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가도 동굴에 첨벙! 요거트 하우스에 풍덩!
좌충우돌 필리핀 출사 원정기 - ④
오전 5시. 드디어 우릴 태운 지프니가 본톡으로 출발한다. 오늘은 본톡의 이푸가오 박물관을 갔다가 사가다 동굴을 탐험해야 한다. 어제에 이은 대장정이었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할 요량으로 지프니를 세웠다. 필리핀은 아무리 산골이라도 휴게소 개념이 철저했다. 한두 시간쯤 달리면 반드시 상점과 C.R(comfort room, 화장실) 표시를 살펴볼 수 있다. 참 다행스런 일이란 건 그 다음날 장미를 통해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여하튼 큰 형님은 시간 때문에 빵을 사 가지고 지프니에서 먹길 원했으나, 장미를 필두로 한 팀원들의 반란(?)으로 결국 현지 컵라면을 먹게 됐다.
"형님 어떤 라면이 맛있어요? 어떤게 얼큰해요?"
큰 형님께 쇄도하는 질문! 큰 형님은 그냥 웃고 만다.
필리핀 라면은 우리 라면처럼 얼큰하지 않다. 기름이 둥둥 떠다니지만 생각보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난다. 면은 우리나라의 라면과 비슷하다. 큰 형님은 해장할 때 가끔 필리핀 라면을 찾는다고 하셨다.
오전 9시. 본톡 박물관(이푸가오족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에 도착했다. 이푸가오 족은 라이스 테라스를 탄생시킨 장본인들로서 현재 필리핀공화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들 특유의 문화와 관습법을 갖춘 독립부족이다. 이들의 탄생과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보기 좋게 전시해놓은 곳이 바로 이푸가오 박물관이었다.
다들 박물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난 옆에 유치원과 학교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필리피노 선생님들은 당연히 내가 달가울리 없었다.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와서 자신들의 수업을 방해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에. 하지만 아이들은 나의 카메라를 보자 무한 애정을 퍼부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포즈를 취하는 아이, 나를 툭치고 도망가는 아이, "포토! 포토!"를 외치는 아이, 쑥쓰러워 도망가는 아이까지. 그 천진난만함에 취해서 어느 새 공터 한 가운데서 아이들과 뛰어노는 나. 참 철없는 젊은이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 사진기 하나로 수많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함께할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맑고 티없는 웃음을 보았는가. 자유롭게 뛰놀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겐 없는 것만 같아 너무 가슴 아팠다.
오전 11시. 우린 사가다로 드디어 입성했다. 여긴 메트로 마닐라를 벗어난 뒤 맞는 가장 큰 도시였다.
"형님, 여기 대도시 맞죠? 어! 여기 병원도 있고 상점도 무지 많아요!"
"너 여기 촌놈 다 됐구나!"
바보같은 젊은이는 그래봤자 촌인 동네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린 그림 같은 풍경에 아기자기한 모습을 가진 세인트 조셉 호텔에서 묵기로 결정했다.
그나저나 점심 때가 되자 창성 형님의 체력이 급격하게 고갈되고 있었다. 어제 산행의 피로가 다시금 밀려오고 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음식을 호텔로 시켜먹기에 이르렀다. 이번엔 현지 닭고기의 향연. 우리나라의 양념통닭 같은 것과 훈제통닭 같은 것이 차례로 선보이고 찰진 밥과 알찬 감자가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에러라면 음식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수시로 우리의 몸을 타고 오르려고 했던 것! 일행 중 고양이에 관심있는 이는 없었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우리는 사가다로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물에 빠진채로 동굴 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전정보를 입수한 우리는 물에 젖는 옷과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한 방수팩, 그리고 샌들 및 아쿠야슈즈를 장착한 채 당당하게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현지 가이드 두 명(필리핀 법적으로 동굴에 들어갈 때 3명에 1명씩 가이드를 붙여야 한다. 안 붙이면 절대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 위험해서)을 구하고 밴을 탄 채 동굴입구로 이동했다.
