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내 스물 한 살은 할부로 시작되었다

젊은 날의 시낭송회에 대한 회상

등록|2008.06.11 14:54 수정|2008.06.11 17:06
무기력한 삶을 극복하고자 시 낭송회를 열다

이 이야기는 스무 살 무렵 시낭송회를 열던 때의 치기어린 이야기를 쓴 자전적 이야기다.

내 스물한 살은 빈혈증과 함께 찾아왔다. 그 나이쯤엔 무쇠라도 씹을 수 있어야 했고, 태산이라도 불끈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혈기왕성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적혈구가 결핍한 내 혈액은 아주 나른했다. 극심한 무기력증을 앓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송창식이 부르던 '고래사냥'이란 노래의 가사처럼 좌절감과 무기력감만이 가득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을 다시 곧추세우려면 뭔가 새로운 자극과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궁리 끝에, 시낭송회라는 걸 열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내겐 가용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군산 시내 남녀 고등학생 연합체 형식의 독서 클럽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내가 무얼 한다면 그 동아리가 힘이 돼 줄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시 낭송회라는 것을 구경한 적이 없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도 잘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문학강연자 초청비용·엔솔로지 제작비·연습비·팸플릿 제작·마이크 시설 설치비(그때는 군산 시내 어디에도 마이크 시설된 공간이 없었다) 등 각종 비용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전혀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다.

가장 큰 큰 문제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가 내려진 엄중한 상황에서 집회 허가가 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상황이었다. 나는 무턱대고 시낭송회를 강행하기로 결론지었다. 자금은 어떻게든 조달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집회 허가는 아예 내지 않기로 했다. 일이 잘못될 경우 발생할지모를 형사 책임을 오롯히 내 몫으로 하면 될 터였다.

낭송회의 배경 음악을 누구에게 맡기느냐는 문제가 남았다. 당시의 좋지 않은 음향시설을 고려할 때 생음악 밖에는 달리 방법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친구(후에 그는 뮤지컬<명성황후> 제작사로 유명한 <에이콤>의 음악감독이 되었다)에게 배경 음악을 담당할 사람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클래식 기타를 치는 내 또래의 대학생을 소개받았다. 알고 보니, 마침 그는 내 고등학교 1년 후배였다. 그와 수시로 만나 막걸릿잔을 나눠 가면서 시낭송회의 음악에 대한 컨셉트를 잡아나가는 작업을 한 셈이다. 다행히 우린 코드가 아주 잘 맞았다.

마침내 대학생 5명을 포함한 20여 명이 명산동 YWCA 강당에 모여 각자 써온 어쭙잖은 자작시로 낭독 연습을 시작했다. 가끔 클래식 기타를 치는 후배의 배경음악에 맞추기도 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시 낭송 솜씨는 꼭 초등학생 국어책 읽는 것처럼 어쭙잖기 짝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창피만 톡톡히 당하기 십상이었다.

남학생· 여학생 가릴 것 없이 지독한 연습을 요구했다. 설령 여학생일지라도 연습이 게으르다 싶으면 앞으로 불러내 뺌을 때리거나 발로 차기도 했다. 그렇게 도가 지나친 행동을 서슴지 않자, 그렇게 날 잘 따르던 후배들이 점차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직 클래식 기타를 치는 후배만이 나를 이해할 뿐이었다.

허가를 받지 않고 시낭송회를 열다

1976년 11월 8일. 마침내 시 낭송회 날이 다가왔다. 행사 시작하기 1시간 전 쯤 되었을 것이다. 문학강연을 맡아주기로 했던 국문과 교수에게서 YWCA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자네, 집회 허가는 받았는가?"
"네." 
"그런데 왜 허가 없이 집회하느냐고 정보과 애들한테서 잔화 오고 난리가 났을까? 지금 당장 자네를 경찰서로 들어오라는군. 어서 들어가 보게."

'이거 큰일났구나' 싶었다.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타고 경찰서로 갔다. 그때까지도 내겐 위기를 모면할 아무런 대책도 서 있지 않았다. 암담한 심정이 되어 경찰서 계단을 밟는 순간, 기발한 생각 하나가 내 머릿속을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정보 2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형사가 내게 고압적으로 용무를 물어왔다. "집회 허가 문제 때문에 불러서 왔다"라고 말하자, 그가 갑자기 책상을 "탕!"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면서 버럭 소릴 질렀다.

"당신 도대체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지 알기나 하나, 응? 허가도 없이 집회를 열면 어떻게 되는 줄 알기나 하얀 말이야?"

나는 형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아니, 누가 허가도 없이 집회를 연다고 하십니까?"

