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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퇴짜야?" 여행객 허무하게 하는 '인터넷예매'

연속 퇴짜 맞은 우리 가족 연중 여행

등록|2008.05.23 21:32 수정|2008.05.24 08:53
우리 가족 여행 갈까?

우리 식구에게 5월은 여행의 계절이다. 물론 5월에 나들이 하는 것이 어디 우리만의 이야기이겠느냐만은 우리 가족에게 5월의 여행은 매우 특별하다. 그것은 5월 1일 부모님 결혼기념일부터 시작해서 사월 초파일보다 1주일 빠른 어머니 생신, 그리고 5월 8일 어버이날까지 그 모든 것을 기념하여 떠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사실 철이 들고 난 이후 5월이 되면 나는 그 기념일들을 맞아 잔뜩 고민을 했다. 얼마 되지 않는 간격으로 다른 선물을 생각해 낸다는 것은 주변머리 없는 아들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행은 이와 같은 고민의 진화된 결과였으며, 그렇게 굳어진 5월의 여행은 몇 년 전부터 우리 식구의 연례행사가 됐다.

그러나 5월의 여행은 내가 취직한 이후 또 다시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직장인에게 시간이란 결국 주말 밖에 없을진대, 5월의 주말이면 그 어디를 가더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치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버지 정년 퇴직 후 평일에 한가하게 돌아다니시던 부모님에게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올 5월은 두 번의 연휴가 있었고, 우리 식구는 또다시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비록 예전처럼 여유 있는 여행은 아니었지만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족한 게 여행 아니겠는가. 우리는 사월 초파일이 낀 두 번째 연휴를 디데이로 잡았다.

새벽 5시, 정선으로 고고~

연휴의 시작이었던 토요일은 내가 출근을 해야 했기에 우리의 여행은 일요일 새벽 5시부터 시작됐다. 부스스 일어나 대충대충 씻고 무조건 승용차를 몰아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제야 시작되는 방향에 대한 고민.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식구끼리 나서도 그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전도를 펴놓고 보아도 안 가본 곳이 거의 없는 우리 식구 아니던가.

정선의 색깔아직 연녹색을 간직한 정선 ⓒ 이희동


오랜 고민 끝에 우리 가족이 택한 곳은 강원도 정선이었다. 식구 각자 따로 또 같이, 제각기 다른 이유들로 수도 없이 들렀던 정선이었지만 경험상 이 계절에 정선이 가장 예뻤다. 주위 산천은 어느새 여름의 짙은 녹색으로 변해 가지만 정선 그곳은 가장 늦게까지 연녹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막상 우리의 목적지가 정선으로 결정되자 아버지는 느닷없이 정선 레일바이크를 언급하셨고, 그 다음 스케줄로는 삼척의 대금굴을 말씀하셨다. 아마도 작년에 어머니와 내가 탔던 레일바이크 경험담이 매우 솔깃하셨던 모양이었다.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정선으로 출발!

아무리 연휴라고는 하지만 새벽 5시~6시는 역시 이른 시간임에 분명했다. 우리는 뻥 뚫린 88올림픽대로를 지나 중부고속도로를 탔고, 여주에서 나와 제천, 평창을 거쳐 정선으로 길을 잡았다. 결코 가깝지 않은 거리였지만, 다행히 길이 막히지 않아 그나마 지겨움을 덜 수 있었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촌장집남북이 대치되었던 평상 ⓒ 이희동


영월과 평창의 경계쯤 왔을까? 길옆으로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세트장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광평창'을 부르짖더니 눈치상 이곳은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군에서 꽤 많은 자본을 들이며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했던 명소인 듯했다. 정선에 가도 뾰족이 갈 곳이 없던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세트장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각 탓이었는지, 아님 영화 인기가 이미 많이 식은 탓인지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세트장은 그 얼레벌레 지어진 가옥들에도 불구하고 조용한 산간 오지 마을 같아 보였고, 우리는 그곳에서 영화의 감동을 되새김질했다. 때마침 이 영화는 가족끼리 본 영화이지 않은가. 금방이라도 영화에서처럼 '스미스'가 방문을 덜컥 열고 우리를 쳐다볼 것만 같았다.

