭죽이 터지는 황홀한 울림이다. 일시에 왁자지껄하다 뚝 그치고 또 와글거리며 논바닥을 한바탕 뒤집어엎는다. 두레패가 놀다 잠시 숨을 고르듯 아우성과 정적을 반복하며 긴 여름밤을 울며 지새운다. 울음 결에 녹아내리는 합창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빈 마음에 옹달샘이 파이고, 새로운 계절에 대한 설렘으로 가슴이 절렁거린다.

요즘의 모심기는 이앙기가 다한다. 모판을 싣고 긴 논둑을 따라 걸음을 옮겨 놓으면 꿈처럼 나란하게 모 줄이 생겨난다. 이앙기가 전진할 때마다 이앙기 운전수는 모 줄이 똑바로 나란 한가 돌아보고 또 돌아본다. '따 박 따 박' '차착 착착' 정들여 모를 심어보지만 다락 논배미가 많다보니 모 줄이 바르게 설 리 없다. 줄이 좀 삐뚤면 어떠랴, 나름대로 자연스러워 운치가 더하다.

이앙기가 논배미를 빠져나오면 귀퉁이나 자투리땅은 품앗이꾼들이 들어가 빈자리를 메운다. 파랗게 변한 논배미 속에 모를 꼽는 농부들의 모습은 지금 막 내려앉은 흰 왜가리들을 보듯 아늑하다.

못밥을 이고 오는 시골 아낙들못밥을 이고 오는 시골 아낙들의 모습이 너무 재미있다. ⓒ 윤희경


"윤씨, 못밥 많이 자시어유"라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답고 구수하다. 모심는 구경도 신나지만 논두렁에 모여앉아 먹는 모 밥(두레밥)은 그 맛이 더욱 유별나다. 고사리, 머위, 나물 취, 도라지, 돌나물, 풋김치... 이밥도 있고 보리밥도 있다. 골라 먹으라지만 요샌 보리밥 인기가 더 좋다. 보리 비빔밥에 시원한 조 껍데기 막걸리 한 대접을 들이켜고 나니 아랫배가 불룩 행복이 차오른다.

▲ 논둑에서 먹는 고향 새참맛을 내 어찌 잊힐리요! ⓒ 윤희경


논배미마다 그득하게 들어찬 모들을 바라보는 기쁨은 남다르다. 어서 모살이가 잘돼 벼 포기마다 통통 살이 오르고 새끼를 쳤음 한다. 조금 전부터 귀한 단비가 내려 파란 모포기 순들이 팔랑팔랑 춤을 추고 있다.

올해엔 풍년이 들려나 보다. 아까부터 소쩍새 '솥 적다' '솥이 적다' 가마솥을 큰 것으로 바꾸라며 논배미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덧붙이는 글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과 농촌공사 전원생활, 북집 네오넷코라어,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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