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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온 여성들이 심은 고구마

결혼이민자 여성들의 애환을 듣다

등록|2008.06.25 10:13 수정|2008.06.25 10:13
비가 온다는 라디오 예보가 있어서 카페 회원들에게 알렸다. 시설농사를 전혀 하지 않고 자연농사만 하는지라 비가 온다고 하면 속된 말로 오줌 누고 뭐 볼 틈도 없이 바빠진다. 카페 회원들에게는 비 온다고 알린 게 아니라 우리 집에서 재미있는 행사를 할 테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오라고 알렸다.

마침 현충일 연휴가 끼인 주말이라 바로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오시는 분들의 일손을 내가 받는 대신 나는 그 분들에게 자연농으로 가꾼 음식과 내가 창안한 ‘신선농법(神仙農法)’을 알려 드리기로 했다. 신선농법은 농사생활 자체가 깊은 생활명상이 되게 하는 농사법이다. 어디 농사뿐이랴. 일상생활을 깊은 명상심으로 전환할 수도 있도록 만든 것이 이 신선농법이다. 여러 해 전, 베트남의 틱낫한 스님을 따라 걷기명상을 하면서 착안했던 명상법이다.

점심 길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점심을 먹는다 ⓒ 전희식


이렇게 해서 우리 집에 오신 분들 중에 중국 사람들이 있었다. 도시의 한 인권단체에서 왔는데 한국으로 시집 와 살다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었다.

세 분 중 한 분만 재중 동포고 두 분은 한족이었다. 인권센터 도움을 받고 있는 여성이라고 하면 대뜸 한 많은 곡절들을 떠올릴 수도 있다. 미리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그 분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므로 그런 선입견을 싹 지우고 내 생애에 단 하루만 주어진 귀한 시간이라는 사실만 주목하기로 했다.

그분들은 고추밭에 줄을 매고 고추대를 묶는 일도 했고 고구마 순을 잘라 나르는 일과 콩을 심는 일도 했다. 한 분은 다리를 다쳐 목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하는 우리 곁에서 말동무 노릇을 해 주었다.

한국말에 다들 익숙하다면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놀이 명상들이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두 분은 한국말을 거의 못했다. 통역을 맡으신 분은 예순이 가까운 분으로 한국에 산 지가 7년째라고 했는데 성격도 밝고 아는 것도 많았다. 그 분의 재담이 일하는 즐거움을 더 해 주었다.

점심때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는 들판으로 점심밥을 내오는 일을 맡겼다.

하늘은 맑았고 짙푸른 산은 우리 코앞에서 서성였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따가운 햇살과 어울려 일 하는 기분을 뽀송뽀송하게 했다. 슬슬 흥이 올랐다.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중국 이야기도 했다. 통역을 맡으신 분은 중국 현대사를 잘 알고 있었다.

5.4운동도 알고 마오쩌둥의 대장정과 국공합작의 1,2차 과정도 알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 분은 60년대에 중국 홍위병이었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책과 영화에서만 보던 문화대혁명 4인방인 강청시대의 역사를 당시의 홍위병에게서 듣게 된 것이다.

한국인 남편의 구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왔는데 그 인권센터에서 결혼이민자 여성들 상담도 하고 통역까지 하는 상근활동가가 되어 남편과 법적인 관계를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중국문학, 중국영화, 중국의 경극, 특히 인기 여배우 ‘공리’와 한 때 그녀의 남편이었던 ‘장예모’ 이야기도 했다.

600여 포기의 고추들을 다 묶고 콩도 100여 평이나 심었다. 밭둑 아래에 가빠를 깔고 점심상을 차리는데 트럭에 앉아서 일하는 것을 구경하면서 농사일 자문역을 맡고 계시던 어머니가 당신 밥은 트럭으로 가져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상을 트럭 앞쪽에 다시 차렸다.

손님들이 가져 온 맥주와 막걸리를 한 잔씩 했다. 개인적으로 100일 기도를 하면서 생채식만 하는 나도 내색을 못하고 한 잔 같이 했다.

