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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털 나고 처음 해본 인터넷 생중계

'아버지'라 부르며 시위참가자 설득한 교통의경에 감동

등록|2008.07.06 14:01 수정|2008.07.06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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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단체의 '맞불집회' 현장이다이 현장도 생중계를 위해 찾아갔고,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라쿤'을 밀치는 등의 과한 대처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스템 문제로 이 현장을 중계하지는 못했다. ⓒ 박형준



'무한카메라 1박2일'은 정말 우연 속에서 태어난 아이디어였다. 3일 만에 실천에 옮기기까지 <시사IN>의 노고는 엄청났을 것이다. 전해들은 바에 따르면, 주간지 기자들에게 있어 특히 주말은, 마감 이후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고 한다. 하지만, 신입기자들의 아이디어로 거리편집국이 제안돼면서, <시사IN> 기자들의 스케줄은 말 그대로 강행군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무한카메라 1박2일'이라는, 시사주간지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아이디어까지 제시돼 그것 역시 실천에 옮겨야 했으니, 그 노력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굵은 땀방울 속에서 이뤄진 '무한카메라 1박 2일'

하지만, 생중계 시스템 상의 오류가 자주 돌출되면서 짧은 준비기간은 어쩔 수 없는 한계로 다가왔다. 인터넷 생중계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 자체가 미안했을 정도였다. 짧은 준비기간 속에서 돌출되는 오류에도 불구하고, <시사IN> 기자들과 BJ '라쿤', 그리고 블로거 '몽구'의 노력은 엄청난 집중력 속에서 굵은 땀방울로 드러나고 있었다.

가장 곤란했을 때는, 프레스센터의 엘리베이터가 정지됐을 때였다. <시사IN> 고재열 기자와 블로거 'MP 4/13'은 프레스센터 18층에 위치한 전국언론노조 사무실에서 영상에 자막을 넣으면서 '아프리카'에 영상을 내보내는 일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을 크게 손을 봐야 하는 일이 벌어져 '라쿤'과 '몽구' 그리고 나는 18층을 오르락내리락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방송 자체보다 18층을 왕래하는 일이 더욱 힘들었다.

그런 엄청난 노력 끝에 밤 10시를 기해 비로소 본격적인 생중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미 시위참가자들의 행진까지 얼추 마무리된 상황이라는 것이 다소 아쉽게 느껴졌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 프레스센터 18층 전국언론노조 회의실에서 사진을 찍은 '라쿤'과 '몽구'. 18층의 계단을 모두 걸어올라온 이후였기 때문에 다소 수척해보인다. 동의없이 기사에 사진을 게재하고 있지만, 어차피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얼굴이기에 혹시 모를 그들의 항의는 과감히 무시(?)하겠다. ⓒ 박형준


순간순간 판단해 즉시 대답, 생각보다 어려웠다

'몽구(촬영)'와 '라쿤(리포팅)' 그리고 나(해설)로 구성된 1팀, 그리고 이정현 기자(촬영)와 '고대녀'로 잘 알려진 김지윤씨(리포팅) 그리고 주진우 기자(해설)로 구성된 2팀으로 각각 나뉘어져 '무한 카메라 1박2일'이 진행될 수 있었다.

교대는 2시간 단위로 이루어지면서 6시간의 생중계를 진행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도 포함돼 있던 1팀은 4시간 동안 중계를 진행했다.

재미있는 것은, '몽구'든 '라쿤'이든 '박형준'이든 제각각 혼자서 취재하거나 방송을 진행하는 것이 익숙했던 나머지, 처음에는 다소간의 엇박자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두가 진심으로 재미있게 생중계를 진행했으며 가급적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생중계로 내보내려 하면서 가급적 '다양함'을 담으려 했다.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촛불시위 참여를 위해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참가자들, 아이와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통합민주당 국회의원들, 전경버스 차벽 앞에서 '올라가자'와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팽팽하게 나누면서 토론 중인 시민들, 무대에서 태권도 공연을 선보이던 사람들, 지금 생각해보니 일일이 기억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다.