도착한 동굴 입구. 입구 앞 기념품 가게엔 한글로 '샤워가능'이란 글씨가 붙어있었다. 동굴탐험을 시작하면 박쥐똥에 범벅, 물에 범벅되니 나와서 샤워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 갑자기 장미 얼굴에 근심이 한가득이다.
우리 일행은 용감하게 사가다 동굴로 첫발을 내딛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무지막지하게 웅장한 동굴, 갈수록 들리는 박쥐의 "찍찍" 소리. 난 용감하게도 짦은 영어를 들이밀면서 가이드와 대화를 시도했고, 놀랍게도 짧은 한국말로 응수하는 그의 재치에 흠뻑 빠져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근데 조금 내려가니 퀘퀘한 냄새와 놀랍도록 미끄러운 돌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문제는 급경사 내리막 길이며, 수많은 돌로 이루어져 걷길 포기하라는 듯한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뒤에 따라오는 일행들은 벌써부터 난리가 아니었다. 평지에선 누구보다도 나르듯이 일행의 선두에서 걸어나가는 장미, 역시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에 약한 모습을 보였고, 창성 형님은 이미 장비를 현지 가이드에게 모두 줘버린 뒤였다. 역시 큰 형님과 훈 형은 그 둘을 챙기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박쥐똥 범벅인 바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내려가는 길. 이미 미끄러운 돌에 한 두 번씩 춤을 추고 땀과 물기가 뒤범벅되어 몸에서 연기(열기로 인한 김)를 뿜어내고 있었다. 1시간쯤 내려왔을까. 갑자기 가이드는 신발을 벗으라고 한다. 더불어 양말도.
"여기서부턴 맨발로 가야되요. 그래야 갈 수 있어요!"
그렇다. 미끄러워서 맨발로 가야만 했다. 그나저나 사가다 동굴, 사가다 동굴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매끈한 돌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조각들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초콜릭 케이크, 각종 동물 모양, 사람 형태의 동상 바위까지…. 램프의 노란 불빛과 묘하게 맞는 이 분위기.
이 어두운 곳에서 모두 사진찍을 능력이 안됐지만, 창성 형님은 어느샌가 기운을 차리고 특유의 수치를 계산하여 카메라의 동굴을 담기 시작했다. 형님은 사진을 찍을 포인트에 초인적인 기력을 발휘하는 게 틀림 없었다. 아마도 사진기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잠깐 쉬고 다시 출발한 우리들. 이제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곳이 나오고 뛰어 내려하는 곳이 나오고 물에 들어가야 하는 곳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팀의 사정을 고려한 가이드는 쉬운 코스로 우리를 인도했고, 다행히 물이 목까지 잠기는 코스는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미끄럼과 암벽 등반 비슷한 체험을 한 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게 됐다.
목적지, 아치형의 동굴 모습에 삼엽충 비슷한 화석들이 동굴 내부에 박혀있어 이곳이 예전에 지표면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줬다. 거기에 바나우에의 라이스 테라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형 바위와 슈크림으로 문질러논듯한 미끄러운 돌들까지. 그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동굴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감상은 그만, 동굴 입구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샌가 산소녀는 가이드를 앞질러 선두에 서 있고 뒤에선 창성 형님의 탄식소리가 들린다. 암벽 등반하듯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는 곳을 지나서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간다.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 맨발에 닿는 시원한 동굴 암반수의 느낌이 제법 좋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잠시, 또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어느새 신발을 신어야 하는 곳까지 올라왔다. 우리가 올라오는 속도는 제법 빨랐지만 먼저 올라간 이들을 따라잡았다. 역시, 놀랄만큼 빠른 적응력을 보이는 우리 팀. 슬슬 여유가 생기는지 나부터가 아까본 초콜릿 케이크 바위 앞에 가서 먹는 시늉을 하고 있다.
