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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책들이니 내 삶에 담아야지

[헌책방 나들이 164] 서울 홍익대 앞 '온고당'

등록|2008.06.16 18:16 수정|2008.06.16 18:16

책방 앞홍익대 정문 건너편에 1층과 2층으로 자리한 헌책방 <온고당> ⓒ 최종규


(1) 홍대 앞

서울역 앞에는 헌책방이 한 곳 있습니다. 다른 헌책방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었고 딱 한 곳이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다만, 이 한 곳은 이제 인터넷으로만 책을 팔기 때문에 매장 나들이를 할 수 없습니다. 아쉬운 노릇입니다만, 저 같은 사람들이 나들이를 할 수는 없어도, 가까운 곳에 헌책방이 없는 시골이나 지역 작은도시 분들한테는 좋은 곳이 되겠지요.

아무튼, 서울역 앞에 자리한 헌책방 사장님을 만나서 당신께서 헌책방을 꾸려 오면서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세 시간에 걸쳐서 들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세상 흐름(시장논리)에 따라서 헌책방뿐 아니라 동네 작은 새책방도 힘든 형편이지만, 이런 가운데에도 저마다 애쓰고 힘써서 자기 길을 잘 헤쳐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 펴낼 잡지에 오늘 이야기를 실을 생각입니다.

그분과 헤어진 뒤 어디로 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신촌 나들이를 해 보기로 합니다. 한동안 찾아가지 못한 헌책방 한두 군데를 살며시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 보자 생각합니다.

서울역. 전철을 탑니다. 사람들 엄청나게 많습니다. 저도 이 많은 사람들 무리에 하나 보태는 셈일 텐데, 서울역은 언제나 사람들로 바글바글입니다. 꾸역꾸역 미어터지는 전철에 가까스로 몸을 싣습니다. 앞뒤로 크고작은 가방을 메고 사진기도 들고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 힘듭니다. 시청역에서 내립니다. 2호선으로 갈아탑니다. 사람들 물결을 헤집고 겨우겨우 탑니다. 홍대앞역에서 내립니다. 이곳도 사람이 많습니다. 서울에는 참으로 사람이 많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서울에서 무엇을 할까요, 무엇을 생각하고 보고 느낄까요.

골목길을 걸으며 홍익대 앞에 한 곳 있는 헌책방 '온고당'으로 갑니다. '온고당'으로 가는 골목에 미술학원이며 까페며 줄줄줄 늘어서 있습니다. 홍익대 앞에 자리한 미술학원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무엇을 가르칠까요. 그림그리기를 가르칠까요, 입시미술을 가르칠까요. '○○학원 = 홍익대'라는 걸개천을 물끄러미 올려다봅니다. 미술학원 다니는 아이들은 홍익대 앞 미술학원을 다니며 무엇을 배울까요. 이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이 미술학원을 다닐는지, 홍대생이 되고 싶어서 미술학원을 다닐는지. 미술학원을 나와 홍대에 들어간 뒤, 홍대를 마치고 나서 다시 미술학원 강사가 되거나 미술학원을 차리기도 하는 틀거리에 매여 살아가지는 않는지.

책시렁책꽂이를 모두 새로 짜맞추면서 한결 시원하고 넉넉하게 매무새를 바꾼 <온고당>. ⓒ 최종규


(2) 아름다운 책

책방 앞입니다. 계단을 밟고 아래층으로 내려갑니다. 안쪽 셈대 앞에 가방을 내려놓습니다. 이 길을 걸어오는 동안 등판은 땀으로 젖었습니다. 작은 책을 부채 삼아서 땀을 들입니다. 가방에서 꺼낸 사진기를 한손에 들고 슬몃슬몃 골마루를 누빕니다. 오늘은 어떤 책이 내 눈에, 내 마음에, 내 가슴에 들어올까 헤아리면서 골마루를 누빕니다. 꼭대기 쪽 책꽂이부터 밑바닥 책꽂이까지 까치발도 하고 쭈그려앉기도 하면서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신구문화사 손바닥책'이 여러 뭉치 쌓여 있는 모습을 봅니다.

한두 권이 아닌, 또 한두 뭉치도 아닌 여러 뭉치라니. 이 많은 신구문화사 손바닥책이 그동안 어디에 한꺼번에 쌓여 있다가 이참에 이렇게 헌책방 한켠으로 우루루 들어왔을는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저한테 없는 책을 살핍니다. 저한테 있으나 둘레에 선물할 만한 책도 헤아립니다. <알랭/박상규 옮김-행복론> (신구문화사,1979)을 집어듭니다. 알랭이라는 분이 쓴 '짧은 글(프로포)'은 여러 출판사에서 여러 판으로 나왔습니다. 행복을 말하는 책도 몇 가지 판이 있습니다.

