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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뒤에, 끊임없이 중얼거리다

[인터뷰] <라일락 향기> 출간한 소설가 김영현

등록|2008.05.27 08:52 수정|2008.05.27 08:52

▲ 최근 소설집 <라일락 향기>를 출간한 소설가 김영현. ⓒ 홍성식

소설가 김영현이 오랜만에 새로운 소설집을 들고 독자들을 찾아왔다.

쓸쓸함과 외로움의 향기가 깊숙이 밴 문장 속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뜨거운 시대와 안타까운 인간군상을 더듬고 있는 <라일락 향기(실천문학사)>. <내 마음의 망명정부>를 낸 것이 1998년이니 소설집 출간은 10년 만이다.

지난해 장편소설 <낯선 사람들>과 산문집 <나쓰메 소세키를 읽는 밤>을 연이어 내며 오십대 중반 중견작가의 건재함을 과시한 김영현. 이번에 10년간 꾸준히 집필해온 단편소설을 모아 출간한 그는 이 3권의 책으로 "세상 속에서 내 몫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라는 소감을 전했다.

혈관에서 꿈틀대는 피가 뜨겁던 20대 시절,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몸담으며 수차례 고문과 옥고를 치르기도 한 그는 1984년 창작과비평사가 발간한 14인 신작 소설집에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라는 제목의 단편을 내놓으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허니, 올해로 등단 24년째. 이제 문학과 세상에 대해 유연해질 법도 하지만, 그는 여전히 단호하다.

"21세기를 횡행하는 감각주의와 물신주의, 속물주의를 보면서 인간의 존엄함과 삶의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바로 이 때 문학의 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작가인 내가 안고 나가야할 몫이다. 이 생각은 등단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한 편의 시에서 창작 아이템을 얻은 '나는 몽유하리라'부터 형식실험을 통해 분열된 인간의 자아와 세계를 문학적으로 진단하는 '개구리'까지 모두 7편의 단편을 모아 묶은 <라일락 향기>.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23일 밤. 김영현을 만나 새 소설집과 그가 간직한 문학적 포부에 관해 물었다. 여기에 더해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와 '고교생들의 사회 참여'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눴다. 아래는 그가 때론 차분한 목소리로, 가끔은 격앙된 어조로 들려준 문학과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라일락 향기>... "외로움에 더해 시간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

- 10년 만에 내놓는 소설집이다. 소회가 없지 않을 텐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 첫 번째 소설집을 냈을 때 이른바 '김영현 논쟁'이 있었다. 변혁운동의 일선에 서 있던 사람이 낸 책에 담긴 인간적 고뇌와 실존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던 것이다. 문단만이 아니라, 운동권 내부까지 시끄러웠다. 돌아보니 그게 벌써 20년 가까운 기억 저편의 일이다.

이번 책은 내 소설만이 아니라 인생 여정을 돌아본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변혁운동과 인간적 고뇌, 존재와 실존의 경계에서 살아온 한 작가의 모습을 가감 없이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라일락 향기>를 통해 미학적 자유를 얻었다. 이제 독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길을 의연히 걸어갈 용기가 생겼다."

▲ ⓒ 실천문학사

- 문학평론가 복도훈은 이번 소설집의 핵심 키워드를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이에 동의하는가?
"외로움만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를 말하고 싶었다. 시간 속에는 추억과 망각이란 것이 동전의 양면처럼 존재한다. 지난 시대의 뜨거움(추억), 그 그늘에서 벗어나(망각) 새로운 시대에 직면한 작가가 '사유'의 결과물로 얻은 철학적 성찰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때론 끊임없이 중얼거리다가도 한순간 말없음표를 찍는 것. 이런 것들이 이번 책을 통해 얻은 미학적 성취라고 생각한다."

- 뜨거운 시대와 함께 사라진 이념과 공동체가 추구해야할 공공의 가치가 상실된 것에도 아쉬움이 클 듯하다. 수록된 일부 작품에선 그런 작가의 안타까움이 읽히는데.
"맞다. 감각주의, 물신주의, 속물주의가 판치는 현 시대를 보면 과연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이고, 삶의 가치란 어떤 것인지 회의하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문학적 위상이 어떠해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여전히 내게 남겨진 과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물 간 검객이다.(웃음) 하지만, 황혼에 선 검객일지언정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세상을 바꾸려 노력한 작가의 몫이 아닐까."

