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돌거북 등 무늬가 왜 사다리꼴일까?

<우리문화유산 되짚어보기 35>사라진 원각사 따라 비문마저 닳아버린 '대원각사비'

등록|2008.07.18 18:32 수정|2008.07.19 19:01

대원각사비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 조그만 정자 속에서 금세라도 지붕을 뚫고 나갈 기세로 우뚝 서 있는 대원각사비 ⓒ 이종찬


우리의 오랜 역사와 조상의 손땀 발땀이 배인 문화유산을 찬찬히 되짚다 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때가 참 많다. 기와집이나 불상, 탑, 비석 등의 조각기법이나 양식이 그 시대와 동떨어진 경우가 더러 있고, 긴 세월의 비바람과 외침 때문에 그 옛 모습은 사라지고 엉뚱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서울 종로2가 탑골공원 안 조그만 정자 속에서 금세라도 지붕을 뚫고 나갈 기세로 우뚝 서 있는 대원각사비. 대원각사비는 연산군 때 기생방이 되었다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 원각사, 그 원각사의 창건에 따른 모든 사실이 새겨져 있는 비다. 하지만 이 비도 사라진 원각사 따라 비문에 새겨진 글씨마저 닳아 지금은 그  내용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그뿐이 아니다. 대원각사비를 등 한가운데 뿔처럼 세우고 있는 돌 거북의 사다리꼴 등 무늬도 의문스럽다. 왜 돌 거북 등 무늬가 육각형 기하무늬가 아니라 사다리꼴일까. 이 비와 닮은꼴인 경주에 있는 국보 제25호 무열왕릉비와 하동 쌍계사에 있는 국보 제47호 진감선사대공탑비를 등에 짊어지고 있는 돌 거북의 등 무늬도 모두 벌집 모양의 육각형이 아닌가.

대원각사비를 눈 비비고 다시 한번 살펴보면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대원각사 비의 재질은 비바람에 비교적 약한 대리석이지만 이 비를 받들고 있는 돌 거북의 재질은 비바람에 아주 강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왜일까. 왜 이 비의 재질은 화강암을 쓰지 않았을까.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1963년 1월 21일 지정) 대원각사비는 탑골공원 오른쪽 한 귀퉁이에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다 ⓒ 이종찬


대원각사비대원각사비는 원각사의 창건에 따른 상세한 내용을 새긴 비다 ⓒ 이종찬



노인들 얼굴에 사라진 대원각사비 글씨가 어른거린다

13일(일) 점심 나절. 탑골공원(종로구 종로2가 38, 사적 제354호)으로 가는 골목길 나무그늘 밑에는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고 있다. 막걸리 내기 장기를 두는 노인, 점심 내기 바둑을 두는 노인, 그저 쪼그리고 앉아 멍하니 2천 원짜리 밥집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 그래. 저 노인들의 모습도 세월이 훨씬 더 흘러가면 대원각사 비 글씨처럼 사라지고 말 것 아닌가.

갑자기 배가 고프다. 어제 오후 7시, 비가 내리는 가운데 청계천 광장과 서울시청 광장 주변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나갔다가 날밤을 새우며 찬물만 마구 들이켜서 그런지 속도 꽤 쓰리다. 주머니 사정도 그리 좋지 않다. 에라~ 이곳 식당에 들어가 비빔냉면으로 점심 한 끼 가볍게 때워야겠다.

'비빔냉면 2천 원'이라는 글씨가 나붙은 허름한 식당에 들어서자 노인들이 여기저기 앉아 있다. 식당 들머리에 있는 자리에 합석해 비빔냉면을 시켜놓고 대원각사 비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쓰윽 훑고 있는데, 금세 비빔냉면이 나온다. 아주머니가 잘라주는 비빔냉면을 쓰윽쓱 비벼 입에 넣자 새콤달콤한 맛이 제법이다. 2천 원짜리치고는 양도 제법 많다.       

비빔냉면을 3분도 안 되어 후딱 먹어 치우고 탑골공원 안으로 들어선다.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탑골공원 여기저기에도 노인들이 띄엄띄엄 앉아 있다. 주황색 꽃잎에 점이 콕콕콕 박혀 있는 나리꽃들도 노인들 속에 섞여 있다. 보물 제3호(1963년 1월 21일 지정) 대원각사비는 탑골공원 오른쪽 한 귀퉁이에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다.

