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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다

[역사소설 소현세자 57] 청나라 사신만 오면 작아지는 조선

등록|2008.06.06 16:00 수정|2008.06.06 16:00

남문거리. 세자관이 있던 심양 남문거리다. ⓒ 이정근



병세를 알아보기 위한 문질 사신이 떠날 것이라는 청나라 예부의 통보를 받은 소현은 급히 본국으로 파발을 띄우라 명했다. 급주마가 한성을 향하여 떠났으나 소현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부왕의 환우도 걱정이려니와 세자책봉식을 독촉하는 청나라의 속셈이 무엇인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세자책봉은 어제 오늘 나온 얘기가 아니지만 부왕의 환우와 겹쳐 부쩍 서두르는 것은 뭔가 저의가 있을 것이다. 청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도 가당치 않는데 그렇다면 부왕을 폐하고 나를?"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소현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여기에서 세자책봉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등극한다면 조선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나는 조선의 왕세자로 조선에 돌아가야 한다."

새벽 3시에 기침한 소현세자가 마음을 다잡고 창문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세자저하! 떠날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빈객 박노가 고했다. 오늘은 며칠 전에 초청을 받은 황가(皇家)의 결혼식 날이다. 그것도 별 볼일 없는 황족의 혼인이 아니라 청나라의 2인자 도르곤의 결혼식 날이다. 조선을 떠나올 때 같이 동행했고 심양에 도착한 이후에도 소현에게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던 도르곤이 새장가 드는 날이다.

명나라와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청나라는 금주에 출전했던 차흘라(車屹羅)가 명나라 군에 패해 많은 군사를 잃고 돌아오자 홍타이지는 그의 관직을 빼앗고 추방했지만 그의 고명딸을 불쌍히 여겨 기르고 있었다. 도르곤은 본처가 있었으나 아이가 없었다. 후손이 없는 본처를 내 쫓으라 명한 홍타이지는 자신이 기르고 있던 차흘라의 딸과 결혼하도록 했다.

연회장.심양 황궁에 있는 연회장. 이곳에서 황실 연회가 베풀어졌다. ⓒ 이정근



소현이 세자관을 출발했다. 빈객 박노와 무재 박종일은 물론 익위사 관원들이 호종했다. 안장을 갖추고 갑옷을 입힌 말 10마리도 끌고 갔다. 예물이다. 황궁에서 거행된 결혼식은 전쟁 중이라 검소했다. 식이 끝나고 여흥이 시작되었다. 만주족과 몽고족에 이어 조선족 여인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 춤을 추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궁중 무희들이었다.

소현은 조선족 무희들이 춤추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괴로웠다. 그들의 춤사위가 접혀지고 꺾어지며 허공을 가를 때 그 팔놀림이 비수와 같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세자저하! 우리를 구해주소서."

무희들의 몸놀림이 그렇게 절규하는 것만 같았다. 무희가 곡선의 절재를 유지하며 뒤꿈치를 들었다 끌어당길 때에는 온 몸이 조여 오는 것 같았고 종종걸음으로 잘게 걷는 듯하다가 멈춘 듯 붙이며 밀어당길 때에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저하님! 이 발이 조선 땅을 걷고 싶어요."

무희들의 발이 그렇게 울부짖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소현이 얼굴을 감싸 쥐며 고개를 떨구었을 때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밀어붙이겠다는 피파박시

"세자저하를 여기에서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얼굴을 들어 바라보니 피파박시였다.

"안색이 매우 안 좋으십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면 일찍 돌아가셔도 결례가 아닙니다."
"아 녜, 몸이 좋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소현이 자세를 고쳐 잡았고 피파박시가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소관이 한 잔 올리겠습니다."

소현의 잔에 술을 채운 박시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술잔을 받고 마시는 않는 것은 청나라의 주법이 아니다. 그것도 단숨에 마셔야 한다. 소현이 술잔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이 타는 듯하다. 피파가 따라준 술은 60도가 넘는 독주였다.

"사신이 나간다는 말씀은 들으셨지요?"
"네."

"사신만 나갈게 아니라 세자저하께서도 조선에 나가셔야지?"
피파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선 세자책봉식을 마치십시오. 그 다음은 소관이 밀어붙이겠습니다."

"밀어붙이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소관이 처갓집 나라 가보고 싶어서라도 서둘러야겠습니다."
피파가 호탕하게 웃었다. 잔치를 끝내고 세자관으로 돌아온 소현은 피파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피파는 황제가 신임하는 실력자다. 그는 청나라 사람이지만 그가 총애하는 여자는 조선 사람이다. 회은군 딸 이씨가 베갯머리송사를 일으킬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장부일언은 중천금이라 하는데 '내가 언제 그런 소리했느냐'고 꽁무니를 빼지 않겠지. 나의 현재 목표는 조선에 나가는 것이다. 믿어보자."

금천교. 창덕궁 금천교. 궁궐에 드나들던 대소신료가 건너던 다리다. ⓒ 이정근



청나라 문질 사신이 떠난다는 장계를 가지고 온 전령은 ‘승정원에서만 열어볼 것’ 이라는 비밀 장계도 한통 가지고 왔다. 장계를 접수한 조정은 긴급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문질 사신의 행차가 비록 칙사와 다르나 황제의 명을 받들고 오는 것이니 각별히 예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 1명과 승지가 벽제에 나가 맞이하고 또 대신 1명이 교외에 나가 맞이하게 하는 한편, 연회도 칙사의 예에 따라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비국이 사신 영접 방안을 내놓았다.

"접반사 정태화를 보내 중로에서 사신을 맞게 하라."

"사신이 문안하러 온다고 명분을 삼고 있으나 실제로는 성후가 얼마나 위중한가를 탐색해 보려고 하는 것인 듯 하니 전하께서 나가서 맞으실 수는 없습니다만 침전에서 편복을 입고 대하시더라도 한 번은 만나셔야 하실 듯합니다."

"침을 맞으면서라도 만날 것이다."

"상후가 이토록 불편하신데 동궁이 시약을 못하니 이것이야말로 신민들의 통한입니다. 이번에 오는 사신은 오로지 전하의 문병을 위해 오니 그가 돌아갈 적에 종실 대신 이하 백관들이 모두 교외에 모여서 ‘세자저하를 보내 달라.’고 청하고자 합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칙사와 마찬가지로 사신에게 백금을 지급하고 강화도에서의 공덕을 얘기하면서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명분 삼아 별도로 황금을 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 하도록 하라."

"이번에 역관으로 따라오는 자는 이잉질석이라고 합니다. 그에게도 백금 수백 냥을 줄 것을 청합니다."

"그리 하도록 하라."

청나라 사신만 오면 작아지는 조선이다. 사신이 들어오기도 전에 무엇을 얼마나 바칠 것인가에 골몰하는 조정이다. 전투력을 점검하고 군대를 재정비하여 청나라와 한판 붙어보겠다는 의지는 실종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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