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지나도 또 오를 수 있는 창의문
[문을 지나고 산을 넘는 서울 성곽 종주기 ⑥] 창의문과 그 주변
서울 성곽은 외국인도 좋아한다
서울 성곽의 정상에는 외국인도 올라와 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니 프랑스인임을 알 수 있겠다. 그래 프랑스 파리 출신이 이곳에 오르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이 몽마르트르인데 높이라야 고작 129m 밖에 안 될 뿐더러 북악산처럼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을 테니.
이제 백악마루보다 더 높은 곳이 없으니 창의문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서울 성곽 중 북악산에서 창의문까지가 가장 가파르다. 그것은 높이가 340m 대에서 120m 대로 급격하게 떨어지기도 하지만 홍련사 코스나 와룡공원 코스보다 거리도 짧기 때문이다. 백악마루에서 돌고래 쉼터까지가 1,300m이고 돌고래 쉼터에서 창의문까지가 다시 300m이다.
북악산 정상에 오르는 가장 짧은 길이 창의문 코스인지라 이곳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편이다. 인파 가운데 역시 외국인들이 몇몇 보인다. 이제 외국인들의 관광 욕구가 서울 성곽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단체 관광 프로그램으로 서울 성곽을 넣을 때도 된 것 같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특히 좋아할 것이다. 교토와 도쿄에는 이런 성곽이 없으니.
창의문과 관련된 이야기들
창의문까지 내려오면서 보니 서쪽과 북쪽의 조망이 아주 좋다. 서쪽으로는 인왕산에서 북쪽 벽련봉으로 이어지는 하얀 암릉이 한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수리봉에서 비봉을 거쳐 문수봉과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비봉은 하얀 바위가 인상적이고 보현봉과 문수봉(727m)은 높이 때문에 더 눈에 띈다.
돌고래 쉼터쯤 오니 이제 석파정과 창의문이 보인다. 석파정은 대원군의 별장으로 부암동의 명소이다. 옛날에는 부암동 지역을 삼계동이라 불렀고, 이 지역에는 조선 후기 명문가로 창의문 남쪽에 살았던 안동 김씨들의 별장이 있었다. 석파정도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것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거주했다는 것이다.
창의문은 북악산길과 창의문길이 교차하는 지점 숲 속에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는 자북정도(紫北正道)라고 쓰인 돌이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자북정도가 뭘까? 자하문 북쪽으로 난 똑바른 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자하문은 창의문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창의문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창의문 쉼터에 방문 패찰을 반납하고 바로 창의문 누각 안으로 들어간다.
창의문(彰義門),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의를 드높인 문이 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광해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궁궐로 진입했다고 한다. 1623년(癸亥) 능양군(陵陽君)을 옹립하려는 의군(義軍)들이 창의문 북쪽 세검정에서 칼을 씻어 결의를 다진 다음 이 문으로 들어가 거사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 누각 안에는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 명단을 적은 ‘계해거의 정사공신(癸亥擧義 靖社功臣)’ 현판이 걸려 있다. 이때 1등 훈작을 받은 사람이 김류(金瑬)와 이귀(李貴) 등이다.
누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740년(영조 16)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 다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대문 중에는 동대문인 흥인지문만이, 사소문 중에는 북소문인 창의문만이 오리지널인 셈이다.
겸재가 그리고 다산이 노래한 창의문
창의문을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창의문이라는 화제가 붙은 그림에 보면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고갯마루에 문루가 하나 보인다. 문루 오른쪽 위로 ‘창의문 겸재’라는 명문이 분명하다. 겸재 정선이 삼청동 또는 효자동 쪽에서 바라본 창의문의 모습이다.
창의문 뒤 왼쪽으로는 검은색으로 웅장하게 바위봉우리가 표현되어 있다. 벽련봉(碧蓮峰)이다. 그 위에 작고 동그란 바위가 하나 굴러 떨어질 듯 얹혀있다. 이 바위가 부침바위(付巖)이며, 그 때문에 이 동네 이름이 부암동이 되었다고 한다. 부암동은 현재 창의문 북쪽지역을 말한다.
다산은 여름 나절 창의문을 넘어 세검정 가로 피서를 가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더운 여름 병도 떨쳐 내고 바람 소리 물소리 들으러 누각과 정자가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칠언율시 중 앞의 4행이다.
