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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붙이는 간판들 "좀 살려주세요"

번화가의 난잡한 간판은 한국 자본주의의 현주소

등록|2008.06.20 12:12 수정|2008.06.20 12:12

▲ 고양시 시청 앞 번화가의 모습. 옥외 간판이 어지럽게 걸려 있다. ⓒ 박종원


도시 번화가는 간판의 '난민 수용소'다. 구릉지대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판자촌들처럼, 건물마다 빼곡히 붙어있는 옥외 간판들은 현기증을 느끼게 할 만큼 어지럽고 난잡하다.

간판의 형태와 모양도 가지 각색이다. 팔을 이리저리 휘둘러대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풍선인형, 사람 머리 끝에 스칠 듯 말 듯한 높이에 매달려 있는 돌출형 간판, 사람의 도보를 가로막는 입간판 등등. 간판의 형태는 그 난잡함만큼이나 다양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간판의 막 나가는 형태만큼이나 간판의 문구들도 막 나가는 것들이 많다. '흥분되는 세일' '란제리 오르가즘 쎄일' 등 성적 암시를 유도하는 문구부터 '똥값처분' '졸라빨라 인터넷' 등의 비속어도 곳곳에서 보인다. 때로는 지상파 방송에 자신의 업소가 출연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방송의 한 장면을 간판에 붙이는 경우도 있다. 그야말로 간판의 천태만상이다.

간판에 증명사진을 단 사람들, 그 이유는?

몇해 전부터는, 업주 자신의 얼굴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곳이 늘어났다. 우리 가게가 위치한 덕양구 고양동 주변에 4곳의 음식점이 간판에 업주의 증명 사진을 달고 영업하고 있다. 최근에는 업소 한 곳이 문을 닫아 업소는 3곳만이 운영 중이다. 범위를 고양시 전체로 하면 숫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보통의 경우 자신의 업소가 특정 음식의 원조임을 강조하기 위해 업주의 증명사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반드시 그러한 것만도 아니다. 원조냐 아니냐의 문제만으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업주들은 어떠한 목적으로 업소 간판에 자신의 증명사진을 붙이는 모험을 하는 걸까?

그래서 자신의 증명사진을 간판에 붙인 백반집 아주머니를 만나 보았다. 그 분의 대답은 이랬다.

"거 어디여, 식품회사들 냉동차 보면 사람 증명사진 하나 붙여져 있잖여. 한번 튀어보는 게 매출에 도움이 될까 해서 내가 이 동네 최초로 해본 거지. 근데 사실 홍보효과는 별로 없어. 간판 두 개를 150만원 주고 했는데, 아무래도 제 값을 못하는 듯싶어. 그래도 이 간판 다시 새로 할 생각은 없어.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기본 벌이를 하지."

간판에 대한 집착은 우리 부모님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부모님이 운영하는 피자 가게에도 세 개의 간판이 있다. 두 개의 옥외 간판과 입간판 하나다. 몇 개월 전, 대출로 마련한 새 업소에도 간판이 세 개다.

좀 과도한 홍보가 아니냐고 부모님에게 물어보지만 그 때마다 듣는 이야기는 단 한가지뿐이다.

"그래도 남들 하는 만큼은 해야 벌어먹고 살지."

간판은 홍보 수단이 아닌 생존 투쟁의 도구

그렇다면 업주들은 이러한 튀는 간판의 난립 속에서 광고 효과를 볼 수 있기는 한 걸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보행자가 평균적으로 한 곳에 시선을 머무는 시간이 1초를 넘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간판은 보행자의 시선이 머무는 짧은 시간 안에 가게를 홍보해야 하는데, 주변에 밀집한 간판들이 보행자의 몰입 정도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낳는다. 여기에 원색의 조명과 다양한 색감의 광고 문구들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우울증 촉진, 초조감 증폭 등의 정신적 피해를 주기도 한다. 쉽게 말해 시각공해다.

간판이 주는 시각공해는 오래된 시가지일수록 더욱 심각하다. 이러한 이유로 각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오래된 시가지들을 중심으로 간판 정비 사업을 벌이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2007년 간판정비사업에만 100억여원을 투입할 정도로 간판 정비사업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간판정비사업에 순순히 협조하는 업주들은 생각만큼 많지 않다. 왜일까? 사실 광고간판 하나만으로 광고효과를 볼 것이라고 믿는 업주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간판 달기를 멈추지 않는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개업을 하는 순간, 업주는 주변 점포와의 비교를 멈추지 않는다. 주변 점포와의 비교 속에서 안도감을 찾기도 하고,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특히 음식점과 주점의 경우가 그렇다. 한정된 고객을 놓고 너무 많은 수의 업소들이 경쟁하다 보니 개업한 이후부터 불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주위 점포들이 화려한 간판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손님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면, 불안감은 더욱 증가한다. 평범하게 있다가 존재감마저 묻혀버리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업주들 각자가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 보니, 서로 간판으로 무장을 하기 시작한다. 상대방의 간판이 더 커지면, 이에 지지 않기 위해 간판으로 대응하고, 상대방의 음악소리가 더 커지면 역시 그에 대응하기 위해 음악소리를 더 키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한정된 상권 내에서의 간판 개수는 점점 늘어나고 크기 또한 점점 커진다. 물론 귀를 찢을 듯한 거리의 음악소리도 이 과정에서 생긴다.

지차체의 간판 정비사업 "잘될 리가 있나"

한 마디로 간판은 단순한 홍보 수단이 아니라 자영업자 개개인의 생존 투쟁 수단이다. 아니, 차라리 살려달라는 절규에 가깝다.

주요 언론에서는 거리 환경의 선진화를 위해 자영업자들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핵심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다.

▲ 2006년 전체 취업자 수 대비 자영업자 비율 ⓒ 박종원

2006년 한국경영자총협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취업자 수 대비 자영업자의 비율은 26.5%다. 이는 OECD 국가 평균에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이 주점과 유흥업소, 요식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점포 수로 따지면 전국에 분포한 65만여 개의 점포 중 40만여 곳으로 추정되는 규모다. 그리고 이 가운데 수익을 내며 5년 이상 생존하는 업소는 10% 미만에 불과하다.

이는 간판의 난립현상이 단순히 자영업자 개개인의 인식에서만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공급 과잉으로 인한 점포들 간의 과도한 경쟁이 결과적으로 간판의 난립을 조장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판의 난립현상은 현재 한국이 처한 후진국적 경제구조의 현주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업주들에 대한 단순한 설득작업만이 아니라, 자영업자들의 공급 과잉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장기적인 경제구조 개혁과 실업 인구를 흡수할 일자리의 확대가 필요하다.

특히 위 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생기는 낙오자를 최소화하기 위한 제한적 실업급여 제도, 지자체 차원의 전직 상담과 대출지원, 직업교육, 일자리 알선 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번화가의 난잡한 간판은 한국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예다. 승자는 살고 패자는 죽는 공간. 오늘도 그 잔인한 공간은 약이 오를 정도로 화려하게 명멸한다. 그리고 오늘도 누군가는 새로 개업을 하고, 누군가는 폐업신고를 할 것이다. 그 잔인한 공간 속에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이 자리 잡고 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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