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전경들의 화답이 왔다. 팔도사나이,를 불러달라고

촛불집회, 전경에게 띄우는 시 2편

등록|2008.06.13 15:38 수정|2008.06.13 16:27

▲ 2008년 6월 광화문 거리. 전투경찰의 가슴에 시민이 달아준 흰 꽃이 '피어'있다. ⓒ 강기희


정부가 광우병 발생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결정한 후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번져나가던 촛불집회의 열기. 그 뜨거움이 절정에 달했던 6월 첫 주. 새벽에 시인 김주대(43)의 전화를 받았다.

"요즘 혼자서 광화문에 자주 나간다. 옛날 생각도 나고… 촛불 하나 보태는 거지 뭐. 그나저나 요 며칠 종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시를 2편 썼는데, 한번 읽어 봐라. 그나저나 너는 촛불집회 안 나오냐?"

2008년 6월. 한국 사회의 가장 뜨거운 쟁점 중 하나인 '미국산 쇠고기'. 서울시청 앞 광장에 선 시민과 학생들은 촛불을 밝히고 이 문제에 관해 자신의 의지와 의견을 때론 조목조목, 때론 목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이른바 '민중들의 거리 정치'.

사실 정치·사회 문제를 놓고 서민 대중이 거리에서 자신의 지향을 피력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랬고, 1991년 언필칭 '신공안정국' 때도 그랬고, 몇 해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기에도 한국인들은 이번과 유사한 집단체험을 했다.

김주대 시인 역시 1980년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엔 강의실보다는 거리에서 삶과 인생을 깨우친 학생이었다. 1990년대 초반엔 '공안통치분쇄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본부' 부대변인을 맡기도 했다. 그랬던 김 시인에게 오늘의 촛불집회는 어떻게 비춰졌을까?

그 궁금증이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시간에 눈을 부비며 인터넷에 접속하게 했고, 김주대가 보내온 시 2편을 열어보는 '수고'를 하게 만들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받아본 시는 수고를 상쇄해주고도 남을 만큼 좋았다.

촛불시위대와 전경버스 사이 최전선의 긴장감 속에 기타와 아코디언을 든 사내들이 슬며시 나타났다. 낯익은 가요를 부르기 시작하자 양떼구름 같은 시민들이 몽글몽글 모여들었다. 시민 중 한사람이 차단버스 뒤의 전경에게도 신청곡을 말하라고 외쳤다. 중무장을 한 전경들은 버스 뒤에서 숨을 쌔근거리기만 했다. 시민들은 거듭 외쳤다. 두고 온 고향, 실개천 같은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전경들의 화답이 왔다. 팔도사나이,를 불러달라고. 군에 들어가 신병 때 머리박고 부르던 노래. 어머니를 생각하며 울던 그 노래가 울려 퍼졌다. 차단버스의 틈 사이로 전경들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 김주대가 보내온 시 중 '팔도사나이' 전문.

우리들의 적은 전경이 아닌 이 상황을 강제한 '그 누군가'다

김주대는 시인답게, 그야말로 '시인답게'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들의 외침과 대의만이 아니라 그들의 반대편에 선 전경들까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 집회가 장기화되면서 '폭력 진압의 원흉'처럼 인식되기도 하는 전경들. 하지만, 사실 이들은 자신의 상관과 경찰 수뇌부, 나아가 정부의 명령에 따라야만 하는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또 다른 희생자들일 뿐이다. 전경모와 방석복만 벗으면 집회에 나선 사람들의 아들이자 친구이며, 선후배인 이들. 

자신의 막내조카뻘인 스물 한두 살 청년들이 '쇠고기 재협상'을 외치는 누이와 형, 아버지와 어머니의 반대편에 서있어야만 하는 아픈 현실을 김주대는 위와 같이 우회적으로 노래했다. 시민·학생과 전경이 같은 노래를 흥겨이 합창하는 광경은 아름답지만 서럽게 다가온다. 이런 서러움을 강제한 것은 분명 전경이 아닐 터.

김주대가 보내온 2편의 시 중 '사-알짝과 슬며-시'는 '팔도사나이'보다 더욱 구체적이다. 촛불집회를 위해 거리로 나온 이들 중 누구도 전경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촛불을 든 시민과 학생들은 전경이 아닌 이런 비극적 대치를 야기한 '그 누군가'를 미워할 뿐이라는 인식이 읽히는 시다.

이명박OUT 피켓을 든 빨간 원피스가 땀투성이 방패들에게 다가가 생수를 사-알짝 건넸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방패 몇이 한참 망설이더니 생수를 받아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한 시커먼 방패의 어색한 미소가 카메라에 잡혔다. 애교를 떨던 빨간 원피스가 깨금발로 방패의 뒤로도 힘들게 생수를 내밀었다. 그때, 시커먼 방패가 무전기 든 푸른 견장을 할끔 보더니 슬며-시 틈을 내 주었다.
-김주대가 보내온 시 중 '사-알짝과 슬며-시' 전문.

'삶과 문학을 일치시켜 민중시의 전형을 만들어냈다'고 평가받는 시인 김남주(1994년 작고)는 생전에 "조국의 아름다운 강과 산을 노래할 수 없는, 이 땅의 고통과 절망만을 쓸 수밖에 없는 현실이 통탄스럽다"는 고백을 내놓은 바 있다. 김주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 시인 김주대.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김주대가 등단하던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팍팍한 한국의 현실. 그 현실에 눈감을 수 없는 시인의 양심. 도대체 언제쯤이면 김주대가 조국의 아름다운 강과 산을 노래하는 시를 쓰고도 부끄럽지 않은 시절이 올까.

오늘 문득, '서정시가 아름다울 수 없는 시대'를 강제하고 있는 이들이 미워진다. 이런 생각을 떠올리며 서글퍼지는 게 비단 기자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