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슬픈 오키나와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이야기

[서평] 하이타니 겐지로 장편소설 <태양의 아이>

등록|2008.06.24 09:07 수정|2008.06.24 09:07

표지<태양의 아이> ⓒ 양철북


먼 옛날 류큐라 불리던 섬이 있었다. 총과 칼조차 없었다고 전해지던 평화의 섬. 동북아, 미주, 동남아 세 지역이 접속하는 군사적 요충지가 되어 근대 세계의 모순이 종합적으로 얽혀 있는 곳. 그래서 당해야 했던 수난과 고통의 상처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섬을 지금은 오키나와라 부른다. 

'어린이'와 '문학'이란 화두를 안고 평생을 살아온 하이타니 겐지로가 들려주는 오키나와 이야기가 <태양의 아이>란 작품이다. 비극적 역사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떨쳐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고통을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오키나와는 태평양 전쟁 당시 최후의 격전지가 되어 3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12만이나 되는 주민이 죽음을 당했던 곳이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사지가 찢기고 여자는 능욕당하고 죽는다'며 주민들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전쟁이 끝난 뒤 오키나와의 동굴 속에서는 참혹하게 죽어간 수많은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군민공사(軍民共死)란 명분으로 칼과 끈으로 죽음을 강요했던 참혹한 시신들….

이렇듯 참혹한 역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소설 여기저기에서 독자로 하여금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작가가 전해주는 이야기에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 평화에 대한 간절한 희망, 작고 힘은 없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기 때문이다.

12세기 이래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류큐는 14세기에 들어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하면서 독자적인 왕조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 뒤 중국, 일본, 미국의 침략과 지배를 받는다. 

15세기 임진왜란으로 인한 손실을 채우려는 일본은 류큐를 점령한다. 1609년 일본 샤쓰마한에 정복되어 일본과 중국의 공동속국이 되었다가, 1879년 메이지 정부의 오키나와로 편입되었다.

1945년,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의 최후 격전지가 된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하기까지, 3개월의 짧은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 4분의 1인 1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제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여자는 능욕당하고 남자는 사지가 찢겨 죽는다’며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이른바 군민공사(軍民共死), 오키나와를 지켜준다던 일본군에 의해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이 상륙하기도 전에 집단학살을 당한 것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오키나와는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  오키나와의 1960년대 후반 이후, 일본 본토에서 행해진 베트남 반전운동과 더불어, 오키나와 문제는 일반인에게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을 위해 오키나와는 B52가 출격하는 후방지원 기지였다.

1972년 오키나와는 미군기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으로 다시 넘어갔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복귀되었을 때 대부분의 오키나와 사람들은 환영했다. 그러나 오키나와에서 출격한 전투기가 베트남 전쟁에서 무고한 베트남 민중을 죽이는 ‘가해자’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후 오키나와는 미군기지 반대운동, 평화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태양의 아이>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 속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소녀 후짱의 눈을 통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의 근원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참혹했던 과거를 가슴에 담고 살면서 그 고통을 벗어나지 못해 정신병에 시달리는 아빠, 오키나와에 대한 안 좋은 말을 들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기천천, 태평양 전쟁 당시 오키나와를 지켜주겠다며 들어온 일본군이 미군의 공격을 앞두고 명예로운 죽음을 강요하며 주민들을 모아놓고 던진 수류탄 때문에 팔을 잃은 로쿠 아저씨, 오키나와에서 누나를 잃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기요시….

6학년 어린 나이에 이들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조금씩 깨달아가면서 후짱은 '태양의 아이'(오키나와 아이)로 성장한다.

자신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고통스러운 일에 짓눌려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의 근원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세상에는 슬픈 행복도 있는 거야.
후짱은 비겁하게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아.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바다뿐 아니라 깊고 슬픈 오키나와도 다 알고 말거야."(책 속에서)

하지만 고통의 근원에 다가서는 것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과거의 고통은 단지 과거로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현재의 삶과 연결되어 살아서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버림받고 누나를 잃은 기요시는 후짱의 도움을 받아 겨우 정착하고 엄마와 화해하지만, 과거에 몸담았던 폭력 조직으로부터 돌아오라는 강요를 받으며 폭행을 당해 뇌수술을 받을 정도로 중상을 입는다.

병상에서 기요시는 자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의 근원이 오키나와였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병실로 폭행 사건을 조사하러 온 경찰들과 맞선 로쿠 아저씨의 모습을 통해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비로소 ‘오키나와 아이’라는 자존심을 갖게 된다.

"오키나와에 태어난 것을 후회해서 남들만(남뿐이 아니야. 엄마까지) 원망했던 나는 그저 쓰레기였을 뿐이야. 하지만 후짱, 나는 이제 쓰레기가 아냐. 난 오키나와의 아이야. 나도 태양의 아이란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자 괴로우면서도 기뻤어. 나는 이제까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란다."(책 속에서)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 <모래밭 아이들> 등에서 보여준 아이들에 대한 사랑, 생명체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태양의 아이>란 작품에서도 어김없이 그려진다.

참혹한 과거의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 한 번도 남들 위에 군림해서  위세를 부려본 적이 없고 늘 당하고 짓밟히기만 했던 사람들, 그래도 남의 불행을 딛고 행복해지길 결코 바라지 않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주옥처럼 펼쳐진다.

책을 읽다보면 오키나와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스런 과거의 아픔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작가는 그 고통 너머에 있는 소중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고통의 상처를 치유해주려 애쓰는 따뜻한 모습, 가난하고 힘이 없어 늘 손해를 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기쁨을 주고 애정을 느끼게 해주는 속 깊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독자들로 하여금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 하이타니 겐지로의 <태양의 아이>다. 책 속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꼭 읽어보시라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덧붙이는 글 하이타니 겐지로/오석윤 옮김/양철북/2008. 5/9,800원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