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절터가 잿빛 콘크리트에 깔린다면?
[남한강 기행 2] 호젓한 청룡사터에서 섬강가 흥법사터까지
▲ 청룡사터 전경경사진 터에 정혜원융비와 부도, 사자석등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절터가 숲에 푹 담겨 있어 아늑하기 그지없습니다. ⓒ 서부원
고산준령을 굽이쳐 흐르는 강원도 어느 두메의 ‘냇물’이 아니라면, 더 이상 나름대로의 특별한 멋을 뽐내는 강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강폭과 위치만 다를 뿐, 강의 모양도 흐름도 심지어 주변 경관도 비슷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 정혜원융탑청룡사터의 상징으로 국보 제19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돌을 떡 주무르듯한 선조들의 기술과 공력이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 서부원
남한강을 따라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한 충주 청룡사터도 그런 곳들 중 하나입니다. 강에서 약간 비껴나 있을 뿐 아니라, 짙푸른 숲이 절터를 터널처럼 품고 있어 퍽 아늑한 곳입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렇듯 때 묻지 않은 곳이 남아있음이 외려 낯설 정도입니다.
▲ 사자 석등어린이 장난감 블록처럼 앙증맞은 청룡사터의 또 하나의 보배입니다. ⓒ 서부원
청룡사터를 한 번쯤 가본 사람이라면 모두 공감할, 그것은 바로 절터에 이르는 호젓한 산길입니다. 호젓하다는 것. 안온하다, 고즈넉하다처럼 ‘말’로 설명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단어이지만, 채 10분 거리도 안 되는 그 길을 천천히 걸어 오르다 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 청룡사터 오르는 호젓한 산길길이 숲에 덮여 흙빛마저도 초록으로 변해버렸습니다. 하루종일 오르내려도 지루하지 않을 것 같은 정감어린 길입니다. ⓒ 서부원
절터를 감싸고 도는 호젓한 분위기에 취해 한참을 머물다 내려오니, 다시 남한강의 익숙한 풍광과 마주합니다. 마치 평화로운 피안을 경험하고 꿈에서 깨어 현실로 내려온 듯한 느낌입니다.
▲ 흥법사터 전경두 가지 석물만 없다면 이곳이 절터라는 사실을 전혀 알 길 없습니다. 이미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돼버린 까닭입니다. ⓒ 서부원
굴착기의 굉음에 강물 흐르는 소리가 묻히고, 교각과 상판의 콘크리트로 인해 푸른 강물이 잿빛으로 보입니다. 절터를 벗어난 지 불과 십여 분 만에 청룡사터의 호젓한 느낌은 씻은 듯 지워지고 없었습니다. 대운하가 아니어도 지금 남한강이 떠안고 있는 ‘스트레스’는 결코 적지 않아 보였습니다.
▲ 짝 잃은 진공대사탑비일제강점기 반출되어 돌아온 비 몸돌도, 옆 짝꿍이었을 염거화상탑도 모두 서울에 빼앗긴 가엾은 유물입니다. 신들린 듯 화려한 조각이 더욱 슬퍼보이는 이유입니다. ⓒ 서부원
발아래 섬강을 두고 따스한 햇볕이 드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해도, 이미 주민들의 ‘생활터전’이 돼버린 까닭에 여느 폐사지에서의 분위기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곳곳이 상처투성이인 석탑(보물 제464호) 한 기와 몸돌을 잃은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가 남남처럼 멀찍이 떨어져 서있을 뿐 주변은 온통 비닐하우스와 밭입니다.
▲ 김제남 신도비흥법사터 오르는 길목에 큼지막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광해군 집권 당시 자신의 딸인 인목대비가 폐출되면서 사사된 김제남의 신도비입니다. '흰 눈물' 줄줄 쏟아내는 것도 그렇고, 비석을 향해 고개를 돌려 불쌍하다는 듯 시선을 보내는 거북 돌머리도 인상적입니다. ⓒ 서부원
일제강점기 이곳에 있던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이 서울로 옮겨지고, 진공대사탑(보물 제365호)과 탑비의 몸돌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절터는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일본으로부터 다시 되찾아오긴 했으나,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살기 좋은’ 서울에 남겨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절터 자체가 이미 대부분 깎이고 헐렸을 뿐만 아니라, 듣자니까 석물들이 놓인 공간을 제외한 상당 부분이 사유지라고 하니 본모습을 되찾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그토록 힘겹게 생명을 이어온 이곳이 어쩌면 대운하 공사의 첫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마 남한강의 본류가 아닌 지류에까지 콘크리트로 도배할까 싶다가도, 내륙 물류기지다, 관광지다 해서 마구잡이 공사가 시작될 양이면 강과 바로 인접한 곳이 무사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입니다. 더욱이 절터의 상당 부분이 사유지인 이곳임에랴.
그리 된다면 흥법사터는 또 한 번의 폐사를 맞게 되는 셈이고, 사진 한 장, 글 한 줄의 기억으로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절다운 호젓함이 남은 청룡사터와는 달리 더 이상 망가질 게 없는 폐사지의 숨통을 아예 끊는 일이 될 것입니다.
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대운하를 건설한다지만, ‘친환경적’이라는 그럴싸한 명분도 따지고 보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자연환경 중에서 가장 약하고 모자란 부분이 사라지지 않도록 먼저 배려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과 성장의 이름으로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칼날이 맨 먼저 겨눌 곳은, 다름 아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버려진’ 것들이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섬강가 흥법사터에 더 정이 가고 애틋해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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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