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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날 미역국 대신 쑥개떡을 먹었습니다

부산 동백섬에서 막내누님 부부와 함께한 생일

등록|2008.06.05 10:44 수정|2008.06.05 10:52

▲ 해송과 동백나무가 우거진 동백섬 산책로에서 막내 누님이 만들어온 '쑥개떡'과 '송편', '찐계란'을 먹으며 잔치집에서도 느낄 수 없는 풍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조종안


지난 2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충청도와 수도권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부산은 시원한 그늘이 그리울 정도로 무더웠지요. 아내는 충남 부여에서, 딸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고 있으니 쓸쓸한 생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년 가까이 밥을 해먹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는데, 생일날 아침에 미역국 먹을 권리도 제가 쥐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놀랐습니다. 미역국을 먹지 못한 것을 저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니까 마음이 편하더군요. 

그래도 평택에 사는 막내 누님과 매형이 오셔서, 큰 누님과 함께 부산이 자랑하는 밀면도 먹고, 만개한 산철쭉이 웃음을 머금고 있은 산책로를 따라 2005 AEPC 정상회의가 열렸던 해운대 '누리마루 하우스'도 관람했습니다. 또 희미하게 보이는 오륙도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동백섬에서 '쑥개떡 잔치'도 벌이면서 즐겁고 의미 있는 생일을 보냈습니다. 

▲ 동백섬 길가에 만개한 산철쭉이 웃음을 머금고 찾는 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해주고 있었습니다. ⓒ 조종안


▲ 누리 마루 왼편으로 울창한 동백숲을 끼고 나있는 동백섬 산책로. 조깅 코스로도 인기가 좋다고 하더군요. ⓒ 조종안


즐거운 마음으로 생일날 아침을 거르다

열흘쯤 되었을까요. 평택에 사는 막내 누님이 제 생일에 맞춰 큰 누님 면회를 오겠다는 전화를 걸어와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큰 누님이 입원해 있는 병원에 전화를 걸어 외출 신청을 해놓고 날짜를 꼽기 시작했지요.

만날 날을 손꼽으며 가슴을 설레게 했던 막내 누님 전화는, 굴욕적인 쇠고기 협상으로 1개월 가까이 이어지는 촛불문화제와 시위현장의 안타까운 소식으로 우울해져 있던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비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예약해 놓고 며칠 동안 꿈에 부풀어 있듯, 반가운 소식은 되도록 일찍 주고받는 것이 정신 건강에도 좋고, 활기찬 생활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일날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면서 생각해 보니 아침을 건너뛰는 게 좋겠더라고요. 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을 걸렀습니다. 도착 시각이 오전 11시30분이니 점심을 맛있게 먹으려면 조금은 배가 고픈 것이 좋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제가 맛있게 먹으면 모두가 기뻐할 것이니까요.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집에서 구포 역까지는 도깨비 걸음으로 30분, 양반 걸음으로는 40분 정도 걸리는데 특별히 바쁘지 않으면 걸어서 다닙니다. 오가며 사람 구경을 하는 재미도 쏠쏠하거든요.

회색빛 물안개가 오르는 강변로를 걸으며 만남의 소중함을 재차 느꼈습니다. 카페나 공원 등 만나는 장소를 무시할 수 없겠지요. 특히 정서가 메말라가는 요즘, 손님을 마중 나가 반갑게 조우하는 것도 사랑을 확인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 같더라고요.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웠던 막내 누님 마중

구포역에 도착하니 10분쯤 남았더군요. 대기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기차가 5분만 연착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누님 넷 중에서 네 살 위인 막내 누님과 살았던 시간이 가장 길었고 그만큼 정도 깊게 들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69년 겨울에 결혼했는데 식장에서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니까요. 살림꾼인 막내 누님과는 코흘리개 시절 교회 주일학교에 함께 다녔고, 학창 시절에는 용돈도 쏠쏠하게 받았으며, 지금도 안부를 묻는 동창들이 있을 정도로 집에 놀러 오는 친구들에게도 잘 해주었습니다.

막내 누님을 짝사랑했다고 고백하는 동창도 있고, 호박과 꼬막이 들어간 칼국수와 김치찌개 맛이 그만이었다는 친구, 문주란·배호의 극장 쇼 공연을 막내 누님이 시켜 줬다며 추억을 떠올리는 친구도 있습니다. 

조금 있으니 기차가 역 구내로 밀려들어 왔고, 구름처럼 밀려나오는 사람들 속에서 막내 누님과 매형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누님! 여기요! 여기!!”하는 소리가 나오더군요. 40년 넘게 교직에 있다가 정년퇴직한 매형과는 가볍게 포옹을 했는데, "오늘이 생일이라고 들었는데 축하해요"라고 생일을 축하하며 혼자서 지내느라 외롭고 고생이 많겠다며 안부를 묻기도 했습니다. 

큰누님 면회와 점심

병원으로 가는 중에 막내 누님과 매형의 충격을 예방하려고 "큰 누님이 두 분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라고 했습니다. 두 분은 예상하고 왔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더라고요. 