창의문 앞에는 돌길이 뚫려 있고 彰義門前石逕通
삼각산 봉우리가 중천에 꽂혀 있지. 華峯三角揷天中
시냇물 돌아 흘러 마음까지 시원하고 回溪不斷澄心水
버드나무 위로 부는 바람 얼굴을 씻어주네. 高柳長吹拂面風
(<다산시문집> 제4권)
그러나 이제는 통행량이 많은 자하문 터널
창의문의 누각을 내려와 1층 석축을 살펴본다. 홍예 위쪽으로 물받이에 해당하는 누혈(漏穴) 장식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연꽃 모양으로 위쪽을 향하고 있으니 앙련인 셈이다. 그리고 홍예의 상단부 한 가운데는 새가 지네를 잡아먹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새를 봉황이라고도 하고 닭이라고도 하는데, 창의문 주변 산에 지네가 많기 때문에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고,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창의문에서는 인왕산쪽 성곽으로 바로 나갈 수가 없다. 그것은 창의문길이 성곽을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을 통과하여 창의문길 쪽으로 나와 길을 건넌 다음 성곽 옆길을 따라가야 한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 이루는 창의문 고갯마루를 지나는 길은 창의문 길이지만 이 고개 지하로는 현재 또 다른 길인 자하문 터널이 지나고 있다.
경복궁 쪽에서 신교 궁정동을 지나 부암동과 평창동 그리고 홍은동으로 이어지는 자하문길이 바로 이 터널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창의문길 보다는 자하문길의 통행량이 훨씬 많다. 우리처럼 서울 성곽에 오르는 사람이나 창의문 주변에 사는 사람만 창의문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창의문 옆 볼거리: 환기미술관과 유금 와당박물관
그러나 창의문길로 오르면 고갯마루 가까이에서 환기미술관, 유금 와당박물관 같은 훌륭한 전시관, 석파정과 같은 귀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환기미술관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을 모아놓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안내 자료에 따르면 “수화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로서 세련되고 승화된 조형언어로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 고유의 예술 세계를 정립하여 한국을 비롯, 현대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뉴욕에까지 그 이름을 알렸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 한국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다. 1950년대에는 산, 강, 달, 새 등을 한국적 정서에 담아 예술성과 서정성을 잘 결합시켰다. 그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파리에서 생활했으며 1963년부터 1974년까지는 뉴욕에서 활동했다. 이들 시대 수화의 작품은 절제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예술성 때문에 수화 김환기는 한국 현대미술 최고의 화가로 여겨진다. 현재 환기미술관에서는 ‘문미애를 추억하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유금 와당박물관은 부암동 사무소를 지나 왼쪽 언덕으로 난 길을 올라가야 한다. 지난 5월16일 문을 연 기와 전문 박물관이다. 대검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유창종 변호사가 그동안 수집한 기와 명품 100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일본인 이토, 이마이즈미, 이우치, 유창종으로 이어지는 기와 마니아들의 컬렉션이 모여 있어 한국 와당 수집 100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낙랑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진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 와당까지 있어 와당의 역사적 변화와 발전을 통시적으로 개관할 수 있다. 낙랑과 고구려의 것은 대부분 평양에서 출토된 것이고 백제의 것은 부여에서 출토된 것이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와당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고려와 조선의 것은 출토지가 다양하기도 하고 출토지를 모르는 것도 있다.
이곳에 전시된 수막새는 그 모양과 예술성이 뛰어나 전시가치가 아주 높다. 그리고 기와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이 새겨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기와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 문양의 섬세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친숙함에 감탄하게 된다. 이곳에 있는 와당들은 전시 제목에 걸맞게 ‘한국 와당 수집 100년(을 대표하는) 명품 100선’이다.
▲ 창의문 쪽으로 내려가는 길 ⓒ 이상기
서울 성곽의 정상에는 외국인도 올라와 있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니 프랑스인임을 알 수 있겠다. 그래 프랑스 파리 출신이 이곳에 오르면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 파리에서 가장 높은 곳이 몽마르트르인데 높이라야 고작 129m 밖에 안 될 뿐더러 북악산처럼 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멋진 풍경을 볼 수 없을 테니.
이제 백악마루보다 더 높은 곳이 없으니 창의문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이다. 서울 성곽 중 북악산에서 창의문까지가 가장 가파르다. 그것은 높이가 340m 대에서 120m 대로 급격하게 떨어지기도 하지만 홍련사 코스나 와룡공원 코스보다 거리도 짧기 때문이다. 백악마루에서 돌고래 쉼터까지가 1,300m이고 돌고래 쉼터에서 창의문까지가 다시 300m이다.