신발을 벗었을 때가 얼마나 편했는지는 딱 지금부터 알게 됐다. 박쥐똥 때문에 미끄러워서 였을까. 웬만하면 미끄러지지 않던 아쿠아슈즈도 미끌거리고 '슥슥' 미끄러지는 소리가 앞 뒤로 울린다.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 놀랄만큼 펼쳐진 계단에 장미가 절망한다. 난 쉼 없이 올라가는 게 중요하다고 장미를 독려하고 산소녀는 이미 동굴 입구에서 쉬고 있었다.
밴을 타고 돌아온 숙소, 흙범벅이 된 옷을 벗어두고 간만에 온수샤워를 시도했다. 몸에 피로가 싹 풀리는 듯한 기분, 사가다가 나름 발전한 도시지만 산중이라서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오후 7시. 우리는 시내 구경도 할 겸, 저녁도 먹을 겸 호텔을 벗어나 거리로 내려왔다. 장미는 사가다의 '요거트하우스'는 반드시 가야 한다며 일행을 이끌었다. 그녀는 식당 메뉴판 앞에서 놀랄만한 신기를 발휘하며 우리를 환상적인 음식으로 이끌곤 했는데 이번 선택은 필리핀 일정 중 가히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무조건 많이 시켜요!"
어느 새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카레와 만난 치킨, 각종 야채, 마늘밥, 허브밥, 스파게티, 튀긴 족발…. 한 상 가득 나온 음식을 쉼 없이 소화하면 다른 음식이 또 상을 점령한다. 한국 본토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챙겨온 컵라면은 얼굴을 들이밀지도 못했다. 왜? 여기 음식이 끝내줬거든.
일단 카레와 만난 치킨은 전혀 느끼하지 않으면서 매콤한 맛이 일품! 각종 채소의 상큼함은 어쩔거야. 마늘밥과 허브밥은 우리나라의 볶음밥과 비슷한데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며 담백했다. 거기에 찰지고 부드러운 쌀은 누가 필리핀 쌀을 날린다고 했냐고 반문할 정도 였다. 스파게티는 걸쭉한 요거트 소스가 덧붙여진듯 했는데 수타로 민 칼국수 같은 굵은 면발은 특유의 쫀뜩쫀뜩함으로 날 사로잡았다. 이 모든 음식이 우리 입에 맞았던 건 느끼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음식의 향연, 하지만 끊임없이 손이가는 음식들. 난 볶음밥과 스파게티를 한국에서도 잘 먹지 않는다. 특유의 느끼함을 속이 못 견디기 때문. 여기선 끊임없이 먹는다. 속에서 욕 할정도로!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요거트가 나왔다. 껄쭉함 속에 숨겨진 상큼함, 한국에는 묽은 요거트밖에 없다며 장미와 산소녀는 연방 숟가락질을 하고 큰 형님은 필리핀에 와서 먹은 음식점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며 요거트 하우스를 극찬하기에 이른다.
창성 형님은 묵묵히 스퍼트를 내시고, 훈 형은 산소녀와 함께 돈 있으면 한국 가서 요거트 프랜차이즈를 할 것이라 당당하게 포부를 밝힌다.
그나저나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요거트, 하지만 우리는 요거트를 모두 해치우고 요거트 하우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영수증 한가득 우리가 먹은 음식들이 나열되있다. 놀라운 건 6명이 먹은 이 많은 음식이 1710페소, 한국 돈으로 42000원 정도, 한 사람당 7천원 꼴이었다는 소리다.
그렇게 보낸 필리핀에서의 하루, 내일 일정을 위해 우리는 모두 일찍 잠들어야 했다. 내일도 오전 4시에 일어나야 했기에!
이제 필리핀에서 남은 기간은 하루 남짓, 내일은 또 어떤 추억이 기다리고 있을런지 자못 궁금해진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할 요량으로 지프니를 세웠다. 필리핀은 아무리 산골이라도 휴게소 개념이 철저했다. 한두 시간쯤 달리면 반드시 상점과 C.R(comfort room, 화장실) 표시를 살펴볼 수 있다. 참 다행스런 일이란 건 그 다음날 장미를 통해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형님 어떤 라면이 맛있어요? 어떤게 얼큰해요?"