병원에는 12시 40분쯤 도착했습니다. 병원에 들어서면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그윽한 커피 향이 호텔의 커피숍을 떠올리기 때문에 면회를 갈 때마다 부담이 덜해서 좋습니다. 막내 누님과 매형도 병원 분위기에 놀라는 눈치더군요. 원장 선생님에게 인사하고 3층 입원실로 올라갔습니다. 그동안 얼굴이 익은 담당 간호사와 직원들이 친절하게 대해주더군요. 지난달에 왔을 때와 달리 다른 환자들과의 트러블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고, 간병인 출신 여성 환자가 잘 돌봐주고 있다는 간호사 설명에 안심되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큰 누님은 막내 누님을 몰라봤습니다. 심심할 때면 평택 막내 누님 집에서 한두 달씩 지내고 왔으면서도 몰라보다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매형을 보더니 "아니! 이게 소정이 아빠 아녀!"라며 반가워하면서도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횡설수설하더라고요. 그러니 애틋했던 추억들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큰 누님 손을 꼭 잡으며 '나를 몰라보겠어?, 아냐, 몰라봐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막내 누님 표정에서 또 다른 형제애를 느꼈으며 슬픔을 억누르려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크고 작은 병고에 시달리게 되는데 자아를 상실한 환자가 가장 불쌍하다는 것을 또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시계는 1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걸렀더니 배도 고프고, 막내 누님이 저녁 6시40분 기차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오래 머무를 수가 없겠더라고요. 해서 외출 절차를 마치고 병원을 나왔습니다.

큰 누님은 식당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혼잣말을 반복했던 전과 달리 조용하기에 말 좀 하라고 했더니, 찾아온 사람들에게 해줄 게 없어서 미안한데 무슨 말을 하느냐고 되묻더군요. 전과 달라진 모습을 간호사에게 전했으니 좋은 현상인지는 다음에 알 수 있겠지요. 날도 덥고 큰 누님이 매운 음식을 싫어하기 때문에 국물이 시원한 밀면 전문식당에 갔습니다. 면발이 쫄깃쫄깃한 밀면은 냉면과 또 다른 맛을 내면서 부산의 대표 음식 중의 하나이기도 하지요.

▲ 육수가 깔끔하고 냉면과 또 다른 맛을 내면서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 밀면. 냉면처럼 비빔면과 물면이 있습니다. ⓒ 조종안


동백섬에서 벌인 '쑥개떡 잔치'  

밀면을 맛있게 먹고 나와 해운대 가는 지하철을 타고 동백 역에서 내렸습니다. 동백 역에서 해변도로를 따라 걷다 보면 해송이 울창한 동백섬과 남해의 장관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누리 마루 하우스도 관람할 수 있거든요.

왼편으로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가 펼쳐지고 오른편으로는 해송과 동백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는 맑고 시원한 공기에 운치가 있어 좋았습니다. 

누리 마루 하우스를 관람하고 나오니까 울창한 숲이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산뜻하게 단장된 산책로를 걷는데 바람이 잘 통하고 공중습도가 높은 곳에서 자생하며 7월에 순백색의 꽃이 핀다는 풍란이 눈길을 끌더군요. 해송에 이식해놓은 것을 보며 자연보존의 중요성과 함께 풍란 특유의 달콤한 향이 풍기는 듯했습니다.

▲ 그윽한 소나무향과 맑은 공기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해주는 동백섬 숲. 누리 마루 하우스 앞 전경입니다 ⓒ 조종안


▲ 높은 바위나 나무 위에서 그윽한 향을 풍기며 살아간다고 해서 선초(仙草)라고도 물리는 풍란은 시인묵객들이 처마에 메달아 놓고 풍류를 즐겼다고 합니다. ⓒ 조종안


산책로를 따라 내려오는데 매형이 숲 속 샛길로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넷이서 둘러앉아 집에서 만들어온 쑥개떡과 계란을 펼쳐놓고 먹으며 쉴 장소를 찾으러 갔던 모양이었습니다. 한적한 곳에 둘러앉으니까 주말이나 여름 휴가 때 가족나들이를 다니던 옛날이 떠오르더군요. 제 생일에 주려고 막내 누님과 매형이 손수 캔 쑥으로 쑥개떡과 밤콩을 넣은 송편을 만들고 계란도 쪄왔다고 해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니까 막내 누님은 "네 생일에 동백섬에서 '쑥개떡 잔치'를 벌이는 것도 훗날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며 만족해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큰 누님이 "어!! 오늘이 니 생일이라고? 그르믄 나도 축하혀야지"라며 웃더니 저를 바라보며 "생일 축하혀~"라고 하더군요. 큰누님에게 축하를 받으니까 기분이 더 좋았습니다.

▲ 그윽한 소나무 향과 함께 먹는 쑥개떡 맛은 별미였습니다. 몇 개 남지 않았을 때 '개떡이다!'라며 반가워하던 여학생에게 나눠주지 못한 게 못내 아쉽네요. ⓒ 조종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지나가던 여학생이 반가운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야! 개떡이다!"라며 소리를 지르더라고요. 먹고 싶었던 모양인데, 남은 게 없어 나눠주지는 못하고 웃으며 눈인사만 했습니다.    

작년 봄 유방암 수술로 고생했던 막내누님도 이제는 자원봉사를 다닐 정도로 몸이 좋아졌다고 합니다. 큰누님과 막내누님이 그동안 겪은 시련과 아픔들을 숲이 울창한 동백섬과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바다에 날려버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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