- 작가, 번역가, 좌절한 혁명가 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록작이 적지 않다. 이는 '인간 김영현'의 모습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가? 자신의 모습이 소설 속에 반영된 것인가.
"개인적 경험이 담겨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영에서 보낸 나날들'엔 눈 때문에 오도가도 못 하고 한 달 내내 시골 여관에 발이 묶였던 내 체험이 들어갔고, '여름에서 겨울 사이'의 경우는 내가 출판사를 그만두고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던 때의 기억이 담겼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일부다. 대부분의 작품에선 한 사회의 전형적인 인간군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피리소리와 같은 문학을...

- 우매한 질문일 수도 있다. 소설이 세상을 바꾸거나,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가?
"문학의 역할이 빛나던 시기는 계몽기였다. 나쓰메 소세키나 노신, 이광수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작가들이 혁명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문학은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했다. 소설가들 대부분이 사소한 이야기에만 집착한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담론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사라졌다. 참담한 심정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작가들이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피리소리' 같은 문학을 지향해야 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가지고 있다."

- <라일락 향기> 수록작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것인지.
"기존 소설작법과는 전혀 다른 형식으로 쓴 '개구리'다. 이 작품이 발표된 후 '이게 소설이냐'라는 혹평부터 '새로운 시도이자 새로운 발견'이라는 호평이 동시에 나왔다. 나는 '개구리'를 통해 분열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의식분열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형식 자체를 일그러뜨린 것이다. 헤겔철학과 변혁운동의 과정, 소설미학에 대한 이해를 두루 갖춘 평론가가 이 작품을 제대로 해석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나를 더 선택하라면 쓸쓸하면서도 감미로운 '라일락 향기'를 더하고 싶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집착하는 종교와 철학, 구원의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 노력한 작품이다. 이 감독의 영화가 내 소설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다."

- 책의 마지막 '작가의 말'을 통해 '나의 일관된 관심은 세상에 대한 문학적 서술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해명에 있다'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나는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과 종교, 존재와 생로병사 등의 철학적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내 화두일 수밖에 없다. 동시에 나는 작가이니 그러한 철학적 문제를 문학적으로 서술하게 될 것이다. 그 서술의 근간에는 사물의 본질을 해석하고 파악하려는 철학적 태도가 언제나 자리해 있을 것이다."

▲ 소설가 김영현. ⓒ 홍성식


"빈부격차, 갈등과 증오 해결 위해선 이명박 정권이 겸손해져야"

- 20대부터 사회 변혁운동에 꾸준히 참여해온 사람으로서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집회'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현재도 문화를 통한 사회 개혁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설 때만 해도 합리성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좌절로 바뀌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현재로선 향후 4년9개월이 걱정스럽다. 국민들 간의 갈등과 증오가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더욱 극심해질 빈부격차도 위험한 뇌관이다. 이런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장 먼저 이명박 대통령이 겸손해져야 한다."

- '촛불 집회' 등을 통해 사회 변혁을 요구하는 고등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건 그들 사이에 새로운 문화가 생기고 있다는 징후다. 기성세대의 오염에 대한 신선한 저항으로 보여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어디서건 기죽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그들의 모습은 또 다른 차원에서의 '(고교생) 인간선언'으로 보인다. 그 선언의 무게는 프랑스 68혁명이나 1987년 6월항쟁의 그것과 비교해도 결코 가볍지 않을 것 같다."

- 고교생들만이 아니라, 연예인들도 정치와 사회문제에 대한 발언을 시작했고, 그 수위도 높다. 이런 현상이 지난 시기 문인들의 사회참여와 비교되기도 하는데.
"지난 10년 동안 각 분야에서 자기각성이 이뤄졌다는 증거가 아닐까싶다. 정치와 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계층과 조직이 넓어지고 늘어났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대다수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지 않다. 정권은 국민을 교화의 대상이 아닌 논의와 대화의 상대로 인정해야 한다."

- 마지막으로 향후 집필계획은.
"작년에 낸 장편과 산문집, 이번 소설집 출간으로 내게 맡겨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다. 문학적 숙제를 마친 느낌이랄까. 이제 다시 신발을 고쳐 신고 보다 본격적인 장편소설 작업을 시작하고 싶다. 전후세대가 겪은 고난을 그려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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