큰 형님께 쇄도하는 질문! 큰 형님은 그냥 웃고 만다.
▲ 필리핀 라면의 모습, 맵지 않고 짭쪼름하며 담백한 맛이 난다. ⓒ 고두환
필리핀 라면은 우리 라면처럼 얼큰하지 않다. 기름이 둥둥 떠다니지만 생각보다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난다. 면은 우리나라의 라면과 비슷하다. 큰 형님은 해장할 때 가끔 필리핀 라면을 찾는다고 하셨다.
▲ 본톡 박물관, 라이스 테라스를 일군 이푸가오족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 고두환
오전 9시. 본톡 박물관(이푸가오족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에 도착했다. 이푸가오 족은 라이스 테라스를 탄생시킨 장본인들로서 현재 필리핀공화국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들 특유의 문화와 관습법을 갖춘 독립부족이다. 이들의 탄생과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보기 좋게 전시해놓은 곳이 바로 이푸가오 박물관이었다.
다들 박물관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난 옆에 유치원과 학교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필리피노 선생님들은 당연히 내가 달가울리 없었다.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와서 자신들의 수업을 방해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에. 하지만 아이들은 나의 카메라를 보자 무한 애정을 퍼부으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 천진난만한 필리피노 아이들 ⓒ 고두환
포즈를 취하는 아이, 나를 툭치고 도망가는 아이, "포토! 포토!"를 외치는 아이, 쑥쓰러워 도망가는 아이까지. 그 천진난만함에 취해서 어느 새 공터 한 가운데서 아이들과 뛰어노는 나. 참 철없는 젊은이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 사진기 하나로 수많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고 함께할 수 있었는데 너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맑고 티없는 웃음을 보았는가. 자유롭게 뛰놀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아이들에겐 없는 것만 같아 너무 가슴 아팠다.
오전 11시. 우린 사가다로 드디어 입성했다. 여긴 메트로 마닐라를 벗어난 뒤 맞는 가장 큰 도시였다.
"형님, 여기 대도시 맞죠? 어! 여기 병원도 있고 상점도 무지 많아요!"
"너 여기 촌놈 다 됐구나!"
▲ 사가다 '세인트 조셉 호텔' ⓒ 고두환
그나저나 점심 때가 되자 창성 형님의 체력이 급격하게 고갈되고 있었다. 어제 산행의 피로가 다시금 밀려오고 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음식을 호텔로 시켜먹기에 이르렀다. 이번엔 현지 닭고기의 향연. 우리나라의 양념통닭 같은 것과 훈제통닭 같은 것이 차례로 선보이고 찰진 밥과 알찬 감자가 우리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에러라면 음식 냄새를 맡은 고양이가 수시로 우리의 몸을 타고 오르려고 했던 것! 일행 중 고양이에 관심있는 이는 없었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우리는 사가다로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물에 빠진채로 동굴 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사전정보를 입수한 우리는 물에 젖는 옷과 카메라를 보호하기 위한 방수팩, 그리고 샌들 및 아쿠야슈즈를 장착한 채 당당하게 호텔을 나섰다.
우리는 현지 가이드 두 명(필리핀 법적으로 동굴에 들어갈 때 3명에 1명씩 가이드를 붙여야 한다. 안 붙이면 절대 동굴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왜? 위험해서)을 구하고 밴을 탄 채 동굴입구로 이동했다.
도착한 동굴 입구. 입구 앞 기념품 가게엔 한글로 '샤워가능'이란 글씨가 붙어있었다. 동굴탐험을 시작하면 박쥐똥에 범벅, 물에 범벅되니 나와서 샤워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리. 갑자기 장미 얼굴에 근심이 한가득이다.
