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권자로서 살아가기 이처럼 어려운 시대가 있을까
[시 더듬더듬 읽기 100]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
시의 시대는 결코 멀리 간 게 아니다
어제 오후, 우편함을 열다가 그 속에 책 한 권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시> 6월호였다. 이 시 전문지 발행인이신 홍해리 시인의 배려로 벌써 일 년 가까이 이 책을 받아보고 있다. 좋은 책을 받아서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고를 끼쳐 송구스럽기도 하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분명히 탈(脫)서정(抒情)의 시대다. 어디에도 뿌리박을 수 없는 유목민들, 천지 간에 나 홀로 정처 없이 떠도는 듯한 고아 의식. 사람들은 눈만 뜨면 쪼르르 전자사막으로 달려가서 그 외로움을 메우려 하지만, 밑바닥까지 바짝 말라버린 가슴의 정서를 쉬 적시지는 못한다.
그런데 탈 서정의 시대 꼭두머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잃어버린 서정의 시대 그 첫 머리에는 시(詩)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시가 죽었다"고 얘기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누가, 어떤 얼빠진 사람이 요즘 같이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한가하게 시 나부랭이나 읽고 앉아 있겠느냐?"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어리석은 독자는 시가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의 메마른 정서가 먼저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끝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시를 쓰는 시인 역시 자신이 시 같지 않은 시를 써서 시를 죽인 것을 모르고 "내가 사랑하던 시가 죽었노라"고 한탄하기 바쁘다. 시의 죽음의 원인을 살펴보면 거기엔 독자와 시인이 똑같이 짊어져야 할 쌍방과실이 존재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얼치기 독자긴 하지만, 아직도 시를 즐겨 읽는 난 시가 죽었다는 사실을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다. 단지 피곤한 나머지 잠시 깊은 잠에 들었을 뿐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임보·홍해리 시인 등 여러분이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달마다 시 전문지인 <우리시>를 내는 것도 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시> 6월호에도 여러 시인의 많은 시가 실려 있다. 그중에서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이생진 시인의 시를 영역한 'Windows Facing the Sea(바다를 향한 창문)'과 중국시 '흑야적헌시(黑夜的獻詩. 海子 작)', 그리고 신작 소시집이라는 아이템으로 한데 묶어놓은 복효근 시인의 시 6편이었다. 복효근 시인은 월간 <우리시> 편집위원 가운데 한 분이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너무 없다
그의 시들 가운데 특히 흥미로웠던 시는 ''꾀꼬리에게 한 표'라는 시였다. 어제가 마침 전국 52개 지역에서 동시 실시되는 재보선 선거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한미 쇠고기 협상으로 후끈 달아오른 민심이 실제 선거판에선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했다. 만약 내가 사는 지역에서 재보선 선거가 있었다면 누구를, 아니 어느 당 후보를 찍었을까.
마을에선 선거유세방송이 한창이다
농협 앞에서 한 팀
읍사무소 앞에서 한 팀
버스 정류장에서 한 팀
서로 엉켜서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낙원을 만들겠다고
아수라장을 이루어 놓았다
학교 언덕 숲에는 꾀꼬리 한 쌍 둥지를 틀고
암수 서로 정답게* 알을 품고 있다
한 마리가 알을 품으면
한 마리 먹이를 물고와 둥지 가까이서 지키고 앉았다
내가 다가가니 한 차례 우짖는데
우짖는 소리마저 꾀꼬리소리다
그 소리에
지리산 노고단이 어둠 털고 일어나고
먼 데 하동까지
섬진강도 꿈틀대며 젖이 부풀겠다
옳다 이번 선거엔
저 꾀꼬리에 한 표다
*자웅상의雌雄相依 - 「황조가」에서 인용
_ 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 ─ 운봉일기·9' 전문
복효근 시인은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 어느 대나무의 고백> <새에 대한 반성문> 등을 상자한 바 있는 중견 시인이다. 또한, 그는 전북 남원 운봉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다.
어느 땐지 알 수 없지만, 시는 선거를 앞둔 마을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선거유세방송이 '아수라장'을 이룬 한 켠에선 꾀꼬리들이 정답게 알을 품고 있다. 두 개의 상이한 풍경이 대비를 이룬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 얼마나 평화로운 마을인가를 강조하고자 "아수라장을 이루어 놓은" 선거유세방송을 일부러 끌어들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시만이 죽은 시대가 아니다. 우리네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정치마저 죽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이른바 탈정치시대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죽은 정치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적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이 열기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쇠고기 협상'이 불러온 것이다.
'탈정치'하더리도 아무 이상 없으면 좋은 정치
나는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내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는 고대중국 요 임금에 관한 일화다. 요순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태평했던 시대였다. 요 임금은 자신이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변장을 한 채 민정을 살피러 나간다. 그는 먼저 아이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듣는다. 어찌 마음이 흐뭇하지 않았겠는가.
