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고려와 조선을 오가는 진도의 역사를 따라가다

[아름다운 보배같은 섬, 진도여행기 ①]

등록|2008.07.18 09:09 수정|2008.07.18 09:09

녹진전망대에서 바라본 진도대교진도대교 아래로 흐르는 거친 물살 울돌목,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그 역사적 현장입니다. ⓒ 문일식


한참을 자고 또 자도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여전히 진행형입니다. 5시간 남짓을 달려 도착한 진도, 이제 진도를 들어가는 진도대교를 건넙니다. 울돌목의 거친 물살이 하염없이 우는 곳을 지나고 나니 낮은 산들이 올망졸망하고, 논과 밭들이 하늘아래로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온통 녹음의 물결이 일렁이는 풍요로움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진도대교가 훤히 보이는 통나무집에서 간장게장을 먹고, 바로 진도여정에 올랐습니다. 진도에 들어와 가장 먼저라고 하면 바로 녹진전망대입니다. 녹진전망대에 오르면 진도대교 뿐 아니라 해남의 여러 땅들이 아스라이 펼쳐집니다. 진도대교는 해남의 학동과 진도의 녹진을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입니다. 진도와 해남사이를 흐르는 거친 해류에 교각을 설치할 수 없기 때문에 육지 끄트머리에 교각을 세우고 강철 케이블로 묶어 지탱하고 있습니다.

우수영관광지에서 바라본 진도대교와 울돌목울돌목의 세찬 물살이 무섭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 문일식


진도와 해남사이를 흐르는 거친 해류, 즉 울돌목은 '소리내어 우는 바다의 길목'라는 뜻으로 한자로 쓰면 명량이 됩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여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을 격파한 곳이기 때문에 울돌목의 기운은 더없이 크게 느껴집니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전멸할 정도로 크게 패하고, 결국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조선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을 없애고 육전을 명하자 다시 올린 장계를 통해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기로 싸우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 했고, 해전에 출진하기 앞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명량해전 당시 진도 주민들 합세한 현장인 독굴산(위)과 백토마을(아래)위장진지를 세운 독굴산과 백토를 흘려 쌀뜬 물처럼위장한 백토마을 ⓒ 문일식


명량해전은 오로지 13척의 전선으로만 싸워서 이긴 해전은 아닙니다. 망금산 자락에서 부녀자들을 남장시켜 그 유명한 강강수월래를 부르게 하였으며, 독굴산에는 짚이엉을 엮어 노적더미를 만들어 위장진지를 세우고, 현 백토마을에서는 백토를 바다에 부어 마치 쌀 뜬물이 흐르는 것처럼 위장하기도 했습니다.

울돌목을 이용할 줄 알았던 이순신 장군의 지혜와 진도관민이 합심하여 아군을 철저히 위장하고, 적을 교란함으로써 얻은 승리입니다. 아직도 울돌목에는 물살에 휩쓸려가며 아비규환을 이루던 왜군의 슬픈 울음이 들리는 듯 합니다.

벽파 이충무공 전첩비의 전경벽파항 높은 암벽 위에 자리한 명량해전의 역사적 사실이 새겨진 이충무공 전첩비입니다 ⓒ 문일식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벽파항의 언덕에는 이충무공전첩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벽파항은 진도대교가 세워지기 전 진도의 관문이자 명랑해전 전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곳입니다. 전첩비가 세워진 지는 1956년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전첩비가 세워진 곳은 커다란 암산 정상부인데 전첩비의 귀부는 암산을 깎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비석은 암산과 하나가 된 특별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북이 또한 엄청나게 커서 지금까지 본 귀부 중 가장 큰 녀석입니다. 더구나 바다를 헤치며 나가는 듯이 앞뒷발이 무척 역동적입니다.

전첩비에는 백의종군하여 진도로 내려오는 내용과 명랑해전의 전후 사정을 잘 알 수 있는 내용 등이 실려 있습니다. 전첩비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조선 수군 정찰을 위해 달빛 그늘 아래 숨었다던 감부도와 멀리 왜선들의 기지였던 해남땅이 아련하게 보입니다.

배중손 장군 사당에 세워진 동상진도에서의 삼별초 항쟁을 이끈 배중손 장군의 동상입니다. ⓒ 문일식


진도에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만큼이나 유명한 역사가 깃들여 있으니 바로 삼별초 항쟁입니다. 고려시대에 몽고군이 침입하자 고려 조정은 몽고군이 수전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강화도로 피난하게 됩니다. 4대 60여년간의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려 고종은 개경환도를 단행하게 되면서 배중손은 대몽항쟁을 위해 승화 후 온을 왕으로 삼아 천 여척의 배를 이끌고 떠나게 되는데, 그 두번째 근거지가 바로 진도입니다.