고구마를 심으려는 때에 고맙게도 하늘이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토닥토닥 떨어졌다. 일기예보가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하늘까지 돕고 있으니 우리의 농사일은 신명이 붙었다. 우리 마을의 무속인을 취재하겠다던 후배 문화예술인 한 녀석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밭으로 왔다.

내게 연락을 않고 조용히 다녀가려고 했는데 지나다 봤다면서 자동차에서 내리는데 내가 잘 아는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하시는 재야 사학자 박아무개 선생도 같이 오셨다.

우리들은 또 왁자지껄 밭둑으로 나와 이들과 함께 새참을 또 먹었다. 그 후배는 곧 중국 옌벤으로 ‘필봉 굿’ 놀이패를 이끌고 갈 것이라고 했다. 내년에는 나를 취재진으로 해서 데려가겠다고 허풍 섞인 선심을 썼다.

한 분에게로 손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잘못했다면서 이제 절대 술 안 먹고 때리지 않겠으니 집으로 돌아 와 달라는 전화라고 했다. 술을 먹고 운전하다 걸려 운전면허 정지가 되었는데 또 술 먹고 운전을 해서 완전 취소가 되었다는 분인 듯 했다. 아내를 습관적으로 때린다고 옆 사람이 귀띔을 해주었다.

목발을 짚고 오신 분은 중국에서 내과 의사였는데 한국 남편이 약간의 정신병이 있는 걸 모르고 결혼을 했는데 잦은 폭력에 시달리다 급기야는 2층집에 감금 되어 살게 되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해 창틀을 뜯고 뛰어 내려 자살을 시도했다가 허리와 다리가 부러져 치료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부슬비를 맞으며 옥수수도 심고 호박도 심었다. 일하는 것도, 이야기 하는 것도 다들 열심이었다. 하루 나들이를 나온 분들치고 매사에 열성이 깊어 보였다.

일이 일찍 끝났다.

이분들 중 한 분이 우리집에 밀가루가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밀 통밀가루가 늘 넉넉히 있다고 했더니 전통 중국만두를 만들어도 봐도 되겠느냐고 해서 좋다고 했다. 그날 저녁은 모두 아홉 사람이 저녁을 통만두와 함께 먹게 되었다. 오랜만에 대식구가 된 것이다.

밀가루 반죽을 이상하게 했다. 직경이 한 자는 될 듯싶은 큰 도넛처럼 둥그렇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반죽을 했다. 손도 빠르고 음식 솜씨도 훌륭했다. 나는 인터넷에서 중국의 최신유행가요를 온라인으로 틀어줬다. 어머니는 방과 마루에 몸을 반씩 걸치고 앉아서 이들의 만두 솜씨를 구경하셨다.

꼭 여기 만큼이었다. 센터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 한 여성이 옥상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을 겨우 저지했다는 소식이었다. 모두 사색이 되어 먹던 만두도 남기고 부랴부랴 떠나갔다.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나는 이틀 후에 읍내에 자전거를 고치러 갔다가 오토바이를 가지고 온 술 취한 중늙은이 농부를 만났다. 고장 난 자전거 냅두고 자기 오토바이를 사라고 했다. 꼭 한 달 전에 산 신품이라면서 싸게 주겠다고 했다. 중국에서 데려 온 마누라 자가용으로 사 준건데 도망갔다면서 훌쩍훌쩍 울었다.

자전거를 끌고 돌아오는 길에 밭에 들렀다. 잎사귀를 좍 펼치고 있는 새파란 고구마 순이 나를 반겼다. 어디든 땅에 닿기만 하면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고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는 질긴 생명력의 고구마. 약을 치지 않아도 병도 없는 고구마. 뿌리와 줄기와 잎까지 다 먹는 고구마.

내가 만난 사람들이 모두 이 고구마 같이 굳세기를 빌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삶이 보이는 창>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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