북악산 정상에 오르는 가장 짧은 길이 창의문 코스인지라 이곳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가장 잦은 편이다. 인파 가운데 역시 외국인들이 몇몇 보인다. 이제 외국인들의 관광 욕구가 서울 성곽에까지 이른 모양이다. 단체 관광 프로그램으로 서울 성곽을 넣을 때도 된 것 같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일본 관광객들이 특히 좋아할 것이다. 교토와 도쿄에는 이런 성곽이 없으니.
창의문과 관련된 이야기들
▲ 자북정도에서 가까이 보이는 북한산 비봉 ⓒ 이상기
창의문까지 내려오면서 보니 서쪽과 북쪽의 조망이 아주 좋다. 서쪽으로는 인왕산에서 북쪽 벽련봉으로 이어지는 하얀 암릉이 한 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수리봉에서 비봉을 거쳐 문수봉과 보현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중에서도 비봉은 하얀 바위가 인상적이고 보현봉과 문수봉(727m)은 높이 때문에 더 눈에 띈다.
▲ 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 ⓒ 이상기
돌고래 쉼터쯤 오니 이제 석파정과 창의문이 보인다. 석파정은 대원군의 별장으로 부암동의 명소이다. 옛날에는 부암동 지역을 삼계동이라 불렀고, 이 지역에는 조선 후기 명문가로 창의문 남쪽에 살았던 안동 김씨들의 별장이 있었다. 석파정도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것을 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 거주했다는 것이다.
창의문은 북악산길과 창의문길이 교차하는 지점 숲 속에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이곳에는 자북정도(紫北正道)라고 쓰인 돌이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자북정도가 뭘까? 자하문 북쪽으로 난 똑바른 길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자하문은 창의문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창의문까지는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창의문 쉼터에 방문 패찰을 반납하고 바로 창의문 누각 안으로 들어간다.
▲ 북쪽에서 바라 본 창의문 ⓒ 이상기
창의문(彰義門), 한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의를 드높인 문이 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광해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궁궐로 진입했다고 한다. 1623년(癸亥) 능양군(陵陽君)을 옹립하려는 의군(義軍)들이 창의문 북쪽 세검정에서 칼을 씻어 결의를 다진 다음 이 문으로 들어가 거사에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창의문 누각 안에는 거사에 참여한 사람들 명단을 적은 ‘계해거의 정사공신(癸亥擧義 靖社功臣)’ 현판이 걸려 있다. 이때 1등 훈작을 받은 사람이 김류(金瑬)와 이귀(李貴) 등이다.
누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으며 1740년(영조 16)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1958년 다시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으로 사소문 중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대문 중에는 동대문인 흥인지문만이, 사소문 중에는 북소문인 창의문만이 오리지널인 셈이다.
겸재가 그리고 다산이 노래한 창의문
▲ 겸재 정선이 그린 창의문 ⓒ 이상기
창의문을 그린 그림으로는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창의문이라는 화제가 붙은 그림에 보면 소나무와 바위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고갯마루에 문루가 하나 보인다. 문루 오른쪽 위로 ‘창의문 겸재’라는 명문이 분명하다. 겸재 정선이 삼청동 또는 효자동 쪽에서 바라본 창의문의 모습이다.
창의문 뒤 왼쪽으로는 검은색으로 웅장하게 바위봉우리가 표현되어 있다. 벽련봉(碧蓮峰)이다. 그 위에 작고 동그란 바위가 하나 굴러 떨어질 듯 얹혀있다. 이 바위가 부침바위(付巖)이며, 그 때문에 이 동네 이름이 부암동이 되었다고 한다. 부암동은 현재 창의문 북쪽지역을 말한다.
▲ 서울 도성을 그린 수선전도 ⓒ 이상기
다산은 여름 나절 창의문을 넘어 세검정 가로 피서를 가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더운 여름 병도 떨쳐 내고 바람 소리 물소리 들으러 누각과 정자가 있는 산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칠언율시 중 앞의 4행이다.
