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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싱글시대 29

군대,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하고서

등록|2008.06.20 14:45 수정|2008.06.20 14:45
그녀의 일기장에 매일같이 내 이름이

문예지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지 얼마 뒤에 단편소설집을 낸 나는, 그 해에 대하소설에 손을 댑니다. 그러고 1992년에 여섯 권짜리 대하소설을 완간합니다. 제목은 <강(江)>.   

그동안 나는 미술 계통의 책을 내는 작은 출판사에 다녔으며, 대하소설을 쓰면서 그만두게 됩니다. 그런데 출판사에 다니는 동안, 대학 시절에 나를 짝사랑했었던 여자가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녀는 연극과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문예창작과 동기인 신예리가 전화를 합니다. 커피 살 테니 만나자는 겁니다. 나는 퇴근 후에 약속 장소인 명동의 한 고전찻집으로 나갔습니다. 그 고전찻집은 내가 군대에 가기 전에 최민이와 만났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예리와 다른 테이블에 연극과 출신인 김미숙이 앉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나를 보더니 몹시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왕자님을 만난 표정이라고나 할까요?

나는 그녀와 눈인사를 나누고는 신예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장소를 옮겨 갑니다. 장충동에 있는, 문예창작과 후배가 하는 아담하고 분위기 있는 카페였죠. 신예리가 맥주를 산다고 해서 그리로 장소를 옮긴 겁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김미숙이 나타나더군요. 우리는 합석했습니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김미숙이 신예리에게 나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겁니다.

맥주를 취기가 오르도록 마시고 카페에서 나오는데 김미숙이 따라나섰습니다. 서로 방향을 달리 하여 가야 하는 지하철역에서 그녀가 말했습니다.

“언제 신림동에 한번 오세요. 제가 맛있는 순대 사드릴게요. 술은 물론이구요.”

그녀는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전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딘지 촌스럽게 생겼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198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술을 살 테니 만나자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저녁 때 종각역 앞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내 팔에 자신의 팔을 끼우면서 걷더군요. 우리는 그 당시에 유행하던 학사주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약주를 마셨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느 날 교정 벤치에 앉아 있는 문욱 씨를 처음 발견하고 바로 이 남자다 생각한 거예요. 예술대학 안에서 가장 예술가다운 모습을 발견한 거예요.”
“큰일이 벌어졌군요.”

“저는 그날부터 문욱 씨 얘기가 들어간 일기를 매일매일 쓰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쓴 일기가 두 권이나 돼요.”
“그 일기 좀 나한테 보여줄 수 없어요?”

“보여줄 수 없어요.”
“하여간 헛짚으셨군요. 나는 미숙 씨 같은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거든요.”

“제가 좋아하게 만들 거예요.”
“그게 마음대로 되나요?”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뭐죠?”

“탤런트나 영화배우 중에 누굴 좋아하세요?”
“음… 정민희.‘

“그래요?”
“이런 일도 있어요. 우리 학교(S예술대학) 옆에 H스튜디오가 있는데, 그 앞에 차를 세우고는 한 여인이 내렸는데 그녀가 바로 정민희였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죠, 그녀가 잠시 서 있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예요.”

“그래요? 마음에 들었나? 내가 뭐래요, 문욱 씨만큼 예술가다운 모습도 없다니까요.”
“나중에 내가 발표한 소설이 영화화되면 그녀를 주연으로… 하하하하!”

“흥!”

그날 약주를 마시며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우리 둘 사이의 진전은 없었습니다.

“다음에 만나면 중국요리 사드릴게요.”

 그렇게 헤어지고 난 지 한 달이 채 못 되었을 때, 그녀가 중국요리를 사주겠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러니까 1990년 1월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고량주와 양장피를 먹었습니다. 그녀는 최대한 나의 기분을 맞춰주느라고 애쓰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니올시다’였습니다. 그녀는 나의 애인이 되고 싶어했지만 나는 그냥 같은 대학 동기로서 만나는 게 좋겠다고 그녀를 설득했습니다. 이번에 그녀는 내가 다니는 출판사 근처로 찾아왔습니다.

“문욱 씨, 사랑해요.”

그녀는 아예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받아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눈물까지 보였습니다. 그러고 얼마 뒤 그녀는 전화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미국 가게 됐어요. 양주 사드릴게 사당동으로 나오세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에요.”

사당동의 한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만났습니다. 그녀는 약속한 대로 양주를 샀습니다.

“제가 미국 간다는데 기분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왜 미국엘 가는 거요?”

“공부하러요.”
“그럼 잘 됐지 기분이 이상할 건 없지 않수.”

“그래도 헤어진다는데 기분이 이상하지 않아요?”
“아뇨, 아무렇지도 않은데…”

“정말 답답한 사람이에요, 문욱 씨는!”
“그러니까 나 같은 답답한 사람을 좋아하지 말아요. 알았죠?”

그녀는 또 눈물을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고, 1년쯤 뒤에 나는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로부터 6~7년 뒤, 그녀는 그 동안 고양시 관산동을 거쳐 인천으로 이사한 나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를 했습니다. 문인협회에 물어보아서 알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출장중이라며 꽤 오래 통화를 하였습니다. 그녀가 또 ‘문욱 씨 얘기가 매일 들어가 있다’는 자신의 학창 시절 일기장 얘기를 꺼내기에, 그것을 나에게 넘겨줄 수 없느냐고 그녀를 꼬드겼습니다.

그녀는 만나자고 했습니다.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녀는 혼자 나오지 않고 다른 대학에 다니던 여자와 함께 나왔습니다. 구면이었습니다. 학창 시절에 대학 근처의 다방에서 셋이 함께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일기장을 가져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넘겨주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근처의 생맥주집으로 갔습니다. 생맥주를 마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밖에 만날 수 없는 게 슬퍼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또 그녀의 눈에 물기가 비치는 걸 보았습니다. 그런데 헤어질 때쯤, 그녀가 자기 모자를 벗더니 선물이라며 나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고 헤어진 지 얼마 뒤에는 핑크빛 립스틱을 우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새것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연락이 없는데, 그녀는 왜 핑크빛 립스틱을 보내준 것일까요?
덧붙이는 글 그 동안 교통사고를 당하여 무릎 경골 골절과 무릎 관절경 수술로 입원하였기 때문에 연재를 이어 가지 못했습니다. 퇴원한 지 한 달, 다시 집중력을 키워 연재를 이어 갑니다. 이 소설은 격월간 문예지 <서라벌문예>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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