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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초딩들 "엄마가 가지 말래도 몰래 나올 거예요"

[인천] 알아주는 보수동네 연수구에서 열린 촛불집회

등록|2008.06.13 10:39 수정|2008.06.13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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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별하, 장세미 어린이의 산토끼송쇠고기 재협상을 요구하는 노랫말로 바꿔 부른 동요 산토끼 ⓒ 오달란


연수구민촛불문화제 현수막세살짜리 조카는 미친소 그림이 무섭다고 울었다. ⓒ 오달란

아파트 값 높아서 '인천의 강남', 사교육열 높아서 '인천의 목동'이라 불리는 인천시 연수구. 초보수동네인 '살기 좋은 연수'에서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6월 12일 오후 7시 연수구 연수2동 솔안공원에서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연수구민 모임이 주최한 촛불문화제가 열린 것이다. 300여 명의 구민들이 촛불을 들고 "이명박은 물러가라! 고시철회 협상무효! 국민이 승리한다!"는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흡사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100만 촛불대행진의 천분의 일 축소판을 보는 듯 했다. 규모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알찬 행사였다.

구민들의 자유발언을 듣고 구호를 외치고, 토막 공연을 감상했다. 1부터 10까지 숫자에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조롱하는 노랫말을 붙여 각설이 타령으로 엮은 주부는 큰 박수를 받았다. 한별하(서면초3), 장세미(청학초3) 어린이는 산토끼를 개사한 노래로 인기를 끌어 두 번의 앙코르까지 받아냈다.

문화제가 끝난 9시부터 인도를 통한 평화적인 거리행진이 있었다. 솔안공원을 빠져나간 100여 명의 시위대는 연수경찰청과 연수구청을 지나 연수구의 중심인 BYC 사거리까지 행진을 계속했다. 몇 명의 경찰이 시위대를 주시했으나 행진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유권자 53%가 이명박 찍은 인천 최고의 보수동네

눈과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연수구에서 14년을 사는 동안 자유롭게 정치적 견해를 말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는 이웃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이 곳은 인천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곳이 아닌가.

지난 17대 대선에서 53%의 유권자가 이명박 후보를 찍었고, 18대 총선에서 황우여 한나라당 의원을 59% 지지율로 4선 시켜준 곳이 아닌가. 이명박 후보는 강화․옹진군을 제외한 인천에서 가장 높은 지지층을 연수구에서 확보했다. 황우여 의원은 인천의 12개 지역구 중에서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연수구민이 팍팍 밀어준 덕분이다.

자유발언대에 나온 2학년 여고생은 압도적으로 이명박을 찍은 어른들을 탓했다. "도대체 누가 이명박을 뽑은 겁니까? 어른들 아닙니까?"

안미숙(39․청학동 짱둥이 어린이 도서관장)씨는 "저 여학생 말이 맞아요, 집회 참석자 70~80%가 아마 한나라당 지지하고 이명박 대통령 뽑았을 거예요. 어른들이 뽑아놓은 책임을 져야죠"라고 말했다. 이혁재(연수구 옥련동)씨는 자유발언을 통해 "촛불시위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고맙습니다, 대통령 잘못 뽑은 어른으로서 죄송합니다, 이제 어른들이 재협상 이끌어 내겠습니다"라고 미안함과 각오를 전했다.

연수구의 보수 성향(위)18대 대선 결과 (아래)17대 총선 결과 ⓒ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이명박 찍은)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니까!" 직장인 권모씨(46)는 과격한 표현으로 심경을 털어놓았다.

"경제 살린다고 뽑아 놨더니, 공기업 통폐합․민영화한다고 하고…, 그 많은 노동자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 안하고…."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이 분노로 뒤바뀐 듯 했다.

주최 측의 송인철(인천연대)씨는 "연수구가 인천의 정치1번지이기 때문에 집회장소로 택했다"고 말했다. "구민의 70~80%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보수층입니다. 그래서 촛불집회 같은 행사가 더 많이 열려야 합니다."

진보의 바람 몰고 올 무적초딩들

거리행진 대열을 쫓아가던 중, 길을 거슬러 올라오는 6명의 어린이를 만났다. 연화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경찰 아저씨가 "애들이 뭐하고 있나? 집에 안 가고…"라고 해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지난 대선에서 부모님이 누구를 뽑았는지 아냐고 물었다. 6명의 아이들은 한 목소리로 "이명박이요!"라고 답했다.

최윤영(4학년)군은 "경제 살린다고 이명박 뽑았는데 잘못 뽑았대요"라고 덧붙였다. 백건우(4학년)군은 "믿었는데 배신당했대요"라고 말했고, 전지현(3학년)양은 "정동영이 대통령이 됐어야 하는데…"라며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거침없이 밝혔다.

"아빠, 엄마가 촛불문화제 나가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예요?"라고 물었다. 서하정(3학년)양은 "엄마가 가지 말래도 몰래몰래 나올 거예요"라고 말하며 씨익 웃었다. 과연 '개념있는 무적초딩'들이었다. 10년 후 이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세상은 얼마나 진보적일까?

▲ 연수구의 '개념탑재 무적초딩' 한세하, 장세미 어린이와 세미 어머니.(왼쪽부터) 세하어린이는 6.4 부평촛불문화제 자유발언시간에 소의 입장에서 쓴 일기를 발표해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 오달란


거리행진에서 만난 주부 한 명은 "서울 집회도 가보고 (인천)부평 집회도 갔었는데 연수구에서 열리는 집회가 여유가 있어서 좋은 것 같아요, 일단 가까우니까 밥 먹고 운동할 겸 나올 수 있고…"라고 말했다. "다만 홍보가 안 돼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촛불문화제 사회를 본 이두원(시민단체 연석회의)씨는 "네이버 '진보선언' 카페에서 집회 소식을 알 수 있다, 많은 분들이 가입해서 연수구 오프라인 모임을 가지는 게 내 소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회적으로 연 집회인데 생각보다 호응이 좋아서 의견 수렴 후 2차 집회를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 지역 촛불문화제

지역에서 열리는 소규모 집회는 시민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 우선 자유발언의 기회가 많이 주어진다. 무대와 가장 멀리 있는 시민도 고작 5m 떨어진 지점이라 소통이 원활하다. 촛불 문화제가 지역 현안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거듭난다면, 진정한 직접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촛불시위가 한계에 부딪쳤다,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촛불이 '접수'할 지역은 여전히 많다. 거리마다 골목마다 구석구석 촛불이 들어차서 정부가 국민의 의견을 제대로 듣고 행할 수밖에 없을 때까지 우리의 촛불행진은 계속되어야 한다.

▲ 지역 촛불문화제가 지역 현안에 대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 오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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