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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 우리는 일본을 너무 모른다

내가 경험한 일본...그들은 과거를 반성할 생각이 없다

등록|2008.07.16 10:03 수정|2008.07.16 18:10
주일 대사의 수모

초복 나흘 전인데도 무더위가 대단하다.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잠시 뉴스를 보는데 더 열을 받았다.

내용인즉 '권철현 주일 대사가 고무라 마사히코 일본 외상을 만나 최근 일본 정부가 중학교 신 학습지도요령 사회과 해설서에 독도를 자국 영토로 기술한데 대해 강력히 항의할 예정이었으나, 고무라 외상은 시간이 나지 않는다며 만남을 거부하여 대신 야부나카 미토지 외무성 사무차관을 만나 '일본 정부의 이번 조치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는 한국 정부의 노력에 반하는 아주 유감스러운 조치'라며 '독도와 관련된 내용을 즉각 삭제하라'고 촉구했다는 보도였다.

이 중요한 시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사가 외상을 만나지도 못하고 홀대로 사무차관을 만나고 울분을 토하는 모습은 바로 이명박 정부의 모습이요,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모습이기에 산골서생도 분함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흔히 우리나라와 일본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한다. 이 말은 참으로 명언이다. 실제로 부산 태종대에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일본의 대마도가 가물가물 보이고, 인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 두세 시간 이내에 일본의 어느 공항에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에 대해 잘 모른다.

그동안 우리에게 일본은 가까이 하기에는 싫은 나라로, 예로부터 왜구, 왜놈, 쪽발이 등 좋지 않은 비어를 써가면서까지 가능한 멀리 하거나 애써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유사 이래 왜구들이 무시로 우리나라 삼남지방을 노략질하여 왔으며, 특히 1592년부터 7년 동안의 임진왜란·정유재란과 1910년부터 35년간의 일제 식민지 시대의 뼈저린 아픔이 우리들 마음속에 깊은 상흔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학도병, 징용, 정신대, 신사참배… 이런 얘기만 들어도 일본은 이웃나라인 우리를 못살게 했던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원수의 나라로 여겼다.

약한 자에 무자비한 일본인

나는 최근 10여 년 항일에 대하여 공부하고 답사하면서 왜 일본이 우리를 괴롭혔는지 그 실체를 골똘히 살펴 보았다. 여러 책도 보고, 네 차례나 일본 현지 역사 현장을 답사하기도 하고, 일본인을 만나기도 하고, 일본을 가르치는 교수도 학생도 만나 귀를 열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

흔히 일본인들은 혼네(실제 속내)와 다테마에(겉으로 드러내는 모습)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좀처럼 그들의 진심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겉으로 드러나는 일본인의 친절성을 보고 거기에 꼬박 넘어가 망신하는 꼴을 당하기 십상이다. 바로 이명박 정부가 이번에 당한 예다.

일본은 이명박 정부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가자는 새로운 한일관계 정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명박 정부를 아주 우스운 아마추어 정부로 알고서 이때를 기회로 독도를 제 나라 영토로 기정사실화하려는 절호의 기회로 삼을 속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일본을 너무 몰랐다. 그리고 한일 간 뼈저린 지난 100여 년간의 역사에도 무지한 것 같다.

▲ 13도 창의군 군사장 허위 선생 ⓒ 박도

솔직히 나도 일본을 잘 몰랐다. 3년 전, 한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한 편을 같이 제작하자는 제의를 받고, 마침 서대문형무소에서 제1호로 교수형을 당한 구한말 13도 창의군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후손과 당시 왕산 선생을 형장으로 내몰았던 일본 헌병대장 아카시(明石) 후손과 세기를 뛰어넘는 화해의 만남을 기획하고는 이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곧 암초에 걸린 것은 담당 방송국 피디가 애써 도쿄까지 가서 아카시 후손을 찾았으나 그의 생각이 100년 전 자기 할아버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100년이 지났으니 피해자 후손(왕산 후손)은 용서해 주겠다는 데도 가해자 후손은 사과할 진정성이 보이지 않았기에 애초의 기획을 바꿔 <왕산가 사람들(EBS)>로 완성한 바가 있었다.

1908년 5월, 일본 헌병 40명이 경기도 연천 유동에 은거 중인 왕산 선생을 포위하여 서대문감옥으로 압송하자 헌병대장 아카시가 직접 심문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왜 의병을 일으켰는가?"
"일본이 한국을 보호한다고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고, 실상은 한국을 없애버릴 계획을 품었기에 우리들은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당랑(螳螂 버마제비)이  도끼를 들어 수레를 막듯이, 힘에 벅찬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대하는 것은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지체를 쓰다듬을 때에 비록 한 차례 고통이 있어도 마침내 병자를 낫게 하는 것이다."

아카시 후손을 만난 피디는 나에게 "그는 일왕과 가까운 이로 아직도 귀족 대우를 받고 있으며, 굳이 자기가 먼저 한국 땅에 와서 사죄하기를 꺼렸다"고 했다. 나는 그것이 현재 일본 지배층(우익)의 본마음으로 그동안 사죄니, 사과는 입에 발린 말이고, 그네들 속마음은 일백년 전 한국을 병탄할 때와 크게 다름이 없다는 것을 그 일로 깨달았다.

▲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 서대문독립공원


국토를 잃고 난 뒤에 찾기는 매우 힘들다

한일관계는 우리와 일본간 힘의 균형이 비슷하거나, 우리가 강할 때 친선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의 국력이 약할 때는 그들은 고양이처럼 숨겨놓은 발톱을 꺼내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야욕을 늘 지니고 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다. 나는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보고 참 우리 백성들은 나라의 지도자를 잘못 뽑았다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나라나 국토를 잃고 난 뒤에 다시 찾기는 매우 힘들다. 지난 역사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나라가 파탄난 뒤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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