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강대교 ⓒ 유혜준
한강대교를 하루에 두 번씩 건넌다. 아침에 출근할 때 한 번, 저녁에 퇴근할 때 또 한 번. 물론 버스를 타고 건넌다. 며칠 전, 퇴근길에 버스 안에서 보니 한 남자가 카메라를 메고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건너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나 어렸을 때, 한강대교는 제1한강교로 불렸다. 혜은이의 <제3한강교>라는 노래는 그래서 나올 수 있었을 게다. 지금이라면 제3한강교 대신 <한남대교>가 노래제목이 되지 않았을까?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넌 적이 있기는 한데 언제 마지막으로 건넜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생 때인가 두어 번 걸어서 건넜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중학생 때는 등굣길에 버스 안에서 같은 반 친구가 걸어서 그 다리를 건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삼각지에 있었고, 그 아이는 그날 지각을 했다. 나중에 왜 걸어서 한강을 건넜느냐고 물었다. 차비가 없어서 걸었단다. 그 아이, 고아원에 있던 아이였다. 그 뒤에도 그 아이는 툭 하면 지각을 했다. 그 아이, 지금쯤 어디서 뭘 하면서 살고 있을까?
버스를 타고 건너던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너보기로 했다. 차를 타고 휙 지나는 한강대교와 걸어서 건너는 한강대교, 확실히 차이가 있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건 다르니까.
이 다리, 참으로 오랜 역사를 가졌다. 한강 위에 최초로 놓인 인도교다. 그러니 이름이 제1한강교였겠지. 한강대교로 이름이 바뀐 건 1984년이라고 한다. 길이는 1005미터.
한강대교, 한강 최초의 인도교
▲ 한강대교, 노량진쪽 ⓒ 유혜준
한강대교,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이 다리가 폭파되는 장면이 아닐지. 물론 실제로 보지 못했다. 6·25 전쟁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장면을 영화로 참 많이 봤다. 나 어렸을 때, 반공영화 여러 편 봤다. 단체관람, 그런 거 통해서. 6·25 다룬 영화에 자주 등장하던 게 한강대교 폭파 장면이었다.
한강대교가 폭파된 것은 1950년 6월 27일 오전 2시. 전쟁이 끝나고 완전복구된 것은 1954년. 물론 당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1980년대 들어와서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순서가 바뀌었지만 이 다리, 누가 놨을까? 6·25 때 있었던 다리라면 그 이전에 건설되었을 것은 분명한 사실. 조선총독부가 1916년 3월에 착공해서 1917년 10월에 준공했다. 9년만 있으면 건설 100년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다리만 놓고 보면 결코 짧지 않은 역사다.
그냥 걸어서 건너면 그만이지 한강대교의 역사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다. 그래도 아는 게 모르는 것보다 낫지 않나. 그래서 간단하게 짚어 보았다.
27일 오전,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넜다. 이 다리, 중간에 중지도(노들섬)가 있다. 중지도를 중심으로 노량진 쪽은 동작구, 반대쪽은 용산구다. 용산구 표지판을 늘 무심히 보고 지나쳤는데 가까이서 보니 한강도 금을 그어서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량진 쪽 다리에는 아치형 구조물이 있는데 용산 쪽 다리에는 없다. 이 아치 구조물 위에 가끔 사람들이 올라가서 시위를 한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도 겁나는데 그곳을 올라가다니, 대단한 배짱이 아닐 수 없다. 아니면 그만큼 절박하든지.
한강대교의 아치형 구조물에 올라가는 사람들
▲ 한강대교, 용산쪽. ⓒ 유혜준
얼마 전에도 퇴근길에 한 남자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아치의 가장 높은 곳에 남자가 서 있었고, 두 명의 경찰관이 남자를 마주 바라보면서 낮은 곳에 서 있었다. 내려오라고 설득하는 것이겠지. 덕분에 다리의 교통은 꽉 막혀 있었다. 나는 버스에 탄 채 반대편 차선에 있었고.
무슨 사연으로 저 남자는 저기에 올라간 것일까.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저녁 뉴스 시간에 나올까 해서 봤는데 안 나왔다.
한강대교 위를 걷는 것은 도로를 걷는 것과 확실히 다르다. 자동차들이 빠른 속도로 달릴 때마다 다리가 흔들렸다. 아주 심한 것은 아니지만 흔들릴 때마다 솔직히 겁이 났다. 이러다가 무너지는 것 아냐, 그럴 리는 없지만 이런 생각도 들고.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노량진에서 용산으로 가는 차선은 자동차들로 꽉 차 있었지만 반대편 차선은 텅텅 비다시피 했다. 확실히 시내로 들어가는 차량이 많다. 퇴근시간에는 반대겠지만.
