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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글모둠] 책의 속도로 천천히 걷다

21명의 리뷰어가 쓴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집단리뷰

등록|2008.07.17 16:20 수정|2008.07.17 16:20
책의 속도로 천천히 걷다

키보드 몇 번에 세상 모든 정보가 일렬종대로 모이는 세상이 왔다. 책의 속도로는 따라잡지 못하는 불행한 시대가 온 것인가?

출판사의 영업자들을 만나 보면 출간 1달 내에 '승부'를 보지 못하면 이미 책의 운명이 결정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책은 많지만 '스테디셀러'에 오르는 책은 점점 줄어든다. 책 정보는 넘쳐나되 책은 없는 기이한 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인류의 정보기술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책 읽는 속도는 달라지지 않는다. '독서'는 한장 한장 걷듯이 읽지 않고 방법이 있을까?

이번 주의 '책글모둠'은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정진국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리더스 가이드'의 회원 중에서 총 21명의 리뷰어가 참여했다(6월 19일~7월15일). 책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헌책방 등 책에 관한 향수가 적지 않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움 반 질투 반의 시선도 보였다.

하지만 결국 리뷰어들이 도달하는 결론은 '우리들의 책마을'이다. 도서축제니 출판도시니 우리나라에도 많은 책 콘텐츠들이 있지만 그것이 '문화'와 '공동체'로 수렴되지 못하다 보니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게 고민이다. 리뷰어들의 글을 읽으면서 덩달아 향수에 빠져 허우적대고 탈출하고를 반복했지만, 행복한 경험을 공유하는 맛은 언제나 기분좋다.

'파주 헤이리'와 '유럽 책마을'의 다른 점

책마을도 같은 책마을이 아니다. 우리가 '책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는 아이디 '바지런'의 말처럼 "자그마한 책방들이 일상 속 주민들의 삶에 참여하고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 자체로 하나의 풍경"(파란흙)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들의 책마을은 어떤가? 몇 번이나 파주에 다녀온 아이디 '행인'은 "특이하고 예쁜 건물이 있는 곳 이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고 썼고, 아이디 'NO-buta'는 "출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어 사고싶은 책을 좀 더 싸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 '책마을'의 현주소다. 하긴 그곳의 정식명칭은 '파주 출판단지'이다. 공업단지의 틀에 '출판'이라는 이름만 바꾸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디 '롤러코스터'는 출판단지의 지나치게 깔끔하고 획일적이고 커다란 건물들에게 "그다지 애정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 유럽의 책마을은 어떨까? 잘 사는 동네니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화려한 색색의 건물과 온통 책들로 도배된 마을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장사하기가 녹록치 않고 우리네 삶처럼 고민이 깊다(파란흙). 저자의 말마따나 "담배 가게나 빵집이나 카페처럼 책방 또한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야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유럽의 책마을 역시 그 역사가 오래진 않았다. 러시아 마피아라고 부르는 부동산업자들이 도시의 땅값을 죄다 올려놓는 바람에 소박한 서점들이 하나둘 도시에서 쫓겨났다. 농촌 역시 상황이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가 유령처럼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세태에 버텨낼 재간이 있을소냐?

하지만 유럽은 책과 농촌의 결합이라는 상상력으로 '책마을'을 만들어냈다. 유럽의 책마을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 "수백년 된 돌집을 개조하여 서점으로 만들거나 선조들의 오래 전 만들어 놓은 돌바닥에 책을 올려놓고 파는(바지런)" 등 오랜 전통과 소박한 옛 모습에 '책'이라는 오색 물감을 입힌 것뿐이다. 일상을 뒤엎으려면 돈이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문화'를 잃게 된다. 유럽인들에게 '문화'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책마을은 1962년 영국 웨일스 '헤이 온 와이'다. 이 모델이 성공하자 유럽 전역은 물론 일본, 말레이시아, 미국 등 전 세계에 책마을이 만들어졌다. 책마을은 이제 문화상품이나 관광상품의 영역을 넘어섰다. 아이디 '양화소록'의 말처럼 "지방문화의 활력을 도모하는 '정치실험'이자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동참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다.

24개의 책마을을 수십 번이나 둘러본 집념의 역작

"수십 년 전부터 책마을을 드나들기는 했지만, 이번 기회에 여기 수록한 마을 전체를 다시 주파했다."(331쪽 저자후기)

단지 책마을을 훑어보고 나서 쓴 여행기가 아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꼼꼼히 살펴본 '순례기'다. 이런 특징은 책 곳곳에 묻어난다. 그래서 아이디 '현지공주'는 "유럽의 한적함과 고즈넉함이 그대로 느껴진다"고 썼고, 아이디 '책방꽃방'은 "책마을에 직접 다녀온 것처럼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아릿향 향수에 젖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썼다.

독자들은 이 책의 차별성도 강조했다. 아이디 'treasure'는 "유럽의 휘황찬란한 문화를 걷는 여행기가 판을 치고 있는 가운데 이런 곳을 소개하는 책을 만났다는 것이 기쁨"이라고 썼다. '발로 쓴 순례기'여서 그런가? 책마을에 대한 아름다움을 볼수록 마음 한켠에서는 작가의 진한 아쉬움이 읽힌다.

"'역사적'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엄청난 예산을 투입했던 신도시 건설에 편승한 각종 문화관광 단지가 되레 몰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77쪽)

"아직도 20년 전의 원고료와 저임금 속에서 인문학도 출신의 수많은 젊은 여성이 출판의 수레바퀴를 사명감 같은 의협심으로 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번역서와 그 정가로 미루어볼 때 분명 어려움을 무릅쓰고 번역하고 교정을 보느라고 청춘을 불사르는 아까운 인재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100쪽)

저자는 우리의 현실로 줄기차게 돌아온다. 유럽의 책마을을 다니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책마을을 자꾸 그려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디 '파란흙'은 "정작 책마을 소개는 그리 박력 있는 문체로 하지 않는데, 우리의 책 업계 사정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침이 튈 정도로 강한 어조를 구사한다"한다며 글끝을 흐렸다.

저자의 '순례기'를 여행하면서 드는 아쉬운 점이 한 가지가 있었다. 리리시즘이(lyricism, 시간 ·공간의 한정, 사상 등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내면적 감상을 서정적으로 서술하는 예술 표현의 기법)이라고나 할까?  책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리지 않는다.

물론 아이디 '책방꽃방'의 말처럼 "이런 저런 책마을의 상황"이나 "책마을을 추진하고 일구어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생생하지는 않다. 그래서 아이디 '오로지관객'은 "보아야 할 것을 다 보지 못해서 마을을 산책하는 것이 아니라 취재만 하고 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썼다.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김연수의 여행 산문집 <여행할 권리>(창비)에서는 '사람'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전혀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부딪히며 느낀 장벽이라든지, 사람 때문에 혼난 이야기 때문에 정감이 가기도 했다. 아름다운 유럽의 책마을도 좋지만 '유럽 책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덧붙이는 글 '책글모둠'은 20여 명의 리뷰어가 써놓은 리뷰를 모아놓은 글을 뜻합니다.

이 글은 리더스 가이드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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