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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몰래 한 사랑'이 아름다워

전남 함평 박만순 할머니 날품 팔아 번 돈 500만원 쾌척

등록|2008.07.06 17:34 수정|2008.07.06 17:34

▲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형편이지만 아끼고 또 아껴서 모은 돈 500만원을 마을의 시정 건립비용으로 내놓은 박만순 할머니가 그 돈으로 지은 시정에 앉아 활짝 웃고 있다. ⓒ 이돈삼


전남 함평군 함평읍 양림마을에 사는 89세 박만순 할머니. 박 할머니는 남편은 물론 자식 둘까지 모두 잃었다. 벌써 40년 전 일이다.

논밭도 한 뼘 없다. 시쳇말로 혼자 사는 노인으로 기초생활수급대상자다. 수입이라곤 정부에서 나오는 약간의 지원금이 전부다. 농촌일손이 부족한 농번기 때나 구부러진 허리를 이끌고 밭일을 거들면서 날품을 팔아 근근이 생활하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형편이지만 할머니는 아끼고 또 아꼈다. 그렇게 모은 돈 500만원을 지난해 마을회관 건립비용으로 내놓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할머니가 정 붙이고 살아온 마을과 마을사람들을 위한다는 생각에 주저하지 않았단다. 오히려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아침부터 기다렸소. 오늘 선상(선생) 핑계대고 하루 쉴라고…. 한번씩 노는 날도 있어야제, 어떻게 날마다 일만 하고 산다요. 요새 들어 한 나절만 쉬면 쓰것다 했는디, 마침 선상 양반이 핑계거리를 만들어 줘 고맙소.”
한번 찾아가겠다는 말에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와 겨우 약속시간을 정하고 마을에서 만난 박 할머니의 얘기다. 할머니와의 만남은 지난 1일 최근 마을 입구에 세워진 시정에서 이뤄졌다. 다짜고짜 마을에 큰 돈을 선뜻 내놓은 이유를 물었다.

“힘들게 일했응께 같이 써야제. 내가 자식도 없고 남편도 없고 혼자 살아왔어. 마을 사람들이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왔것소. 마을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아야제.”

진한 정이 묻어나는 말이다. 박 할머니에게 마을 주민들은 가족이나 다름없었단다. 평생을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남기고 싶었다는 게 할머니의 생각이었다고. 그러면서도 마을 일을 거들 수 있도록 배려해 준 동네사람들이 고맙다고 했다.

“모아두면 뭐 할거여. 저승 갈 때 짊어지고 갈 것도 아닌디, 나 죽으면 마을 사람들이 초상까지 다 치러 줄 것인디. 내가 가진 것 다 주고 떠나도 미안하기만 하제.”

▲ 박만순 할머니 등으로 건립된 양림마을 시정. 마을 입구에 들어선 시정은 동네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 이돈삼

박 할머니의 하루는 동이 틀 무렵 시작된다.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어두컴컴해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다반사다. 콩밭으로, 깨밭으로, 또 딸기밭으로 이렇게 들녘에서 하루 14시간 넘게 일하고 받은 품삯은 2만5000원에서 3만 원선이라고.

“나이 들어서 이젠 밭일도 힘들어. 그래도 이게 어디여! 나 같은 늙은이도 할 일이 있으니 말이여! 그라고 일할 사람이 없응께, 나 같은 늙은이라도 밭에 나가 조금이라도 도와야제.”

박 할머니의 말은 우리 농촌의 현주소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할머니의 건강이 아직은 좋다는 것. 할머니 말대로 “가진 건 없어도 건강 하나 만큼은 타고 났다”는데 위안을 받는다. ‘몰래 한 사랑’이 더 아름답다는 게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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