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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박산성' 어떻게 넘나... 새 과제 직면한 6·10시위

서구식 대의민주주의 한계에 도전하는 한국식 직접민주주의

등록|2008.06.11 10:53 수정|2008.06.11 10:53

▲ 미국산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촉구 및 국민무시 이명박 정권 심판 100만 촛불대행진이 10일 저녁 서울 세종로네거리, 태평로, 청계광장을 수십만명의 시민들이 가득 채운 가운데 열리고 있다. ⓒ 권우성


우리에게 초미의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안겨주었던 6·10 촛불집회가 지나갔다. 주최 측 추산으로 50만(경찰 추산 8만)에 이르는 시민들이 광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촛불 행렬은 세종로 12차선 도로뿐 아니라 시청 광장은 물론 멀리 숭례문 로터리까지 빼곡이 들어차 말 그대로 장관을 이루었다.

촛불은 서울뿐 아니라 지방 각지에서도 무수히 점화되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118곳에서 집회나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MBC 9시 정규 뉴스는 전체 참여자가 100만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거기에는 남녀의 구별도 노소의 차이도 그리고 영호남의 이견도 없었다.

이로써 6·10 촛불시위는 대다수 한국인의 민심이 무엇인지를 국내외에 뚜렷이 알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외신들도 다투어 서울 발 촛불 기사를 내보냈는데, 특히 아랍의 위성방송 <알 자지라>는 10일 인터넷판에 한국의 촛불 소식을 톱뉴스로 보도했을 정도였다.

'촛불'을 가리켜 친북· 빨갱이라고, 혹은 마귀·사탄이라고 명명했던 인사들도 같은 시간대에 시청광장에 모였다. 그들의 인원은 약 5천에서 후하게 잡아 만 명쯤 되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은 스스로 5만 명이 모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차지한 면적과 밀집 정도를 냉정히 따질 때, 만약 그들이 5만이라면 '촛불'은 최소 150만 정도는 되어야 한다. 밤 11시가 넘자 그들은 약 70명 정도가 남아 찬송가를 느리게 부르고 있었다.

때 이른 권력 말기 현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이명박 정권

지금 한국인 대다수는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촛불집회에 기꺼이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촛불집회의 목표에 대해서는 두 의견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이명박 정권의 '변화'를 바라는 의견이며 다른 하나는 이명박 정권의 '퇴진'을 원하는 의견이다.

그런데 온건히 변화를 바라는 시민들도 만약에 이명박 정권이 끝내 변화하지 않는다면 퇴진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막연히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촛불'의 대다수는 궁극적으로 정권 퇴진을 원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명박 정권은 결코 '변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두 편으로 갈라져 있는 국민여론과는 상관없이 지금 이명박 정권은 말기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데 있다. 정권 말기에는 국제적으로 망신살 뻗치는 일을 정권 스스로 자초하는 법인데, 그것은 수도의 상징적인 거리에 괴물처럼 출현한 컨테이너 박스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고 말기 권력자는 시위대의 접근을 몹시 두려워하는데 이것 역시 컨테이너가 웅변처럼 입증하고 있다.

지지율이 급락하는 가운데 원래의 우군과 지지자들마저 속속 등을 돌리고 있는 것도 정권 말기 현상이다. 이제는 조중동에서도 이명박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가 자주 눈에 띌 정도가 되었다. 조중동은 이명박 대통령이 침몰할 때까지 그를 보호할 만큼 의리 있지도 않을 뿐더러 어리석지도 않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국민의 뜻을 전혀 모르거나 아주 조금밖에는 헤아리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권력자의 가족 또는 친인척이 권력을 분점하게 되는 것도 정권 말기 현상이다.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의원은 청와대 비서진은 물론 조각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정두언 의원의 폭로에서 청와대의 실세로 지목되어 전격 경질된 박영준 비서관은 바로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이었다.

그리고 장관 2~3개와 맞먹는 권력을 가진다는 방송통신위원장의 임명도 이상득 의원의 복안이 관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의 주장에 따르면 이번 촛불집회에 맞불을 놓은 보수집회에는 이상득 의원의 지역구가 있는 포항에서 한나라당원과 시의원들이 버스 30대를 타고 대거 상경해 참석했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그동안 이명박 대통령은 내정을 형에게 맡긴 채 자기는 캠프 데이비드에 갈 꿈에만 부풀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대통령은 내각과 비서진을 부분적으로 개편하겠다고 한다. 이른바 인적쇄신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인데, 이 정도의 조치로 납득할 수 있는 국민은 극소수밖에 안 된다는 점을 대통령만 모르고 있다. 그나마도 자발적으로 하려는 게 아니라 권력 내부의 분열 여파로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을 국민은 꿰뚫고 있다.

거기다가 정두언 의원의 말로는 인적 쇄신의 대상인 이상득 의원이 다시 인적 쇄신의 주체가 된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라면 국민 중에는 촛불을 발화시켰던 쇠고기 문제가 재협상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계속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 많을지 모른다.

▲ 미국산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촉구 및 국민무시 이명박 정권 심판 100만 촛불대행진에 참석했던 시민, 학생들이 11일 새벽 서울 세종로네거리에서 컨테이너 바리케이트 설치를 비난하며 '소통의 정부, 이것이 MB식 소통인가' 글이 적힌 현수막을 펼치고 있다. ⓒ 권우성


다급한 정권에 느긋한 촛불, '명박산성'을 어떻게 넘어야 하나?