우리 일행은 용감하게 사가다 동굴로 첫발을 내딛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무지막지하게 웅장한 동굴, 갈수록 들리는 박쥐의 "찍찍" 소리. 난 용감하게도 짦은 영어를 들이밀면서 가이드와 대화를 시도했고, 놀랍게도 짧은 한국말로 응수하는 그의 재치에 흠뻑 빠져서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근데 조금 내려가니 퀘퀘한 냄새와 놀랍도록 미끄러운 돌 길이 펼쳐지고 있었다. 문제는 급경사 내리막 길이며, 수많은 돌로 이루어져 걷길 포기하라는 듯한 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는 사실.
뒤에 따라오는 일행들은 벌써부터 난리가 아니었다. 평지에선 누구보다도 나르듯이 일행의 선두에서 걸어나가는 장미, 역시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에 약한 모습을 보였고, 창성 형님은 이미 장비를 현지 가이드에게 모두 줘버린 뒤였다. 역시 큰 형님과 훈 형은 그 둘을 챙기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박쥐똥 범벅인 바위를 손으로 문지르며 내려가는 길. 이미 미끄러운 돌에 한 두 번씩 춤을 추고 땀과 물기가 뒤범벅되어 몸에서 연기(열기로 인한 김)를 뿜어내고 있었다. 1시간쯤 내려왔을까. 갑자기 가이드는 신발을 벗으라고 한다. 더불어 양말도.
"여기서부턴 맨발로 가야되요. 그래야 갈 수 있어요!"
그렇다. 미끄러워서 맨발로 가야만 했다. 그나저나 사가다 동굴, 사가다 동굴 하는 이유가 있었다. 매끈한 돌들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조각들은 내 눈을 사로잡았다. 초콜릭 케이크, 각종 동물 모양, 사람 형태의 동상 바위까지…. 램프의 노란 불빛과 묘하게 맞는 이 분위기.
이 어두운 곳에서 모두 사진찍을 능력이 안됐지만, 창성 형님은 어느샌가 기운을 차리고 특유의 수치를 계산하여 카메라의 동굴을 담기 시작했다. 형님은 사진을 찍을 포인트에 초인적인 기력을 발휘하는 게 틀림 없었다. 아마도 사진기가 망가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쓰러질지도 모르지만.
잠깐 쉬고 다시 출발한 우리들. 이제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곳이 나오고 뛰어 내려하는 곳이 나오고 물에 들어가야 하는 곳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행히 우리 팀의 사정을 고려한 가이드는 쉬운 코스로 우리를 인도했고, 다행히 물이 목까지 잠기는 코스는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 시간을 미끄럼과 암벽 등반 비슷한 체험을 한 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게 됐다.
▲ 사가다 동굴 내부의 모습 ⓒ 이창성
목적지, 아치형의 동굴 모습에 삼엽충 비슷한 화석들이 동굴 내부에 박혀있어 이곳이 예전에 지표면이었음을 가늠할 수 있게 해줬다. 거기에 바나우에의 라이스 테라스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모형 바위와 슈크림으로 문질러논듯한 미끄러운 돌들까지. 그 장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하니 동굴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감상은 그만, 동굴 입구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샌가 산소녀는 가이드를 앞질러 선두에 서 있고 뒤에선 창성 형님의 탄식소리가 들린다. 암벽 등반하듯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는 곳을 지나서 밧줄을 타고 절벽을 올라간다. 송글송글 맺히는 땀방울, 맨발에 닿는 시원한 동굴 암반수의 느낌이 제법 좋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잠시, 또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
어느새 신발을 신어야 하는 곳까지 올라왔다. 우리가 올라오는 속도는 제법 빨랐지만 먼저 올라간 이들을 따라잡았다. 역시, 놀랄만큼 빠른 적응력을 보이는 우리 팀. 슬슬 여유가 생기는지 나부터가 아까본 초콜릿 케이크 바위 앞에 가서 먹는 시늉을 하고 있다.