그 다음으로 들은 노래는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면서 부르는 노인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라는 내용을 가진 노래였다. 요 임금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고 "임금의 존재도 의식하지 않은 채 백성이 저렇게 태평하게 살고 있으니 이는 내가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면서 궁으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라. 정치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가를. 요 임금의 경우처럼 좋은 정치는 필연적으로 탈정치를 낳게 된다. 아니, 좋은 정치란 요 임금 시대처럼 '탈정치' 상태여야 한다. 다스리는 자를 의식할 필요 없고 정치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둘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의 직분만 충실히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탈정치야말로 가장 유토피아적인 상태가 아닐는지.
그런데 문제는 나쁜 정치도 탈정치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 경우엔 환멸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환멸을 가슴에 품은 채 무관심한 척 살다가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겠다' 싶으면 대중은 마침내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려고 떨쳐나선다. 그렇게 해서 정치의 '정' 자만 꺼내도 진저리를 치던 사람들이 다시 정치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계속 탈정치 상태로 자신을 놔두기엔 이 나라가 너무 '디스토피아(dystopia)' 적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가 잘 굴러가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누군들 때로는 사람 아닌 "꾀꼬리에 한 표"를 던지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을 꾹꾹 누른 채 법정 등록한 후보를 찍을 뿐인 것을…. 꾀꼬리 우는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세상이 되려면 내 한 표만이라도 제대로 행사해야 하지 않겠는가(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내가 찍었던 표들은 모조리 사표가 되고 말았지만).
잘못된 정치가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을 정리해야 하는 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이번 '쇠고기 협상' 때문에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깨닫았을 것이다. 탈정치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를.
꾀꼬리에 한 표를 던져도 아무런 이상 없이 정치가 돌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언제쯤이나 그 멀고 먼 땅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는 그런 미래를 노래하는 시인지도 모른다.
불가능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만이 가진 전매특허이다. 나도 언젠가는 꾀꼬리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어제 오후, 우편함을 열다가 그 속에 책 한 권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시> 6월호였다. 이 시 전문지 발행인이신 홍해리 시인의 배려로 벌써 일 년 가까이 이 책을 받아보고 있다. 좋은 책을 받아서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수고를 끼쳐 송구스럽기도 하다.
그런데 탈 서정의 시대 꼭두머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쩌면 잃어버린 서정의 시대 그 첫 머리에는 시(詩)가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시가 죽었다"고 얘기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누가, 어떤 얼빠진 사람이 요즘 같이 속도가 지배하는 시대에 한가하게 시 나부랭이나 읽고 앉아 있겠느냐?"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어리석은 독자는 시가 죽기 전에 이미 자신의 메마른 정서가 먼저 사망 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끝끝내 알아채지 못한다. 시를 쓰는 시인 역시 자신이 시 같지 않은 시를 써서 시를 죽인 것을 모르고 "내가 사랑하던 시가 죽었노라"고 한탄하기 바쁘다. 시의 죽음의 원인을 살펴보면 거기엔 독자와 시인이 똑같이 짊어져야 할 쌍방과실이 존재한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얼치기 독자긴 하지만, 아직도 시를 즐겨 읽는 난 시가 죽었다는 사실을 선뜻 인정하고 싶지 않다. 단지 피곤한 나머지 잠시 깊은 잠에 들었을 뿐이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임보·홍해리 시인 등 여러분이 갖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달마다 시 전문지인 <우리시>를 내는 것도 시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우리시> 6월호에도 여러 시인의 많은 시가 실려 있다. 그중에서 유독 내 눈길을 끈 것은 이생진 시인의 시를 영역한 'Windows Facing the Sea(바다를 향한 창문)'과 중국시 '흑야적헌시(黑夜的獻詩. 海子 작)', 그리고 신작 소시집이라는 아이템으로 한데 묶어놓은 복효근 시인의 시 6편이었다. 복효근 시인은 월간 <우리시> 편집위원 가운데 한 분이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너무 없다
그의 시들 가운데 특히 흥미로웠던 시는 ''꾀꼬리에게 한 표'라는 시였다. 어제가 마침 전국 52개 지역에서 동시 실시되는 재보선 선거일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한미 쇠고기 협상으로 후끈 달아오른 민심이 실제 선거판에선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했다. 만약 내가 사는 지역에서 재보선 선거가 있었다면 누구를, 아니 어느 당 후보를 찍었을까.
