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화가 '샤라쿠'는 신윤복이었다?
[서평] 총 대신 붓 든 조선시대 첩자들의 세계 <색,샤라쿠>
▲ <색,샤라쿠> 겉그림 ⓒ 레드 박스
'김홍도가 아니고 신윤복이 샤라쿠? 어떻게 신윤복이 샤라쿠일 수 있다는 거야?' <색, 샤라쿠>(레드박스 펴냄)를 향해 물었다. 책의 띠지에 '도슈샤이 샤라쿠는 조선의 신윤복이다?'라고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샤라쿠가 남긴 작품은 140여 점. 샤라쿠가 종적을 감춘 이후 200여 년 동안 마네, 모네, 드가, 고흐 등 서양의 수많은 화가들이 샤라쿠의 영향을 받는다.
당시 일본에는 가부키(일종의 연극)가 성행했다. 가부키 배우들의 그림을 판화로 찍어 판매하는 전문 출판업자까지 있었다. 어린 소년들부터 나이든 사람까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가부키 배우들의 그림을 구매하고 좋아했다.
그런데 대부분 화가들이 가부키 배우들을 단지 '예쁘고 멋있게'만 그렸다. 이런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샤라쿠는 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묘사해 그림만으로도 그 사람의 성격과 배역을 연상할 수 있게 했다.
불꽃처럼 활동하다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전설의 화가
샤라쿠의 인물 목판화는 이제까지 일본의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한 그런 인물화였다.
일본은 그동안 샤라쿠를 주목해 연구했다. 연구서만도 100여 종이 출판될 정도였다. 하지만 여전히 출신지와 생몰연대 등은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샤라쿠의 정체'에 대해 가장 믿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한일 사학자 이영희 교수다.
이영희 교수는 <또 한사람의 샤라쿠>(1998)라는 책에서 당시 정조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던 김홍도가 일본에 첩자로 건너가 화가로 위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책에서 김홍도가 샤라쿠였을 근거들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하지만, <색, 샤라쿠>는 '김홍도가 아닌 신윤복이 샤라쿠'라고 가정한다. 많은 이들이 공공연히 김홍도가 샤라쿠라고 알고 있는데 저자는 감히 신윤복이 샤라쿠라고 가정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처음에는 단원이 연풍현감 재임 당시 일본에 건너가 샤라쿠라는 풍속화가로 활동했다는 가설을 토대로 소설을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단원과 관련된 자료들을 연구하다 보니 이미 50대에 접어든 그가 그처럼 떠들썩하게 활동하면서 과연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혜원 신윤복이 단원의 그림을 굉장히 많이 모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록에는 없지만 사제지간이었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혜원이야말로 샤라쿠와 그림의 성향이나 소재가 비슷해보였다. 나는 혜원이 샤라쿠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고, 이 생각은 여러 미술 사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확신으로 굳어졌다." - 저자의 말
가권(신윤복)은 도화서 화사로서 어진을 그리는 자리에 나가게 되는데 출세를 염두에 두고 왕의 눈에 띄고자 전전긍긍하던 중 무례한 죄를 짓고 김홍도가 현감으로 있는 연풍현으로 보내진다. 뛰어난 화공이자 연풍 현감인 김홍도는 정조의 밀명을 받아 연풍의 지리를 이용해 일본으로 보낼 간자들을 양성하던 중이었다.
당시 일왕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무기력한 존재가 되고 무사들이 사회를 쥐락 펴락했다. 가뭄과 기근으로 농민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등 일본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에 일본은 통신사를 중단하는 등의 쇄국정책을 편다.
반면, 조선은 안정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의 치욕을 씻고자 일본을 정복하려는 정조의 꿈도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정조는 어떤 외침도 막아낼 수 있는 화성 행궁을 건설하는 한편 화공들을 간자로 키워 일본에 보낸다. 일본 각지의 지도와 정보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홍도, 신윤복을 간자로 키워 일본에 보내
김홍도는 그림과 여자, 술에만 환장했던 철없는 사내 가권을 간자로 키워 일본에 보낸다. 그의 임무는 일본 무사들에게 빼앗긴 일왕의 밀서를 찾는 것.
<색, 샤라쿠>의 많은 부분은 가권, 즉 신윤복이 조선의 간자로 일본에 스며들어 불꽃같은 예술 활동과 냉혹하고 철두철미한 첩자 활동을 하는 에도가 배경이다.
당시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중심가로 인구 100만이 넘는 향락과 사치의 도시였다. 저자는 가권과 함께 에도의 거리를 걷는 듯 에도의 화려한 밤거리와 그 속의 사람들 이야기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 생생한 현장감이라니, 책을 읽는 내내 자지러질듯 교태어린 게이샤의 웃음과 샤라쿠의 그림을 사려고 몰려든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고 할까?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가상 역사 추리소설인 <색, 샤라쿠>의 또 다른 즐거움은, 여러 장르의 장점과 재미를 찰지게 반죽하여 적당하게 발효시킨 듯 흥미롭고 스릴있게 펼쳐지는 퓨전 팩션이라는 점이다.
첩자와 닌자들의 냉혹하고 살벌한 세계, 화가들의 예술세계, 에도 시대의 독특한 풍속과 풍물, 무사들의 냉혹함, 사회 혼란을 틈타 끊임없이 일어나는 섬뜩한 연쇄살인 사건 등이 긴박감 있게 그려진다. 특수한 기녀인 '오이란'의 세계도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저자 김재희는 <훈민정음 암살사건> <백제 결사단> 등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작품들을 주로 써왔다고 한다. <색, 샤라쿠>에서도 저자의 역사인식과 민족적 자긍심은 민중의 마음으로 그려진다. 저자의 이런 마음이 잘 드러나 있는, 마음에 쏙 드는 한 단락.
"멀리서 소쩍새가 울고 있다. 시어머니의 계략으로 굶어죽은 며느리가 환생했다는 새. 어쩌면 우리 백성은 소쩍새 전설에 나오는 그 며느리 신세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허리띠를 졸라도 배를 채울 밥은 늘 모자란다. 솥의 크기를 속이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큰 솥은 뒤로 감추고, 작은 솥만 내밀며 이것이 최선이라고 순진한 마음들을 속인다.
하지만 백성은 소쩍새가 아니다. 힘없이 굶어 죽어 전설처럼 슬픈 노래나 부르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다. 솥이 적으면 그것을 녹여 곡식을 벨 낫을 만들리라. 적을 벨 검을 만들리라. 그리하여 큰 솥을 숨긴 자를 벌하리라. 주상은 그 백성의 마음까지 헤아리시고 큰 솥을 준비하시는 것이다. 만백성이 넉넉하게 밥을 나눌 수 있는 크고 든든한 솥을…, 그리고 나는 그 솥에 부어지는 쇳물이 되리라. - 책 속 '가권'의 고뇌 중에서
덧붙이는 글
<색, 샤라쿠>/김재희 지음/레드 박스 2008년 6월 29일 펴냄/11,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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