신발을 벗었을 때가 얼마나 편했는지는 딱 지금부터 알게 됐다. 박쥐똥 때문에 미끄러워서 였을까. 웬만하면 미끄러지지 않던 아쿠아슈즈도 미끌거리고 '슥슥' 미끄러지는 소리가 앞 뒤로 울린다. 동굴 입구에 다다랐을 때 놀랄만큼 펼쳐진 계단에 장미가 절망한다. 난 쉼 없이 올라가는 게 중요하다고 장미를 독려하고 산소녀는 이미 동굴 입구에서 쉬고 있었다.
밴을 타고 돌아온 숙소, 흙범벅이 된 옷을 벗어두고 간만에 온수샤워를 시도했다. 몸에 피로가 싹 풀리는 듯한 기분, 사가다가 나름 발전한 도시지만 산중이라서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오후 7시. 우리는 시내 구경도 할 겸, 저녁도 먹을 겸 호텔을 벗어나 거리로 내려왔다. 장미는 사가다의 '요거트하우스'는 반드시 가야 한다며 일행을 이끌었다. 그녀는 식당 메뉴판 앞에서 놀랄만한 신기를 발휘하며 우리를 환상적인 음식으로 이끌곤 했는데 이번 선택은 필리핀 일정 중 가히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무조건 많이 시켜요!"
어느 새 음식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카레와 만난 치킨, 각종 야채, 마늘밥, 허브밥, 스파게티, 튀긴 족발…. 한 상 가득 나온 음식을 쉼 없이 소화하면 다른 음식이 또 상을 점령한다. 한국 본토의 감동을 느끼기 위해 챙겨온 컵라면은 얼굴을 들이밀지도 못했다. 왜? 여기 음식이 끝내줬거든.
일단 카레와 만난 치킨은 전혀 느끼하지 않으면서 매콤한 맛이 일품! 각종 채소의 상큼함은 어쩔거야. 마늘밥과 허브밥은 우리나라의 볶음밥과 비슷한데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며 담백했다. 거기에 찰지고 부드러운 쌀은 누가 필리핀 쌀을 날린다고 했냐고 반문할 정도 였다. 스파게티는 걸쭉한 요거트 소스가 덧붙여진듯 했는데 수타로 민 칼국수 같은 굵은 면발은 특유의 쫀뜩쫀뜩함으로 날 사로잡았다. 이 모든 음식이 우리 입에 맞았던 건 느끼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음식의 향연, 하지만 끊임없이 손이가는 음식들. 난 볶음밥과 스파게티를 한국에서도 잘 먹지 않는다. 특유의 느끼함을 속이 못 견디기 때문. 여기선 끊임없이 먹는다. 속에서 욕 할정도로!
▲ 요거트 하우스의 '요거트!', 걸쭉하면서 상큼한게 특징이다 ⓒ 고두환
창성 형님은 묵묵히 스퍼트를 내시고, 훈 형은 산소녀와 함께 돈 있으면 한국 가서 요거트 프랜차이즈를 할 것이라 당당하게 포부를 밝힌다.
그나저나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요거트, 하지만 우리는 요거트를 모두 해치우고 요거트 하우스를 벗어나고 있었다. 영수증 한가득 우리가 먹은 음식들이 나열되있다. 놀라운 건 6명이 먹은 이 많은 음식이 1710페소, 한국 돈으로 42000원 정도, 한 사람당 7천원 꼴이었다는 소리다.
그렇게 보낸 필리핀에서의 하루, 내일 일정을 위해 우리는 모두 일찍 잠들어야 했다. 내일도 오전 4시에 일어나야 했기에!
이제 필리핀에서 남은 기간은 하루 남짓, 내일은 또 어떤 추억이 기다리고 있을런지 자못 궁금해진다.
덧붙이는 글
위 기사는 '필리핀 관광청'과 '야후'가 함꼐하는 '코닥 사진 원정대'의 후원으로 작성됐으며 casto와 푸타파타의 세상바라보기(http://blog.daum.net/casto)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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