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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를 가로지르는 5000km의 모험!

[서평] 쥘 베른의 <황제의 밀사>

등록|2008.05.30 09:25 수정|2008.05.30 11:07

<황제의 밀사>쥘 베른의 1876년 작품 ⓒ 열림원

몇 년 전 여름 수개월 동안 중앙아시아 지역을 배낭여행한 적이 있다. 그때 러시아의 이르쿠츠크 주변을 보름 가량 여행했었다.

모스크바에서 5000km, 블라디보스토크에서 40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르쿠츠크는 동시베리아의 중심도시라고 할 만한 곳이다. 인구도 많고 동양과 서양이 적절히 뒤섞인 풍의 건물들도 매력적인 곳이다.

하지만 여행자들이 이르쿠츠크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그 주위에 길이 900km의 장대한 호수 바이칼이 있기 때문이다. 이르쿠츠크에 가는 여행자들은 거의 백발백중 바이칼 호수를 보러 가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담수호', '샤먼의 고향', '한민족의 시원',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는 곳' 등 바이칼은 그 엄청난 크기와 웅장한 풍경에 걸맞게 수많은 수식어를 앞에 달고 있는 호수다.

이르쿠츠크의 또 다른 매력은 이 도시가 19세기 초반, 제정 러시아시절 정치범들의 유형지였다는 점이다. 이르쿠츠크에 있는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에 가면, 당시 이곳에서 유형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1825년 12월에 혁명을 꿈꾸었던 러시아 장교들의 일부가 이르쿠츠크로 유배되었고, 그 장교들의 부인도 함께 그들을 따라서 이 도시로 왔다.

19세기 초반의 시베리아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형에 처해진 장교들과 그 가족들은 별다른 편의시설이나 교통수단도 제공받지 못한 채, 모스크바에서부터 이르쿠츠크까지 50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당연히 이동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도 죄수 신분으로 풍요롭지 못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프랑스 작가 쥘 베른(Jules Verne)의 소설 <황제의 밀사>를 읽다보면 당시 시베리아의 황량한 풍경이 떠오른다. <황제의 밀사>의 주인공 미하일 스트로고프(Michel Strogoff)도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여행을 한다. 하지만 그는 죄를 짓고 떠나는 유배자가 아니라, 황제의 밀명을 가지고 길을 가는 특사다.

특사라고 해서 특별히 사정이 좋을 것도 없다. 비밀임무를 띠고 가는 길이기 때문에, 자신의 신분을 밝힐 수도 없고 자신의 임무에 대해서 말할 수도 없다. 혼자 모스크바를 떠나는 그 순간부터, 미하일은 상인의 신분으로 위장하고 이름도 가명을 써야 한다. 황제의 전령에게 주어지는 온갖 특권과 특별운송수단도 사용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죄를 짓고 떠나는 정치범에 비해서 딱히 나을 것도 없는 여행길이다.

비밀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는 황제의 밀사

때는 19세기 중반, 러시아는 모스크바에서 알래스카까지 광활한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 영토가 넓은 만큼 그 안에서 온갖 일들이 일어날 테지만, 황제의 군대와 경찰력은 그 모든 일을 통제할 만큼 숫적으로 많지 못했다. 수도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시베리아라면 그 사정이 더 심각했을 것이다.

이런 틈을 타서 수십 만 명의 타타르족 부대가 러시아의 변경을 습격한다. 이들은 서쪽 시베리아의 중심도시인 톰스크, 옴스크를 공격하고 나아가서는 이르쿠츠크를 목표로 하고 있다. 타타르족이 이르쿠츠크를 점령하면, 러시아는 자신의 영토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동시베리아를 내줘야하는 형국이다. 설상가상으로 전선이 끊겼기 때문에 이르쿠츠크로 이 사실을 담은 전보를 보내지도 못한다.

결국 황제는 밀사인 미하일 스트로고프를 파견하기로 한다. 밀사의 임무는 어찌보면 단순하다. 모스크바를 떠나 혼자 여행하며 이르쿠츠크에 도착해서 봉인된 황제의 서한을 이르쿠츠크 대공에게 건네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시간제한이 있다. 타타르족의 주력부대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하기 전에 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시베리아를 횡단해서 이르쿠츠크까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말이나 마차를 타고 벌판을 질주하지도 못한다. 시베리아의 도처에 이미 타타르족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주위로 누군가가 쏜살같이 말을 타고 달려간다면 타타르족의 관심을 끌 것은 뻔한 일이다.

결국 미하일은 세가지 난제를 안고 출발하는 셈이다. 혼자서 우랄산맥을 넘어서 험하고 황량한 시베리아를 가로질러야 하고, 그 일을 정해진 시간내에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타타르족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

마치 최고 난이도의 롤플레잉게임 퀘스트를 수행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게임이야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하면 되지만, 미하일에게 '다시'라는 것은 없다. 타타르족에게 발각되면 그것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미하일은 이런 난관을 모두 뚫고 자신의 임무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교양과 재미가 어우러진 쥘 베른의 작품 세계

모험소설, 과학소설, 환상소설, 여행소설 등. 쥘 베른의 작품 앞에 붙일 수 있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많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독자들이 가보지 못한 다양한 장소를 보여준다. <해저 2만리>에서는 바닷속 깊은 곳으로, <신비의 섬>에서는 망망대해에 떠있는 외딴 섬으로, <80일간의 세계일주>에서는 전세계로 그리고 <황제의 밀사>에서는 시베리아의 벌판과 산맥으로 안내하고 있다.

쥘 베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황제의 밀사>는 그 무대가 좀더 현실적이다. 그리고 배경이 되는 사건또한 그렇다. 실제로 1870년에 타타르족이 러시아를 침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에 주로 작품활동을 했던 쥘 베른도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배경과 공간이 다소 상이하지만, <황제의 밀사> 역시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작품의 주인공 미하일 스트로고프는 모험소설의 전형적인 인물이다. 나이는 많지도 적지도 않는 서른 살, 강건하고 원기왕성하며 강철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다. 지혜롭고 용감하면서 고결한 정신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황제의 표현처럼 '그 젊은이는 진짜 사나이'다.

이런 주인공이 나아가는 장소는 온통 거친 자연이다. 커다란 곰이 뒹구는 우랄산맥, 빠른 물살이 배를 뒤집는 예니세이강, 뗏목을 타고 가는 바이칼 호수, 얼음으로 뒤덮인 앙가라강 등. 여기에 더해서 주인공이 맞서야하는 사람들도 전부 악당들이다. 제정 러시아에 등을 돌리고 타타르족의 편에 선 러시아 장교를 비롯해서 집시로 위장한 첩자, 야만적인 방법으로 포로를 학대하는 타타르족까지.

소설에 등장하는 타타르족은 지금의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활약하던 투르키스탄의 타타르인들이다. 소설에서 작가가 이들 타타르족을 야만인 취급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주인공 미하일의 여정에 촛점을 맞추어 보는 것은 어떨까.

현대에 와서도 좀처럼 가기 힘든 장소인 시베리아의 벌판과 우랄산맥이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너비가 100km에 달하는 바다같은 바이칼 호수의 모습도 함께 얻을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자연경관과 시베리아 도시들의 지리적 특징을 세밀하게 나열하고 있다. 쥘 베른의 다른 작품들이 그런 것처럼, <황제의 밀사> 역시 교양과 재미가 합쳐진 흥미진진한 작품이다.
덧붙이는 글 <황제의 밀사> 1, 2. 쥘 베른 지음/김석희 옮김. 열림원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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