창의문 앞에는 돌길이 뚫려 있고 彰義門前石逕通
삼각산 봉우리가 중천에 꽂혀 있지. 華峯三角揷天中
시냇물 돌아 흘러 마음까지 시원하고 回溪不斷澄心水
버드나무 위로 부는 바람 얼굴을 씻어주네. 高柳長吹拂面風
(<다산시문집> 제4권)
그러나 이제는 통행량이 많은 자하문 터널
▲ 연꽃 모양 누혈과 봉황 장식 ⓒ 이상기
창의문의 누각을 내려와 1층 석축을 살펴본다. 홍예 위쪽으로 물받이에 해당하는 누혈(漏穴) 장식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연꽃 모양으로 위쪽을 향하고 있으니 앙련인 셈이다. 그리고 홍예의 상단부 한 가운데는 새가 지네를 잡아먹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이 새를 봉황이라고도 하고 닭이라고도 하는데, 창의문 주변 산에 지네가 많기 때문에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고,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새겨 넣었다는 얘기도 있다.
창의문에서는 인왕산쪽 성곽으로 바로 나갈 수가 없다. 그것은 창의문길이 성곽을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을 통과하여 창의문길 쪽으로 나와 길을 건넌 다음 성곽 옆길을 따라가야 한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만나 이루는 창의문 고갯마루를 지나는 길은 창의문 길이지만 이 고개 지하로는 현재 또 다른 길인 자하문 터널이 지나고 있다.
▲ 창의문 옆으로 지나는 창의문길과 위로 지나는 북악과 인왕산길 ⓒ 이상기
경복궁 쪽에서 신교 궁정동을 지나 부암동과 평창동 그리고 홍은동으로 이어지는 자하문길이 바로 이 터널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창의문길 보다는 자하문길의 통행량이 훨씬 많다. 우리처럼 서울 성곽에 오르는 사람이나 창의문 주변에 사는 사람만 창의문길을 이용하는 것이다.
창의문 옆 볼거리: 환기미술관과 유금 와당박물관
▲ 환기미술관 배치도 ⓒ 환기미술관
그러나 창의문길로 오르면 고갯마루 가까이에서 환기미술관, 유금 와당박물관 같은 훌륭한 전시관, 석파정과 같은 귀한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환기미술관은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의 작품을 모아놓은 미술관이다. 미술관 안내 자료에 따르면 “수화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제1세대로서 세련되고 승화된 조형언어로 한국적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 고유의 예술 세계를 정립하여 한국을 비롯, 현대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와 뉴욕에까지 그 이름을 알렸다.”
그는 1930년대 후반부터 추상미술을 시도 한국의 모더니즘을 이끌었다. 1950년대에는 산, 강, 달, 새 등을 한국적 정서에 담아 예술성과 서정성을 잘 결합시켰다. 그는 1956년부터 1959년까지 파리에서 생활했으며 1963년부터 1974년까지는 뉴욕에서 활동했다. 이들 시대 수화의 작품은 절제된 조형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예술성 때문에 수화 김환기는 한국 현대미술 최고의 화가로 여겨진다. 현재 환기미술관에서는 ‘문미애를 추억하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 유금 와당박물관 찾아가는 길: 환기미술관과 석파정도 보인다. ⓒ 이상기
유금 와당박물관은 부암동 사무소를 지나 왼쪽 언덕으로 난 길을 올라가야 한다. 지난 5월16일 문을 연 기와 전문 박물관이다. 대검 중앙수사부장을 지낸 유창종 변호사가 그동안 수집한 기와 명품 100점을 전시하고 있다. 이곳에는 일본인 이토, 이마이즈미, 이우치, 유창종으로 이어지는 기와 마니아들의 컬렉션이 모여 있어 한국 와당 수집 100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낙랑에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진다.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 와당까지 있어 와당의 역사적 변화와 발전을 통시적으로 개관할 수 있다. 낙랑과 고구려의 것은 대부분 평양에서 출토된 것이고 백제의 것은 부여에서 출토된 것이다.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와당은 경주에서 출토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고려와 조선의 것은 출토지가 다양하기도 하고 출토지를 모르는 것도 있다.
▲ 유금 와당박물관의 고구려 기와들 ⓒ 이상기
이곳에 전시된 수막새는 그 모양과 예술성이 뛰어나 전시가치가 아주 높다. 그리고 기와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들이 새겨져 있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기와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그 문양의 섬세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친숙함에 감탄하게 된다. 이곳에 있는 와당들은 전시 제목에 걸맞게 ‘한국 와당 수집 100년(을 대표하는) 명품 100선’이다.
덧붙이는 글
환기미술관은 http://www.whankimuseum.org/(Tel: 391-7701)을 통해 전시 안내를 받을 수 있고, 유금 와당박물관은 Tel: 394-3451을 통해 전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