▲ <우리시> 표지. ⓒ 도서출판 우리글
농협 앞에서 한 팀
읍사무소 앞에서 한 팀
버스 정류장에서 한 팀
서로 엉켜서 잘 들리지도 않는다
낙원을 만들겠다고
아수라장을 이루어 놓았다
학교 언덕 숲에는 꾀꼬리 한 쌍 둥지를 틀고
암수 서로 정답게* 알을 품고 있다
한 마리가 알을 품으면
한 마리 먹이를 물고와 둥지 가까이서 지키고 앉았다
내가 다가가니 한 차례 우짖는데
우짖는 소리마저 꾀꼬리소리다
그 소리에
지리산 노고단이 어둠 털고 일어나고
먼 데 하동까지
섬진강도 꿈틀대며 젖이 부풀겠다
옳다 이번 선거엔
저 꾀꼬리에 한 표다
*자웅상의雌雄相依 - 「황조가」에서 인용
_ 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 ─ 운봉일기·9' 전문
복효근 시인은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목련꽃 브라자> < 어느 대나무의 고백> <새에 대한 반성문> 등을 상자한 바 있는 중견 시인이다. 또한, 그는 전북 남원 운봉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하다.
어느 땐지 알 수 없지만, 시는 선거를 앞둔 마을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선거유세방송이 '아수라장'을 이룬 한 켠에선 꾀꼬리들이 정답게 알을 품고 있다. 두 개의 상이한 풍경이 대비를 이룬다. 아마도 시인은 자신이 사는 마을이 얼마나 평화로운 마을인가를 강조하고자 "아수라장을 이루어 놓은" 선거유세방송을 일부러 끌어들였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시만이 죽은 시대가 아니다. 우리네 삶의 조건을 결정짓는 정치마저 죽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이른바 탈정치시대다. 그러나 지난 한 달 동안 우리는 죽은 정치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기적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이 열기는 이명박 정부의 잘못된 '쇠고기 협상'이 불러온 것이다.
'탈정치'하더리도 아무 이상 없으면 좋은 정치
나는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런 내가 가장 이상적인 정치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는 고대중국 요 임금에 관한 일화다. 요순 시대는 중국 역사상 가장 태평했던 시대였다. 요 임금은 자신이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변장을 한 채 민정을 살피러 나간다. 그는 먼저 아이들이 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듣는다. 어찌 마음이 흐뭇하지 않았겠는가.
그 다음으로 들은 노래는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면서 부르는 노인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라는 내용을 가진 노래였다. 요 임금은 그제야 안심했다. 그리고 "임금의 존재도 의식하지 않은 채 백성이 저렇게 태평하게 살고 있으니 이는 내가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면서 궁으로 돌아왔다.
생각해 보라. 정치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가를. 요 임금의 경우처럼 좋은 정치는 필연적으로 탈정치를 낳게 된다. 아니, 좋은 정치란 요 임금 시대처럼 '탈정치' 상태여야 한다. 다스리는 자를 의식할 필요 없고 정치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둘 필요도 없다. 그저 자신의 직분만 충실히 하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탈정치야말로 가장 유토피아적인 상태가 아닐는지.
그런데 문제는 나쁜 정치도 탈정치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 경우엔 환멸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환멸을 가슴에 품은 채 무관심한 척 살다가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겠다' 싶으면 대중은 마침내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려고 떨쳐나선다. 그렇게 해서 정치의 '정' 자만 꺼내도 진저리를 치던 사람들이 다시 정치의 현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계속 탈정치 상태로 자신을 놔두기엔 이 나라가 너무 '디스토피아(dystopia)' 적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는 나무랄 데 없이 아름다운 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치가 잘 굴러가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누군들 때로는 사람 아닌 "꾀꼬리에 한 표"를 던지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 마음을 꾹꾹 누른 채 법정 등록한 후보를 찍을 뿐인 것을…. 꾀꼬리 우는소리가 아름답게 들리는 세상이 되려면 내 한 표만이라도 제대로 행사해야 하지 않겠는가(지난 몇 차례 선거에서 내가 찍었던 표들은 모조리 사표가 되고 말았지만).
잘못된 정치가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을 정리해야 하는 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의 책임이다. 이번 '쇠고기 협상' 때문에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깨닫았을 것이다. 탈정치의 결과가 얼마나 참담한 것인지를.
꾀꼬리에 한 표를 던져도 아무런 이상 없이 정치가 돌아가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 정치는 언제쯤이나 그 멀고 먼 땅에 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고 보면 복효근 시 '꾀꼬리에게 한 표'는 그런 미래를 노래하는 시인지도 모른다.
불가능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을 노래하는 것은 시인만이 가진 전매특허이다. 나도 언젠가는 꾀꼬리에 기꺼이 한 표를 던지고 싶다.
덧붙이는 글
카페 우리시회(http://cafe.daum.net/urisi)와 블로그 우리시회(http://blog.naver.com/urisi21)를 방문하시면 아름다운 시와 우이시 동인들이 여는 우이시낭송회 등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