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만을 남긴 채 가람은 사라지고
충남 천안 성거산 아래 천흥사지를 찾아서
▲ 천흥사지 가는 길. 저 멀리 천흥저수지와 성거산( 579m)이 보인다. ⓒ 안병기
지난 일요일(6.8), 고려시대 절터인 천흥사지를 찾아 나섰다. 천흥사지는 천안-입장 간 버스를 타고가다 성거읍 수청거리에서 내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성거산(579m)을 바라보며 걷는다.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우기 전 직산 땅을 지나다가 동쪽의 산을 보고 신령이 있다 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성거산'이라 부르게 했다는 산이다.
마을 안에 들어서자, 지나던 할머니께 절터를 물었더니 저수지 아래께라고 일러 주신다. 마을 들머리로부터 3400m가량 들어가자, 길가에 홀로 동그마니 서 있는 5층석탑을 만난다.
석탑이 허수아비처럼 홀로 남아 지키는 폐사지
▲ 천성사에서 내려다 본 보물 제354호 천흥사지 5층석탑. ⓒ 안병기
▲ 석탑 바로 위 언덕에 자리 잡은 천성사. ⓒ 안병기
천흥사는 고려 태조 4년(921), 고려 태조가 성거산이라고 산 이름을 짓고 나서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이미 폐사지로 나온다. 하늘이 흥하게 한 절, 천흥사(天興寺)라는 이름으로도 페사의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천흥사터를 지키는 5층석탑은 고려시대의 탑이다. 아래층 기단이 너무 얕아 마치 1층처럼 보이는 2단 기단 위에다 5층의 몸돌을 올렸다.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몸돌의 크기가 작아지는 비율이 그다지 크지 않아서 매우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얇고 너비가 좁은 지붕돌의 귀퉁이에서의 들림이 날아갈 듯 가뿐하게 생겼다. 안타깝게도 탑의 상륜부는 없다. 맨 꼭대기 5층 지붕돌도 1966년에 탑을 해체 복원할 적에 부근에서 발굴된 것이라 한다.
이 석탑은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돌의 구성에도 규율성이 있다. 특히 몸돌의 완만한 체감률은 온화하고 장중한 느낌을 더해준다. 고려 왕조가 시작되면서 석탑의 규모가 커지던 당시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짐작건대, 이 5층석탑은 옛적 천흥사의 주법당앞에 자리잡고 서 있었던 탑일 것이다. 짝을 이루던 법당은 벌써 사라졌거늘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홀로 이렇게 긴 고독을 견디고 있는 것일까. 어차피 견디는 것, 참는 것이 돌이 지닌 숙명이긴 하지만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 말이다.
▲ 천흥사 동제관음상. 현재 만일사 관음전에 봉안돼 있다. 불상 아랫 부분은 반사가 심해 할 수 없이 트리밍 하였다. ⓒ 안병기
이곳 절터에선 동제 관음상과 동종이 출토되었다 한다. 출토된 관음상은 현재 천흥사 법당에 봉안되어 있다. 절이 폐사된 이후 여러 곳을 떠돌다가 일제강점기 때 철물 공출할 때 당시의 만일사 주지 임홍근이 거두어 봉안했단다.
만일사에서 직접 본 관음상의 높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높이 127㎝. 오른손엔 감로수 병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손은 펴서 위를 향하며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한다는 청심환를 들고 있다. 온화한 표정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평화롭게 했다.
불상 배 부분 아래쪽에 '통화이십년천흥사(統和二十年天興寺)'라는 명문이 있어 1002년에 조성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1984년에 충남 문화재자료 제257호로 지정되었다가 2002년에 해제되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해제되었을까.
이곳에서 출토된 또 하나의 유물인 국보 제280호 천흥사 동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종에는 새겨진 명문에 따르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조성된 것이라 하는데,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신라 상원사 동종·성덕대왕 신종 다음으로 큰 종이라고 한다. 제작 기법이나 양식이 고려 범종을 대표하는 것으로 종이라고 판단해서 국보로 지정한 모양이다. 언젠가 국립박물관에 가게 되면 꼭 보고 오리라.