▲ 일명 '삼양산성'이다. 주변에서 음식을 파시는 분들도 오직 삼양라면만 취급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생중계 도중 행상 아주머니 한분을 인터뷰해보니 "우리도 시민들의 바람에 맞춰가면서 장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남기셨다. ⓒ 박형준



앞서 이야기했듯이, 내가 맡은 것은 해설이었다. 순간순간 상황과 인터뷰에 응해준 시민들의 이야기에 대해 즉석에서 판단을 내리면서 어찌됐든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로선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직접 시위에 참여했던 분들이나 인터넷 생중계 등을 통해 지켜본 분이라면 잘 아실 것이다. 시위참가자들은 국민MT나 다름없던 촛불시위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경찰 병력과 무리해서 대치하는 일도 없었으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저마다의 장기를 즉석에서 공연하는 말 그대로 축제 분위기였던 것이다.

나는 그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었다.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야기도 인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를 보면 말이죠. 이 사람은 정말로 영화를 즐기고 있다는 느낌, 아니 영화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 듭니다. '즐긴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시위참가자들은 시위를 '즐기고' 있습니다. 폭력이 오가는 일도 없기 때문에, 저 말도 안되는 차벽을 설치한 경찰과 대비해보면 명분까지 손에 넣었다는 것도 강조하고 싶습니다. 즐기면서 명분까지 챙긴다…. 이것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조중동'이나 이명박 정부는 자꾸 색깔공세를 내세우거나 '배후'를 찾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건강을 걱정하던 아주머니들의 목소리를 기억해봅시다. 하나같이 '살기 위해' 나왔다는 목소리 아닙니까? 말 그대로 '살기 위해' 나온 분들한테 색깔공세 내세울수록 이분들은 더욱 뭉칠 것입니다."

"전경버스 위에 올라가자는 이야기는 늘 제기된 것입니다. '명박산성' 사태 당시에도 다들 지켜보셔서 잘 아시는 일입니다. 저로서는 '올라가자'와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양쪽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즉석에서 엄청난 격론이 벌어지는 과정 그 자체가 대단하다고 봅니다."

내가 이야기했던 것들, 사실 '라쿤'의 매끄러운 리포팅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아버지'라 부르며 시위참가자 설득하는 교통의경

새벽 3시 40분경, 광화문 교보문고 인근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것을 보고 1팀은 그곳으로 달려갔다. 교통 통제를 시작하는 경찰과 도로에 주저앉아 못비키겠다고 주장하는 어느 남성을 둘러싼 현장이었다. 그 남성을 '설득'하기 위해 나선 이는 내년 4월에 제대한다는 의경이었다.

그 의경의 대처는 놀라웠다. 남성을 향해 '아버지'라 부르면서 자칫 잘못하면 험악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경쾌하게 이끌려고 노력했다. 아니, 오히려 본인도 도로에 주저앉아 시위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누는가 하면, 본인이 갖고 있던 풍선껌을 주변의 여성 시위참가자들에게 전달하기까지 했다. 생중계를 하는 와중이었지만,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그 현장을 동영상에 담았다.

의경은 "나 이러다가 징계당한다"는 '언중유골'도 남기면서, 은근하게 경찰의 애로사항을 설득력 있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고생하는 후임들의 입장도 알아달라는 이야기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다. 하지만, 대치 과정에서 감정이 격해지면서 그것을 잊는 것이다. 의경의 성숙하면서도 빛나는 대처는 시위참가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도로에 주저앉은 남성도 인도로 이끌 수 있었다. "일단 인도로 올라가서 이야기합시다"라는 것이었다.

감동을 느꼈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 의경에게 진심어린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도 충분히 해가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어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남성의 설득까지 얻어낸 것이다. '리포팅'을 하고 있는 '라쿤'으로부터 마이크를 뺏었다. 두 가지의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저 의경은 지금 '징계'를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봤을 때, 오히려 저 의경에게는 '포상휴가'가 마땅합니다. 어청수 경찰청장이 해야 할 일까지 대신했습니다. 지금 누가 경찰청장인지 되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언젠가 <오마이뉴스>에서 어느 독자가 다신 댓글이 생각납니다. 지금 기억해보자니 그 댓글의 내용이 모두 기억나지 않아 아쉬운데요. '부마 사태' 당시 시위참가자들과 대치하던 병력을 인솔하던 박일구 대령의 이야기였습니다. 박일구 대령이 부하들에게 남긴 이야기는 '시민들이 때리면 차라리 맞아라'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 이야기를 어청수 경찰청장에게 되돌려주고 싶습니다."