2005년도였던가? 영화가 끝나고 나 혼자 훌쩍거리고 있음을 알았을 때 얼마나 창피하던지. 한국전쟁 당시 이 땅에 살던 민초들에게는 남북이란 국가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가주의의 폭력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던 그 영화. 개인적으로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내 논문의 주요 모티브 중 하나였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세트장점점 조잡해지는 세트장 ⓒ 이희동


개인적인 감흥은 있었지만 세트장은 그렇게 오래 있을 만큼 볼거리가 많지 않았다. 영화가 상영된 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러서인지 세트장은 방치되어 가고 있음이 분명했고, 이대로라면 머지 않은 시간에 이 공간이 그 자체만으로 오염원이 될 듯했다.

다른 지방의 영화·드라마 세트장도 모두 그렇겠지만 재활용에 대한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계획 없이 무분별하게 세트장을 우후죽순 관광화 시키는 것은 분명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돈이 될지 모르겠으나 추후에는 분명 그 공간에 대한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트장을 나와 다시 정선으로 길을 나서는데 마을 어귀를 나올 무렵 그 마을에 대한 간략한 안내판이 발길을 잡았다. 석탄으로 유명했던 이 동네에 한때 인구 3만 명이 살았다는 구절. 이렇게 한적한 동네에 3만 명이나 살았다니. 역시 만물유전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고대하던 정선 레일바이크, 그러나

이윽고 정선에 들어섰다. 그러나 주위의 풍경은 예상 외로 연녹색보다는 짙은 녹색에 가까웠다. 아뿔싸, 그러고 보니 정선에는 항상 어머니 생신 주에 왔었구나.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의 차이였건만 산천의 색깔이 이리도 다르다니. 

정선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정선 레일바이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그 방향으로 향하는 모든 차들이 레일바이크를 타기 위한 이들 같아 보였다. 그래도 레일바이크 좀 타보겠다고 새벽부터 나선 발걸음인데 설마…. 하지만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고 주위의 산천을 돌아볼 새도 없이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정선 레일바이크의 추억작년 8월의 그 날 ⓒ 이희동


레일 바이크 도착. 그러나 주차장은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빽빽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매표소가 자리한 역사에서 줄을 선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한달음에 달려가셨던 아버지께서 섭섭한 목소리로 다시 돌아오시더니 한 말씀 하신다. 오늘 표는 다 매진되었다고. 이런.

차에서 내려 자초지종을 살펴본 바, 오늘 좌석의 반은 이미 인터넷 예약으로 몇 달 전에 동이 났고 그 나머지 현장 판매 분은 새벽부터 줄을 서서 아침 7시 반쯤께 다 팔렸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른 채 새벽 5시에 일어나 레일바이크를 타겠다고 여기까지 열심히 달려온 우리의 꼴이라니.

아쉽지만 별 수 있는가.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그러고 보면 작년 8월의 어느 주말, 아무 준비도 없이 왔다가 출발 바로 전에 표를 사서 레일바이크를 탔던 나의 경우는 매우 운이 좋은 사례였음이 분명하다. 기상청의 비 소식 때문에 현장 판매가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던 상황. 물론 마지막에는 빗방울을 조금 맞아야 했지만 그 정도면 헛걸음질보다 분명 양호한 경우였다.

오장폭포꿩대신 닭이라고 레일바이크 대신 오장폭포를 찾았지만 물이 말라 있었던 오장폭포 ⓒ 이희동


못내 아쉬워하시며 당장 다음 주 평일을 기약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그 다음 목적지인 삼척 대금굴로 향했다. 날씨도 좋고 그나마 아직 싱그러움이 남아 있는 정선이었지만 한 번 퇴짜를 당한 마당에 모두들 정선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아우라지가 그 아우라지고, 5일장이 그 5일장일 뿐.

삼척 대금굴 앞에서... "또 퇴짜야?"