석탑의 외로움을 달래주고자 했음인지 뒤편 언덕에는 근래에 지은 천성사라는 절이 자리 잡고 있다. 탑을 나와 천성사로 간다. 대웅전과 요사 등으로 이뤄진 전각들의 기와지붕은 특이하게도 모두 주황색이다. 언제 지어진 절인지 내력을 알고 싶어 요사로 보이는 건물의 문을 몇 번 두드렸지만 아무 인기척이 없다. 하릴없이 뒤돌아서서 마을 한복판에 있는 당간지주를 향해서 발길을 옮긴다.
당간지주는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불편하다
▲ 마을 한 복판에 있는 보물 제99호 천흥사지 당간지주. ⓒ 안병기
▲ 기단석에 잔잔히 새겨넣은 안상. ⓒ 안병기
천흥사 당간지주로 마을의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탑으로부터 약 300~400미터 아래쪽에 있다. 옛날에는 절에서 의식이 있을 때면 절 입구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었다고 한다.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이라고 하고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부른다.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두 개의 지주는 동·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이 기단은 근처에 흩어져 있던 것을 복원한 것이라 한다. 기단 주위에 안상(眼象)을 새겨넣긴 했지만 뚜렷하진 않다. 양식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절을 창건하면서 함께 세운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당간지주는 가정집의 대문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 때문에 당간지주는 제멋을 맘껏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가정집 역시 통행 등 여러가 가지 지장을 받고 있을 게 뻔한 일이다. 주변 환경을 정비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인간이 이룩한 것은 반드시 폐허의 복도를 지난다
▲ 석탑 바로 위에 있는 천흥저수지. ⓒ 안병기
▲ 저수지 둑에 만발한 금계국. 젊은이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안병기
주불전 앞에 서 있었을 석탑과 당간지주 거리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점과 동종·관음상 등 출토 유물로 봐서 천흥사가 얼마나 규모가 큰 절이었나를 알 수 있다. 현재 천흥리 마을 전체가 절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렇게 큰 규모를 자랑하던 절이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이미 폐사지로 나오는 걸까. 어쩌면 새로 개창한 조선 왕조에서 고려 태조가 창건했다는 이유로 강제 폐사시켰는지도 모른다. 정치란 얼마나 졸렬한 것인가를 상상하면 그럴 개연성을 아주 덮지 못한다.
도종환 시인은 '폐사지'라는 시에서 "인간이 이룩한 모든 것은 반드시/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길게 누운 채 마모되어 가는/ 돌부처들이 먼저 알았을 것이다"라고 설파한다. "폐허의 긴 복도를 지나가야" 하는 것들 가운데 권력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손에서 놓는 바로 그 순간,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일지라도 페허가 돼 버리는 것이다. 헛되고 헛된 것들의 첫머리에 권력이 놓여 있음을 고려 태조는 알고 있었을까.
마을을 나서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 석탑이 있는 곳에서 불과 10여 m가량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서 저수지를 만난다. 1959년 쌓은 천흥저수지다. 저수지를 만들면서 절터의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줄기차게 대운하 건설을 주장하는 분들에게 꼭 한 번 보여주었으면 싶은 곳이다. 이런 저수지 하나를 건설해도 이토록 피해가 막심한 것을….
저수지 둑에는 노란 황계국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공작이국화 혹은 각시꽃이라고도 부르는 북아메리카 남부 원산인 꽃이다. 그러나 이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착화된 꽃이 돼 버렸다. 군데군데 젊은이들이 금계국 꽃 사진을 찍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저 자신이 꽃이라는 걸 알지 못한다. 그래서 생을 허비하는 것이다. 금계국이여, 너무 아름답게 피지 마라. 젊은이들이 너무 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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