그 순간, "시방 무슨 얘기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형사가 어리둥절 해했다. 그에게 찬찬히 생각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곧장 말을 이어갔다.

" 제가 잘 몰라서 정보 1계가 담당인 줄 알고 거기다 신고를 했습니다.  이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정보 1계는 옥외집회 담당 아냐? 이 사람아."

경찰서 계단을 오르면서 내가 세운 전략이란 이것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역이용하자는 것. 만일 정보1계가 멀리 떨어져 있다면 담당 형사는 전화로 집회 허가 신고 여부를 반드시 확인하려 들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옆방이라면 확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옆방에다 대고 물어보면 금방 들통날 일을 이 순진하게 생긴 청년이 설마 거짓말할 리가 없겠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형사가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그런데 정보 1계 이 사람들 왜 우리에게 업무 인계를 넘겨주지 않았지? 한심한 친구들이구먼."

상대가 어리둥절할 때는 망설이지 말고 다시 한 번 어퍼컷을 먹여야 한다. 머뭇거리지 않고 한 번 더 너스레를 떨어주었다.

"저흰 결코 경찰의 눈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경찰의 보호 아래서 집회를 하는 편이 더 안심이 됩니다. 집회를 그만 둘까요, 아니면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이 사람아, 시작 시각이 다 되었는데 그만 두긴 어떻게 그만두나?"

형사는 두서없이 몇 가지 주의사항을 늘어놓더니 그만 가보라고 한다. 아이쿠, 석가여, 예수여, 허다 못해 고무신이여, 고맙습니다. YWCA로 되돌아오는 동안 나의 마음은 흥분으로 달아올라 터질 것 같았다. 벌써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돼 있었다. 청중이 YWCA 강당을 다 메우고도 계단까지 뺴곡히 서 있었다. 상기된 나머지 청중들에게 드리는 인사말을 굽이굽이 만경처럼 늘어놓았다.

▲ 문학의 밤에서 시를 낭송하고 있는 모습. 카메라가 물짰던지 인물이 제대로(?) 반영이 되지 않았다. ⓒ 안병기

연습이 지독했던 만큼 후배들의 낭송은 상상이상이었다. 청중들도 서서히 달아올랐다. 무사히 시 낭송회가 끝났다. 문학강연 차 왔던 교수의 배웅을 나갔다가 둘이 막걸리를 몇 잔 주고 받았다.

교수를 보내고 나서 강당으로 되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지금쯤 다들 집에 갔을 것이다. 나 스스로 생각해도 후배들을 얼마나 혹독하게 다루었는가 말이다. 가서 뒷정리나 하고 가야지. 

그러나 짐작과는 다르게 후배들은 단 한 명도 가지 않은 채 오롯이 촛불 아래 앉아 있었다. 내가 강당 안으로 들어서자 후배들이 박수를 쳤다. 우리는 촛불 아래 앉아서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사람은 단 한 순간 불타오려고 생을 사는지 모른다. 한 자루 촛불처럼.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생애에서 단 한 번이라도 타오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삶 깊숙한 곳에 언제든지 쓸 수 있는 자양분을 미리 저장해둘 일이다.

할부는 쉽게 갚지 못한다

결국 나는 시낭송회 때문에 백수로서는 주제넘을 만큼 많은 빚을 졌다. 입장권을 팔면서 상징적으로 100원을 받긴 했지만, '언 발에 오줌 누기'에 지나지 않았다. 마이크 설치비를 비롯한 기타 비용들은 어찌 어찌 갚았다. 그러나 시중에 있는 인쇄소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교도소 작업과에서 찍은 팸플릿과 엔솔로지 값은 도저히 갚을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인쇄물을 맡기면서부터 쌓기 시작한 임이택이란 교도관과의 친분이 크게 도움이 됐다. 그는 나의 처지를 이해하고 할부로 끊어나가도록 조처해주었다. 교도소와 거래를 한 것도 처음이지만 할부로 돈을 갚을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가끔 연락해서 "동생 동생" 하면서 밥과 술도 사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 할부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시 낭송회가 보여준 커다란 반향에 고무된 나머지 그때 이후로 해마다 시 낭송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게다가 동인지 발간이라든가 시 낭송회를 위한 엔솔로지 발간 등으로 내 빚은 자꾸만 늘어 갔다. 그러나 어쩔 것이랴! 우리네 생 자체가 마음의 빚이든 금전적 빚이든지 간에 누군가에게 진 빚을 끝없이 갚아 나가야 할 할부 인생인 것을!

할부는 쉬 갚지 못한다. 이것이 내 스물한 살의 젊은 날에서 얻어진 교훈이었다. 오 마이 갓!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