어청수 경찰청장, 동영상을 보여줄테니 그 의경으로부터 좀 배웠으면 좋겠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버지'라 부르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시민을 안전하게 인도로 이끌어낸 의경, 반면에 "1980년대 시위진압 방식을 동원하고 싶어진다"고 했던 어청수 경찰청장…. 내 생각이 틀린가? 경찰청장이 해야 할 일, 누가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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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참가자를 '아버지'라 부르며 대화를 나누는 교통의경 ⓒ 박형준


아침에도 '소란'이 벌어졌다

새벽 4시를 기해 생중계를 마치고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며 <시사IN> 거리편집국도 천막을 해체했다. 하지만, 나는 현장을 곧장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사람들도 많았고, 우연히 들어간 현장에서도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침 6시 30분경, 경찰이 백은종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수석 부대표를 체포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회원들의 반응은 민감했다. 기자들의 신분을 일일이 확인해가며 취재를 통제하려 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이자 <시사IN> 객원기자임을 밝히자 그들은 비로소 천막 안으로 나를 보내줬다. 상황은 심각했다.

일단, 백은종 부대표와 회원들이 반발한 이유는 그동안 받은 소환장과 그 당시의 체포영장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다. 체포영장은 나도 직접 볼 수 있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결성했다느니, '이명박 탄핵'을 외치며 선동했다느니 하는 '죄목'과 노무현 탄핵사태 당시 분신했다는 지금의 일과 관련없는 과거까지 거론해가며 체포를 시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몰려들고 회원들의 대처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경찰은 일단 돌아갔다. 백은종 부대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체포영장을 집행한다길래 천막으로 오라고 하면서까지 순순히 응했다. 하지만 막상 경찰이 가져온 체포영장을 보니 동의할 수 없었다. 왜 '노무현 탄핵' 당시의 분신했던 사실이 거론돼야 하는 것이며, '탄핵 주장'까지 뒤집어씌워가면서 나를 체포하려 하더라. 약속과 다르다. 그래서 동행을 거부했다.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보아하니 이것저것 다 묶어서 내 죄를 무겁게 하려고 한다. 내가 모든 것을 선동했다는 식으로 몰고 있다."

씁쓸했다. '노무현 탄핵' 당시의 일이 왜 지금 거론돼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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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내용 다른' 체포영장에 항의하는 백은종 부대표와 회원들 ⓒ 박형준


생전 처음 해본 생중계, 국민은 무섭다

새삼스레 종교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보냈다. 시위참가자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본연의 축제 분위기를 이끌어내기까지 종교인들의 노력도 큰 힘이 됐다. 그리고 그 큰 힘을 바탕으로 이명박 정부에 무엇보다 큰 경고를 날린 시민들, 경의를 표하고자 한다. 생중계 내내 벅찬 감동을 느꼈다.

다음 주말까지, 공은 다시 이명박 정부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강만수 재정기획부 장관이 '대운하'를 운운한 것으로 봐선 이명박 정부가 태도를 바꾸는 일을 보기란 어려울 것 같아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시민들은 살기 위해 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그 분노의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축제를 이끌려 하고 있다. 웹 2.0을 넘어 3.0까지 거론되는 시대, 시민들은 그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지금 뭘 하고 있는가? 그 자문 속에서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부디 국민의 무서움을 기억하길 바란다.

▲ '다인아빠'의 밥차 주변 천막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다인아빠'를 돕던 어느 자원봉사자는 내게 "이명박 대통령은 헌법 전문에서 이야기하는 바를 하나도 지키지 않는다"면서 뜻깊은 이야기를 남겼다. ⓒ 박형준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미디어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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