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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가 될 줄은 전혀 생각 못했지"

[30년 부평지킴이] 문화의거리 '남창문구' 임갑선·조광자 부부

등록|2008.06.30 15:35 수정|2008.07.01 14:25

남창문구부평 문화의 거리 안쪽에 위치한 '남창문구'. 길게 세워진 간판에는 세월의 녹이 스몄다. 이 간판도 그나마 남창상회에서 문구로 바뀐 것이다. ⓒ 김갑봉


부평 문화의 거리의 상징 조형물인 ‘징검다리’에서 구청 방향으로 한 블록 안쪽에 위치한 남창문구는 부평에서 가장 오래 된 문구점이다. 1945년 해방직후 문을 열어 지금에 이른다. 이곳 주인은 임갑선(70)·조광자(66) 부부다.

임갑선씨의 선친인 임덕용 선생이 가게 문을 열어 운영해 오다, 선생이 작고한 후 70년부터 임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지금은 동네마다 문구점이 들어서있지만, 문구점이 드물던 시절 남창문구는 부평 학생들의 보금자리였다.

“학교가 동서로 두 군데밖에 없었어. 그게 지금의 동초등학교와 서초등학교지. 그 뒤로 산곡초등학교, 남초등학교 등이 생겨났는데, 초등학교를 예서 졸업해도 당시 부평에는 중학교가 없어서 인천(주안과 동인천)으로 다녔거든. 나도 부평역에서 기차 타고 동인천역에 내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라 그 아이들이 다들 남창문구를 이용한 것이라고 보면 돼.”

임덕용 선생이 문구점을 냈을 때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라고 해야 부평지역 동서로 두 군데 정도, 한 학교의 학생 수도 다해봐야 500~600명 내외였던 때다. 때문에 문구라고 해야 노트, 연필, 도화지, 지우개 정도만이 주된 품목들이어서 이것만으로는 여의치 않아 장판과 도배를 겸했다.

“내가 다니던 동초등학교는 한국전쟁 중 유실돼 복원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수업 받을 공간이 없어서 부개동이나 신트리공원(부평4동 부평구청 옆), 산곡동에 있는 군인들이 쓰던 건물을 이용해 수업 받고 거기서 졸업도 했어. 형편이 어려우니 초등학교도 못 다닌 사람들이 많았지. 게다가 그 때는 부평보다는 계산동 일대가 더 큰 시가지였어. 부평도호부가 계양에 있었던 만큼 그곳이 중심지였거든. 부평은 산업화와 더불어 크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시장도 커지고, 학생들도 많아진 게야.”

부평에서 나고 자라 이곳에서 학교를 다닌 이들 중 남창문구를 안 거쳐 간 이가 있을까? 80년대 문구점이 급속도로 보급되기 전까지 남창문구는 부평 학생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도맡았다.

임씨와 더불어 이곳 남창문구의 또 다른 산증인은 그의 처 조광자씨다.

임갑선ㆍ조광자 부부남창문구의 주인인 임갑선(70ㆍ오른쪽)ㆍ조광자(66) 부부. 이들에게서 학용품을 사갔던 학생들 중에는 어느덧 쉰을 넘어 환갑을 바라보는 이들도 있을 터. 남창문구는 오늘도 학생들을 반갑게 반긴다. ⓒ 김갑봉


“내가 이곳 주인이 될 줄은, 그때 그 문구점 아저씨가 시아버지가 될 거라고 짐작이라도 했겠어. 꿈에도 몰랐지. 내가 작전동에서 여기로 스물셋에 시집왔어. 시집 오기 전 어렸을 적에 앨범을 살 일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한테 어디가면 싸게 살 수 있냐고 했더니 남창문구를 얘기해 주더라고. 그때 앨범이나 문구 살 때 깎아달라고 하면 싸게 해주시곤 했는데, 세상에 나중에 그 아저씨가 시아버지가 된 게야.”

조씨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기도를 한다. 남창문구를 이용하는 수많은 학생들이 공부 열심히 하고 바르게 커서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필기도구 하나가 그리 비싼 물건은 아니지만 조씨는 학생들에게 연필하나 건넬 때에도 이같은 마음을 담아 전한다.

산업화와 더불어 부평에 공단이 많이 들어서자 임씨는 공단에 입주한 기업체에 자전거로 사무용품을 납품하기도 했다.

자전거에 종이와 볼펜 등 각종 용품을 싣고 이 회사 저 회사를 방문하면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단가 자체가 비싼 품목이 아니라서 납품하던 회사가 부도라도 나면 외상값을 떼이기 일쑤였고, 그런 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남창문구는 반세기 넘는 세월 여전히 부평을 지키고 있다. 그 세월 만큼이나, 세월의 흐름 따라 남창문구도 많이 변했다. 현재 남창문구는 21세기형 만물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임씨 부부는 “이제 단순한 문구점만으로는 안 돼, 우리도 90년대 후반부터는 내부 인테리어도 하고, 팬시용품을 많이 들여다 놨어. 디지털시대라고 하니 컴퓨터 관련 용품들도 다 있어야 해. 학생들뿐 아니라 손님들이 찾는 것은 다 있어야 하거든. 간혹 없는 것이 있는데, 그런 물품은 꼭 적어뒀다가 반드시 채워두고 있어”라고 전했다.

남창문구의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건강한 모습이지만 부부가 힘에 부치는 것은 사실인지라, 부부의 두 며느리가 운영을 돕기로 했다.

묵묵하게 일하면서 부평을 지켜가고 있는 남창문구와 그곳 주인 임씨와 조씨 부부. 그들이 있는 한 부평의 학생들은 여전히 그곳에서 내일의 희망을 엮는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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