전쟁의 혼란이라는 것은 요컨대 가장 착한 사람이 살해되고 교묘한 재주꾼들이 정의에 반하여 지배하는 기회를 발견하는 것이다 … 노동은 가장 좋은 것이기도 하고 가장 나쁜 것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노동이라면 최선의 것이고, 예속된 노동이라면 최악의 것이다 … 어린아이를 평생토록 느림보로 만드는 그러한 교육가가 있다. 그것은 오직 그들이 어린이에게 글공부만을 줄곧 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린이는 느릿느릿하게 공부를 한다. 즉 서투른 공부의 방법에 버릇이 든다. 그 결과는 꾸준한 공부와 혼합된 일종의 고통스러운 피로가 된다(104,110,113쪽)

<독립운동의 성좌 10인>(신구문화사,1975)이 보입니다.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 열 분밖에 없겠으랴만, 우리한테 익히 알려진 분들에다가, 우리가 본보기로 삼으면 좋다고 느끼는 분들 가운데 꼭 열 사람만 추렸을 테지요. 손바닥책이니 꼭 열 사람만 담을 수 있었을 텐데, '독립운동에 몸바친 분들'을 한 분 두 분 캐내고 밝히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 이야기만 모은 손바닥책'을 엮어내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보건대, 이와 같은 주제로 엮는 책이 얼마나 팔릴 수 있을까는 모르겠습니다. '사회운동을 했던 분들 이야기’도 그렇고, ‘통일운동을 했던 분들 이야기'도 그러하며, '민주-평화-환경운동을 했던 분들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운동임에도, 이와 같은 운동을 하는 분들 이야기는 거의 안 읽히고 있습니다.

집안에 거느리고 있던 종들을 자유민으로 풀어 놓기도 했고 남의 집 종들에게는 터무니없게도 경어를 썼다. 당시의 양반들이나 판서의 집안으로서는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당치도 않은 짓’이었다 … 행동의 인간, 자기 신념대로 살았던 그는 누이동생의 경우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있어서도 구태의연한 기성 윤리에 반발하고 나섰다.  (권오순 씀-이회영/77∼79쪽)

나한테는 아름다운 책나한테는 아름다운 손바닥책. 이 가운데 몹시 반가운 신구문화사 손바닥책. 이 책들한테는 누가 새 임자가 되어 주려나. ⓒ 최종규


<음악ㆍ연예의 명인 8인>(신구문화사,1975), <로오란트/양병탁 옮김-링컨>(신구문화사,1974), <근대화의 선각자 9인>(신구문화사,1976), <로맹 롤랑/박성룡 옮김-밀레>(신구문화사,1977), <한용운-님의 침묵>(신구문화사,1979), <로맹 롤랑/정한모 옮김-베에토벤>(신구문화사,1979), <홍순학/이석래 옮김-기행가사집(연행가)>(신구문화사,1976), <한말격동기의 주역 8인>(신구문화사,1975), <니오라쩨/이홍직 옮김-시베리아 제민족의 원시종교>(신구문화사,1976)까지 골라듭니다.

고른 책을 한 번씩 쓰다듬습니다. 어느 교수님은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 권>이라는 책을 써내기도 했는데, 저한테는 이 손바닥책들이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책 하나입니다. 가볍고 값싸고 작지만 줄거리 알찬 책입니다. 적은 돈으로 많이 찍어내어 더 많은 이들과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선물하며 짐스럽지 않고 선물받으면서도 흐뭇한 책입니다.

좋다고 느껴지는 책이라면 밥을 굶게 되더라도 사는 저로서는, 손바닥책을 다섯 권 열 권 장만하면서도 밥을 안 굶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헌책방에서 장만하는 손바닥책은 훨씬 값이 싸니, 여느 새책 한 권 사는 돈으로 열 권까지도 장만해서 열 가지 이야기를 헤아릴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크고 너른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선물해 주는 책인지 모릅니다.

다른 책도 구경해 보아야지, 하면서 옆 골마루에서 두리번두리번합니다. 저는 읽지 못하는 러시아 글이 책등에 빼곡히 적힌 책이 보입니다. 뭔 책일까. 사진책은 아닐까. 글만 있으면 다시 꽂고, 사진책이면 구경해야지.

책꽂이에서 꺼냅니다. 겉에는 낯익은 듯 낯선 듯 눈길이 가는 사진이 박혀 있습니다. 사이사이 사진이 곁들여 있는데, 따로 찍은 사진은 아니고, 영화에 나온 몇 대목을 옮겨놓았구나 싶습니다. 책이름은 <миР и ФиЛЪмЪı ΑΗДРЕЯ ТАРКОВсКОГО>(мОСКВА ‘иСКуССТВО’,1991). 누구 책인가 한참 갸우뚱갸우뚱합니다. 설마. 맞나? 타르코프스키구나.