정선에서 삼척 넘어가는 길은 굽이굽이 높은 재를 몇 번이고 넘어야 했고, 재 정상에서 바라본 풍경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아직 연녹색을 채 벗지 못한 산천의 빛깔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현대인들은 이 재를 차로 넘으면서도 이렇게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예전 사람들은 걸어서 이 재를 넘으며 얼마나 많은 영감을 얻었을까. 영감은 결코 쉽고 편한 몸짓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선에서 동해 넘어가는 길굽이굽이 넘는 재 ⓒ 이희동


동해를 지나 삼척에 다다르니 대금굴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번 달 사촌의 결혼식에서 만난 큰어머니가 다녀오셨다며 입이 마르도록 자랑했던 바로 그 동굴. 큰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대금굴에 비하면 환선굴은 장난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동양 최고라고 광고해왔던 환금굴이건만 도대체 대금굴은 어떻게 생겼기에 이리도 찬밥이 된 걸까?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처음에는 대금굴이 우리가 찾던 그 동굴이 맞는지 긴가민가했지만, 삼척에 들어서는 순간 대금굴의 안내판만이 모두 새로 정비한 것인지라 확신할 수 있었다. 대금굴에 대한 기대 때문일까? 오전의 정선 레일바이크와 마찬가지로 우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모든 차들이 대금굴행인 것 같았다. 설마 또 표가 없는 건 아니겠지?

삼척에서 태백 방면으로 얼마나 갔을까? 저 멀리 큼지막한 동굴 종유석 모양의 구조물이 개선문처럼 서 있었다. 대금굴과 환선굴이 함께 씌어져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두 동굴은 같이 붙어 있는 듯했다.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대금굴을 보고 나면 곁다리로 환선굴도 볼 수 있게 해놓았다니 과연 대금굴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구조물 앞에서 우회전을 한 우리는 표지판을 따라 더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8년 전에 만들어진 지도 책자를 보니 그 길의 끝에는 환선굴만이 표시되어 있을 뿐, 주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동굴 때문에 만들어지거나 포장된 길이라는 이야기인데 과거 이곳은 얼마나 산간오지였을까?

산이 깊어지는 만큼 그 색이 연해진다 싶더니 창밖으로 현수막 하나가 지나갔다.

'대금굴 관람은 인터넷 예약으로만 가능합니다'

순간 차 안은 정적으로 휩싸였다. 설마, 또 퇴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끝은 보고 가야지 않겠는가. 현수막이 잘못 되었기를, 현장 판매분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차를 몰아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제발.

드디어 등장한 동굴 입구의 매표소. 대금굴을 관람할 수 없느냐는 우리의 질문에 직원은 매정하게 대답했다. 이미 인터넷으로 6월까지 모두 예약되어 있다고, 인터넷 말고는 다른 방법으로 예매하는 방법이 없다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서두른 결과가 결국 두 번의 퇴짜란 말인가. 오랜 만에 식구들과 돌아다니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여행길이었지만, 막상 두 번씩이나 거절을 당하니 기분이 썩 좋을 리 없다. 여행 이전부터 꼼꼼히 계획하지 않았던 우리의 잘못도 잘못이었지만, 모든 예약을 인터넷을 통해 받는다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관람객을 모으는 입장에 있어서 인터넷 예매는 매우 유용한 수단일 것이다. 현장 판매 분을 남기기보다 전량 인터넷으로 판매한다면 그만큼 빈 좌석의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우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이들이 예매를 할 것이오, 동굴관광과 연계해 다른 상품을 준비하는 여행사들이 대량 구매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여타 관광객의 경우이다. 컴맹에다가 단체관광을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100% 인터넷 예약은 동굴 관람을 하지 말란 이야기와 같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하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여행 상품을 강제 구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구조가 옳은 것일까? 특정 계층을 제외한 채 관광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닐까?

물론 관광의 궁극적 목표는 이윤추구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국민의 권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근대국민국가가 수학여행을 통해 국토를 재발견시키고 국민을 만들어가듯이, 여행이나 관광을 통한 국토순례는 국민이 형성되는 경로 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권리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것은 국민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접근권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기본권을 컴퓨터를 원활히 다루지 못한다는 이유로, 원하지 않는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기본권이 어찌되었든 간에 현실은 퇴짜였다. 우리는 다음을 기약한 채 핸들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열심히 지도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두 번이나 퇴짜 맞은 우리 가족들을 군소리 없이 받아줄 그런 곳을 찾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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