강물을 내려다보면서 걷는데 뒤에서 따르릉 소리가 들린다. 자전거다. 자전거 타고 한강대교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전거 타는 복장을 완전하게 갖춘 사람도 있고, 평상복 차림인 사람도 있었다. 물론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 사람도 두어 명 있었다. 한 열 번쯤은 비켜준 것 같다.
문득 아치형 구조물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어 버렸다. 낙서가 잔뜩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사람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얘기가 되는 건가?
낙서의 내용, 참으로 다양하다.
- 교육부 장관, 너가 근의 공식을 알어?!!
- 전두환 재산 29만원
- 세상에 빽 있는 새끼들 좋겠다 잘 처먹고 살아라...
- 명박아 광우병 소고기 너나 처먹어
- 나와따 추워 디져
- XX야 사랑해
누가 처음 시작했는지 몰라도 다양한 내용의 낙서가 아치 구조물의 끝까지 이어졌다. 예술이 따로 없다. 이 낙서 구경하려면 한강대교 걸어서 건너보시라. 그런데 교육부 장관에게 하필이면 '근의 공식'을 아느냐고 물은 이유가 뭘까?
교육부 장관, 너가 '근의 공식'을 알어?
▲ 이원등 상사의 부조 ⓒ 유혜준
중지도에는 동상 하나가 세워져 있다. 이원등 상사다. 고공낙하 훈련 중에 동료의 낙하산이 펴지지 않자 그것을 펴주고, 자신은 낙하산을 펼 시간이 없어 그대로 한강에 추락해 사망했다. 한강은 당시 꽁꽁 언 상태였다. 1966년의 일이다. 이 상사가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서 있는 동상 옆에는 당시의 장면을 재연한 부조가 있다.
그 앞쪽으로 벤치가 여러 개 놓여 있다. 동상 뒤쪽으로 보이는 벤치에는 노숙자 한 사람이 자고 있었다. 벤치 하나에는 누군가가 식사를 한 듯한 도시락 흔적이 남아 있다. 메뉴는 생선초밥이었던 듯.
중지도에서 용산 쪽으로 뻗은 다리는 아치형 구조물이 없다. 그래서 낙서를 구경하는 재미는 없다. 가다 보니 커다란 표지판 하나가 다리 난간에 붙어 있다. 한강 교량 보행환경 개선공사 현장이라는 안내판이다. 12월 31일까지 한단다. 광진교도 보행환경 개선공사 중이더니, 한강대교도 마찬가지다.
보행환경 개선공사가 끝나면 어떻게 달라지는 건지 궁금하다. 이런 공사를 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는 건가? 하루에 몇 명이나 걸어서 건너기에 이런 공사를 하는 걸까?
다리를 다 건넜다. 다시 건너와야 하는데 그 길을 도로 걸어오는 건 재미없지 않나. 해서 건너편으로 건너가려고 하는 데 길이 없다. 목숨을 걸고 무단횡단을 할 수는 없는 노릇. 하는 수 없이 용산 쪽으로 길을 따라 내려가 버스정류장의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넜다.
다시 한강대교다. 보행환경 공사 한다는 표지판은 건너편에서 봤는데 공사는 이쪽에서 하고 있다. 한강시민공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공사 중이라면서 출입을 막고 있었고, 십여 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 공원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곳 공사가 끝나면 이 계단으로 한강시민공원에 들어가 봐야겠다.
한강대교는 보행환경 공사 중
▲ 공사중인 한강대교 ⓒ 유혜준
이 길은 공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자재가 놓여 있어서 신경이 쓰이게 했다. 자재들이 길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가 오면 비켜줘야 하는데 자재를 피해서 잘 비켜줘야지 잘못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이쪽 구조물에도 낙서는 이어진다.
다리 끝에는 연혁을 돋을새김 한 청동판이 붙어 있었다. 예리한 것으로 흠집을 낸 흔적이 많다. 그냥 보기만 하지 굳이 손을 댈 건 뭐람. 그래도 세월의 흔적은 묻어난다. 이 동판을 만들어 붙인 게 1984년인가 보다. 마지막에 1984년 6월 30일 완공이라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걸 보니.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길이 있는데 다리도 그 길 중의 하나다. 걸어서 건널 수 있으니까. 심심하신가? 그렇다면 한번쯤 집 근처에 있는 한강 다리를 건너보는 건 어떤지? 색다른 맛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한강변을 걷는 것보다는 보행환경이 안 좋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 한강대교의 연혁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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