(3) 자연생태 그림책


일본 그림책숲에 자라는 버섯을 다룬 생태자연 그림책.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이만하게 그리거나 엮어내지 못합니다. ⓒ 최종규

자연생태 이야기를 담은 일본 그림책이 잔뜩 보입니다. 나온 지 스무 해 안팎이 된 책들인데 그림결이 훌륭하고 짜임새도 돋보입니다. <小林路子-森のきのこ>(岩崎書店,1991), <松岡達英-JUNGLE>(岩崎書店,1993), <長谷川哲雄-森の草花>(岩崎書店,1989), <長谷川哲雄-昆蟲>(岩崎書店,1987), <야부치 마사유키-野や山にすむ動物たち(日本の哺乳類)>(岩崎書店,1991). 한 집에서 나온 책으로 보입니다. 출판사에서 자료로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고, 저작권대행회사에서 가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출판사라면 어린이책을 엮는 곳에서 가지고 있었을 터이고, 저작권대행회사라면 이 책이 한국에서 옮겨지도록 다리를 놓을 생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출판사 사람들한테 보여주었을 테지요.

<小泉るみ子-秋は林をめけて>(ポプラ社,2001)는 가을날 숲길을 걸어가는 느낌을, 어린이 눈높이에 따라서 보여주는 그림책입니다. 빛깔을 잘 골라서 그렸고, 그림으로 건네주려는 이야기가 따뜻하다고 느낍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를 돌아보건대,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 사라져서, 이제는 아이들한테 철에 따른 움직임을 보여주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런 판에 이러한 그림책이라도 몇 가지 있어서 아이들한테, '봄은 이렇단다, 가을은 이렇단다' 하고 들려줄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날씨가 망가져 버렸기에 이러한 그림책을 보여준들 아이들이 살갗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좋으면서 부럽고, 반가우면서 아쉽습니다. 이웃나라 일본 아이들은 1980년대에는 1980년대에 걸맞는 좋은 그림책이 있었고, 1990년대에는 1990년대에 알맞는 좋은 그림책이 있었습니다. 2000년대인 요즈음에는 2000년대에 알맞춤한 좋은 그림책이 있는 가운데, 다가오는 2010년대에는 2010년대에 잘 들어맞는 좋은 그림책을 품에 안을 수 있을 테지요. 그러면 우리 아이들은 어떠한가요. 2000년대 우리 아이들한테는 2000년대를 잘 담아내는 살뜰한 그림책 하나 품에 안을 수 있습니까. 나라밖에서 펴내는 훌륭하다는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을 넘어서, 우리 나름대로 우리 땅과 물과 바람과 햇볕을 고루 헤아리면서 담아내는 우리 그림책을 엮어내려는 땀방울을 얼마나 흘리고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 스스로 우리 땅이 어떤 모습인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우리 땅을 사랑하는 그림책을 못 엮어내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우리 스스로 우리 삶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있는 그대로 돌아보지 못하니, 우리 얼과 넋을 다독이는 그림책을 못 펴내는지 모릅니다.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그림쟁이는 그림쟁이대로, 글쟁이는 또 글쟁이대로.

아름다운 책 하나 엮어내자면, 먼저 자기 스스로 아름다울 수 있어야 하고, 자기 스스로 아름다움을 갈고닦으면서 자기가 디딘 땅을 아름답게 일구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런 움직임은 사회운동이 될 수 있지만, 자기가 몸담은 일터에서 애쓰는 일이 될 수 있고, 논밭을 일구는 농사꾼 모습으로도 할 수 있으며, 집에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일로도 할 수 있습니다(아이 키우기는 여자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이웃집과 사이좋게 어울리면서도 펼칠 수 있고, 물질문명 씀씀이를 줄이거나 멀리하면서도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책방 책꽂이느긋하게 둘러보도록 짬을 낼 수 있다면, 우리 마음을 살찌울 책을 한 가득 만날 수 있는, 헌책방 나들이입니다. ⓒ 최종규


(4) 받아먹기

책값을 셈합니다. 책방 나들이를 한다며 은행에서 뽑은 돈 가운데 삼분의 이쯤 나갑니다. 다른 곳 나들이를 할 수 있으려나 없으려나 간당간당. 다리가 후덜덜, 눈물이 찔끔. 배속에 있는 아이는 저희 어버이가 이렇게 돈을 쓰고 있는 줄 알려나. 알겠지. 아무렴. 알아야지. 그러나 모르면 하는 수 없지. 아이가 모르거나 못 느낀다면, 우리 둘이 아무리 우리 스스로 느끼기에 좋은 책을 만나고 사들이고 읽으며 책꽂이에 꽂아 놓고 지낸다고 하여도, 우리 깜냥껏 이 좋은 가르침과 알맹이를 찬찬히 받아먹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배속 아이가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우리 삶이 거듭날 수 있게끔, 새로워질 수 있게끔, 발돋움할 수 있게끔 애쓰면서 살아야지. 한 자리에 멈추지 말고. 한 곳에 고이지 않으며.
덧붙이는 글 - 서울 홍익대 앞 '온고당' / 02) 335-4414, 322-9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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