삼별초의 새로운 본거지였던 용장산성내 우물진도 벽파항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용장산성을 본거지로 삼아 9개월간 머물게 됩니다. ⓒ 문일식


삼별초의 대몽항쟁의 역사는 용장산성에서 짧지만 9개월간 계속됩니다. 진도의 벽파진에 도착한 배중손 휘하의 삼별초군은  용장산성을 개축하고, 황궁을 만들어 체계를 세웠습니다. 가까운 왜국에 고려의 정통성을 알리는 국서를 보내기도 했으며, 몽고군의 손이 미치지 않는 남해안 일부지역을 손에 넣기도 합니다.

용장산성내 건물터건물터로 여겨지기도 하고, 목탑이 있었던 자리라고도 여겨집니다. ⓒ 문일식


1271년 고려 원종은 김방경을 추토사로 삼아 홍다구가 이끄는 몽고군과 함께 총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벽파진을 통해 세방면으로 에워싸고 있던 김방경과 홍다구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의해 초토화되자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과 김통정은 돈지에서 두 갈래 길로 나누어 패퇴의 길을 재촉했습니다.

배중손은 남도석성으로, 김통정은 금갑진으로 향했습니다. 김통정은 남은 삼별초군을 이끌고 제주로 향했지만, 배중손은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승화후 온도 왕무덤재에서 잡혀 죽고, 배중손도 남도석성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진도에는 삼별초의 한이 서린 지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용장산성에서 도망치다 잡혀 죽은 승화후 온의 무덤이 있는 고개는 왕무덤재라 부르고, 승화후 온을 사로잡고 죽일지 살릴지를 논했다하여 붙여진 논수골, 궁녀들이 치욕을 감당하기 어려워 우황천에 빠져 죽었다는 궁녀둠벙도 남아 있습니다.

용장산성내 건물이 있었던 흔적은 그저 무덤처럼 처연히 남아 있습니다.깨지고 흩어진 기와조각이 무덤처럼 모여 있습니다. ⓒ 문일식


용장산성에는 모두 12군데의 건물자리가 남아 있습니다. 멀리서 볼 때는 경사진 곳에 견고한 석축을 쌓아 놓은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 가까이에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보니 복원자체가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회랑이 있었던 곳이라면 적어도 회랑의 지붕을 감안하여 석축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회랑의 주춧돌과 붙어서 석축이 있는가 하면, 출토된 깨진 기와들을 마치 무덤처럼 모아놓은 곳도 있는데, 급하게 서두른 복원의 흔적같아 씁쓸했습니다.

용장산성의 특이한 점은 각 석축의 단의 계단인데 낮은 곳은 계단이 있고, 높은 곳은 계단이 없습니다. 즉, 높은 석축에는 전시를 대비해 가계단을 설치해 놓고, 적의 침입이 있을 경우 가계단을 철거하여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것입니다.

홍주하우스에서 바라본 금호도와 모도회동마을과 모도로 이어지는 신비의 바닷길이 바로 이 앞으로 열립니다. ⓒ 문일식


홍주하우스는 진도 남쪽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고, 신비의 바닷길이 연출되는 가계해변과 금호도,모도의 풍광을 한꺼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입니다. 진도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진도홍주인데 진도홍주를 알리는 전시장과 레스토랑, 전망대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난 목요일에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 먼 제주도의 모습도 보였다며 오늘 온 게 너무 아쉽다고 하십니다.

진도해양생태관의 전경가계해수욕장에 자리잡은 진도해양 생태관의 전경입니다. ⓒ 문일식


가계해수욕장에는 진도해양 생태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해양 생태관이 갖추고 있는 수족관 시설과 함께 특이하게 진도 출신의 허병운 선생이 기증한 세계의 희귀 조가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외항선원시절 세계 각지를 돌며 수집한 희귀한 조가비들로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칩니다. 1층에는 참돔, 농어, 방어 등 연근해에 서식하는 어류들이 수족관에서 노닐고, 몇 해전 스티븐 어윈을 죽게 했던 노랑가오리도 유유히 헤엄칩니다.

홍보관에서는 진도 신비의 바닷길이 열리는 영상물을 볼 수도 있고, 2층 전시관에서는 연안에서 서식하는 어류와 담수관, 웅덩이관 등을 둘러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바실리카, 열린공론장과 개인블로그(http://blog.naver.com/mis71)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