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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톤급 스페이스 오페라를 즐겨라!

[서평] 이언 M. 뱅크스의 SF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등록|2008.06.17 10:34 수정|2008.06.17 10:34
이언 뱅크스의 '메가톤급' 필력

▲ 이언 M. 뱅크스는 주류문단과 장르문단 모두에서 천재 소리를 듣는 '현시대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중 하나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그가 SF계에서 명성을 얻는 데에 첫발을 내딛었던 작품이다. ⓒ 열린책들


만일 필력(筆力)에 등급을 매길 수 있다면 이언 뱅크스는 틀림없이 메가톤급이다. 이 젊은 작가는 방대한 지식에 괴이한 상상을 더하여 하나의 온전한 세계를 창조했다. 판을 한껏 크게 벌려놓고 우주선 한척 띄워서 종횡무진 마음껏 누비게 하니 그 배짱이 두둑하다.

사이코스릴러인지 순수(주류)문학인지 구분이 쉽지 않은 <말벌공장>으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주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놀라운 행보를 보여주었던 이언 뱅크스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사나이다.

광활한 우주 세계에서 두 종족이 격돌한다. 종교적 제국주의에 빠져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는 삼발이 외계인 '이디란'과, 고도의 기계문명으로 물질적 결핍이 완벽하게 해소된 유토피아를 이룩한 공산주의 인류 종족 '컬처'가 한바탕 전쟁을 벌인다. 주인공 '보라 호르자 고부출'은 체인저라는 외계 종족이며 다른 사람으로 변신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호르자는 컬처의 이념을 매우 혐오하는 사나이. 단지 이디란이 컬처의 반대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디란의 스파이가 되어 싸우기로 한다.

소르펜의 감옥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된 호르자가 새로이 맡은 임무는 컬처의 슈퍼 인공지능체 '마인드'를 잡아오라는 것. 마인드는 호르자의 옛 고향이자 죽은 자들의 행성인 '샤의 세계'로 도망쳤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본의 아니게 호르자는 해적선 '청천난류'에 타고 만다. 그때부터 호르자의 좌충우돌 우주 모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이언 뱅크스의 전설적인 '컬처 시리즈'를 여는 근사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신나는 우주 모험 '스페이스 오페라'

스페이스 오페라는 과학소설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데 사실 '스페이스 오페라(Space Opera)'라는 말 자체에 은근한 멸시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말은 질질 끌어 도무지 끝날 줄 모르는 미국 드라마에 비누회사들이 스폰서로 늘어섰다고 하여 '솝 오페라(Soap Opera)'라고 비꼬아 불렀다는 데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있는 <은하영웅전설> <스타트렉> <스타워즈> 등이 바로 스페이스 오페라다. 은하제국이니, 거대문명이니 하는 거시적 소재들이 단골로 등장하는 장르다.

스페이스 오페라도 마치 서부극에서 배경만 우주로 옮겨놓아 지겹게 우려먹는 저질 활극물이란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스페이스 오페라만큼 뭇 젊은이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피를 끓게 하는 장르도 없다. 세계관 자체로 경이로운 장대한 상상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경이감(Sense of wonder)'이라는 과학소설의 본질에 가장 가까울 듯도 하니, 한갓 '삼류 활극물'로 치부하기에는 부당하다는 생각이다. 안 그래도 주류문학에 비해 '하위계급' 취급을 당하며 멸시받는 과학소설 장르에서도 저들끼리 계급을 정하는 일은 얼마나 우스운가.

종합선물세트 SF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 영화 <스타워즈2 - 클론의 습격>중 한 장면. <스타워즈>는 가장 널리 알려진 '스페이스 오페라' 시리즈다. ⓒ 이십세기 폭스사


해변에서 벌어지는 푸이-송과 '먹는 자들'의 희생제의(犧牲祭儀) 이야기는 역겨운 만큼 환상적이니 가히 로저 젤라즈니와 비견할 만하고, 행성 '바바치'에서 벌어지는 '대미지 게임'은 퇴폐적 과학기술이 극에 이르러 끔찍하게 오락적인 게임이다. 빛의 사원 습격은 제쳐두고라도 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험은 눈을 떼기가 못내 아쉽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를 읽다 보면 온갖 에스에프 판타지를 광대한 스케일로 뜯어 붙인 거대한 '콜라주(collage)'가 연상된다. 이만한 스케일을 자유롭게 묘사할 수 있는 글쟁이는 무척 드물지만 이언 뱅크스의 솜씨는 이미 '젊은 거장'이라 부를 만하다. 기차 충돌을 묘사하는 능력 하나만 보아도 압도적일 만큼 탁월한 것이어서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찌그러지는 쇠몸뚱이, 번쩍이는 불꽃, 귀를 강타하는 소음까지 모두 생생하다.

극도의 재미가 우주 공간에서 근사하게 펼쳐지니 스타워즈를 책으로 경험하는 격이다. 어쩌면 너무 뻔할 이야기를 쓰면서도 이처럼 끝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그 경지가 신기하다. 급기야 나중에는 읽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환장할 지경에 이른다. 뻔한 이야기가 더 이상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결말을 향해 속도를 높여갈수록 물음표가 뜬다.

의미심장한 제목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T.S.엘리엇의 시 <황무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황무지>를 읽고 플레바스의 운명을 생각하면 호르자의 운명도 어찌 될 것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나는 급격 수직 낙하하는 결말에 충격을 받았다. <말벌공장>에서 이언 뱅크스의 신랄한 재치와 기괴한 상상력은 벌써 증명되었지만 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는 압권이며 백미다.

뱅크스의 글쓰기 스타일은 무척 신랄하다. 무얼 봐주고 눈감아주는 법이 없다. 낭만을 파괴하면서도 낭만적인 정서를 만드는 법이 이상하여 또 기막히다. 사람을 무척이나 쉽게 죽여 버려 더욱 사랑하게 만든다. 육백 페이지 남짓한 책이란 게 믿기지 않도록 내용이 풍부하여 과자로 말하자면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하다.

나는 뱅크스의 비낭만적인 낭만을 사랑한다. 컬처의 여전사 페로스텍 발베다는 책을 읽으며 호르자도 제쳐두고 가장 매혹적이었던 여자였다. 그리고 우리의 고독하고 하드보일드한 마지막 체인저 보라 호르자 고부출. 결국 그는 우주 역사에서 '플레바스'로 남았다. 책장을 덮으며 무엇인가 아련하고 안타깝다. 결국 나는 플레바스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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