지난 몇 차례의 시위에서 전경 버스를 끌어내면서 청와대를 육박했던 촛불 시위대는 이번에는 컨테이너 박스에 막혀 돌파조차 시도하지 않은 채 지극히 평화적으로 끝을 맺었다. 새벽 두 시쯤에 세종로에 남아 있던 3000명 정도의 시민들은 스티로폼을 컨테이너에 붙여 쌓고 그것을 돌파 수단으로 삼을지 장장 4시간 동안이나 토론했다. 그러다가 일부 시위대가 컨테이너 박스에 오르기도 했지만 아래에서는 내려와야 한다는 의견이 훨씬 우세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명박산성'이라 이름 붙여진 이 컨테이너 장벽이 '촛불'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 주었다는 점이다. 분명히 컨테이너는 시위의 임팩트를 현저히 약화시킨 장벽 역할을 톡톡히 한 게 사실이다. 물론 6·10 집회를 앞두고 네티즌 사이에서는 시위 방법에서 폭력 대 비폭력의 토론이 있었다. 이 토론에서 비폭력 의견이 3:1 정도의 우세를 보였다.

그런데 만약 용어를 조금 바꾸어서 '완력 대 비완력'으로 토론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는 '물리력 대 비물리력'으로 토론한다면? 아니면 '저항 대 무저항'으로 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는지 궁금해진다. 이런 용어들이 모두 온당치 않다면 법치주의의 용어로 '위법 대 준법'이란 것이 있다. 이 토론은 '촛불 투쟁에 불가피한 위법을 인정해야 하느냐?' 또는 '준법만으로 투쟁이 가능하느냐?'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국민일보> 보도에 따르면 헌법학자 10명 중 7명이 쇠고기 장관고시는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전직 경찰들의 모임인 무궁화회 회장은 사람에게 물을 뿌리는 것은 지독한 인권침해이고 위법이라고 했다. 하물며 물대포를 정면으로 발사하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또한 컨테이너를 대로에 설치하는 것은 도로교통법 위반은 물론 문화재법을 위배한 것이다.(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의 말에 따르면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는 사적 제 171호인 고종황제 칭경비전이 있다고 한다. 이런 국가 지정 문화재로부터 반경 100m 이내에 임시구조물을 설치하려면 문화재보호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그런데 경찰은 그곳의 바닥에 말뚝을 박고 용접을 해가면서까지 구조물을 설치했으니 이것은 매우 심각한 위법사항이라는 것이다.)

공권력은 이렇게 위헌과 위법을 자행하는데 그에 대항하는 시민들이 과연 준법으로만 투쟁해야 하는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등을 촛불은 더 진지하게 토론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발언권이 약화되어야 할 의견으로는 촛불을 구시대의 입장으로 보는 낡은 방식이 있다. 65년  생인 한 6·10 세대는 촛불집회에 지도부가 없는 점이 아쉽다는 말을 한다.(<프레시안> 보도) 이것은 지나간 시대의 운동권적인 시각이 아닐까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촛불시민들의 청와대 행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청와대는 유별난 것이라는 권위주의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피해의식이 어느 정도 개입되어 있다고 본다. 촛불 시위대는 대부분 지리적으로 청와대 인근이라고 해서 거기에 유다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백악관 앞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시위들이 자연스럽듯이 청와대 앞의 쇠고기 시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21세기형 한국식 직접민주의의의 태동 가능성

사실 우리가 민주주의의 전범으로 알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 특히 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와 정부수반이 국가 의사를 결정, 시행하도록 한 이 제도는 벌써부터 많은 학자들에 의해 그 약점과 한계를 지적받아 왔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미래를 아주 어둡게 전망한 바 있다. 최장집은 저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한국 민주주의를 비관적으로 보는 근거로 정당정치의 부실을 들었다. 그는 결과적으로 열린우리당을 비판하게 되어 노사모 명계남씨에게 격한 반론을 당한다. 하지만 그의 전망대로 한국의 민주주의는 지금 아주 어두운 국면에 처해 있다.

그런데 최 교수도 그렇지만 많은 이론가들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극복 방안으로 직접민주주의의 확대를 들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촛불집회를 '아테네 이후 최초의 직접민주주의 실현'이라고 하고 이를 중대한 변화라고 진단한 것은 아마 이런 맥락에서 촛불집회를 파악한 결과라고 보인다.

이번 촛불집회와 같은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던 초유의 현상이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아주 새로운 형태의 21세기 형 직접민주주의가 한국에서 최초로 실험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촛불집회의 미래를 합당한 논거와 함께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이번 촛불 시위의 방법론을 폭력 대 비폭력의 카테고리에서만 보고 찾으려 하는 등 과거의 잣대로 현재를 재단하는 일은 각주구검(刻舟求劍)처럼 어리석을지 모른다. 폭력 없이 뭔 일이 되겠느냐는 주장은 물론 무책임하다. 반면에 시민들이 다칠까 봐 정권 퇴진 주장하면 안 된다는 투의 주장은 인도주의적인 것이라고 해도 낡은 것이며 물론 정당하지도 않다. 그러니 함부로 시민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훈수해 봐야 자기 한계만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할 따름이라고 본다.
덧붙이는 글 김갑수 기자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항일역사소설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전 창조한국당 대변인 김갑수, 문화평론가 김갑수와는 동명이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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