대원각사비이 비는 조선 성종 2년, 1471년에 이곳에 세워졌다 ⓒ 이종찬


대원각사비이 비를 짊어지고 있는 큼직한 돌 거북의 모습도 독특하다 ⓒ 이종찬


대리석은 독특한 색과 무늬 고와 장식용 건축석재로 많이 사용

대원각사비는 원각사의 창건에 따른 상세한 내용을 새긴 비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이 비는 조선 성종 2년, 1471년에 이곳에 세워졌다. 이 비는 조선 세조 10년, 1464년에 세워진 원각사의 창건과 이름의 뜻, 위치와 면적, 연혁, 절의 조성, 원각사 10층 석탑 건립, 석탑 안에 사리와 원각경을 넣은 사실 등을 낱낱이 새겨놓은 비이다.

이 비의 머릿돌(이수)에는 승천하는 용의 꿈틀거림을 생동감 있게 새겨놓았다. 이 비의 재질은 대리석이며, 높이는 4.9m, 비신은 폭 1.3m이다. 그 아래 비를 받들고 있는 큼직한 돌 거북의 재질은 화강암이다. 까닭에 언뜻 바라보면 이 비와 돌 거북이 한 몸이 되어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제각각 따로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왜 그랬을까. 이 비를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다면 글씨가 닳아 없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화강암은 단단하기는 하지만 대리석 특유의 아름다운 색과 무늬가 없다. 네이버 백과사전에는 "대리석은 연마할수록 아름다운 빛이 나기 때문에 예로부터 장식용 건축석재로 사용한다"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이 비를 모시고 있는 돌 거북은 왜 대리석으로 만들지 않고 화강암으로 만들었을까. 긴 역사와 조상의 숨결이 배인 문화유산에 대한 섣부른 속단은 금물이다. 하지만 나그네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 비를 오래 지탱하기 위해, 받침돌에 해당하는 돌 거북의 재질을 일부러 단단한 화강암으로 했을 거라고 어림짐작하고 싶다.
  

대원각사비대원각사비의 특징은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과 한 몸이라는 점이다 ⓒ 이종찬


대원각사비특히 머리만 있고 목은 없는 돌 거북의 등 무늬가 육각형 기하무늬가 아닌 사다리꼴이다 ⓒ 이종찬


돌 거북의 등 무늬를 왜 사다리꼴로 새겼을까

대원각사비의 특징은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몸돌과 한 몸이라는 점이다. 이 비의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감싸 안은 채 보주(寶珠, 연꽃봉오리 모양의 장식)를 들고 있다. 그 조각 아래 한가운데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이 글씨는 강희맹(1424~1483,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이 썼다.

언뜻 머릿돌에 섬세하고 화려하게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보주를 들고 비에서 떨쳐 나와 금빛 용비늘 몇 탑골공원 안에 툭툭 떨구며 저만치 떠도는 뭉게구름을 거머쥐고 짙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돌 거북이 그렇게 승천하는 두 마리 용을 바라보며 금세라도 엉금엉금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이 비를 짊어지고 있는 큼직한 돌 거북의 모습도 독특하다. 특히 머리만 있고 목은 없는 돌 거북의 등 무늬가 육각형 기하무늬가 아닌 사다리꼴이다. 돌 거북의 등 한가운데에는 연잎조각이 비신을 보호하듯 네 군데가 위로 말려 올라가 있고, 세 개의 꼬리와 네 개의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정밀하게 새겨놓았다. 

"거북은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상서롭게 여겨졌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 귀갑무늬(육각형 기하무늬)가 많이 사용되었다. 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나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나무로 만든 베개에도 금박의 귀갑무늬가 있다. 신라 때에는 특색 있는 귀갑무늬가 귀부(龜趺)에 표현되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도자기, 구리거울 등에 귀갑무늬를 조각했다."
- 네이버 백과사전

그렇다.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거북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 귀하게 대했다. 어부가 바다에서 그물질을 하다가 거북이 올라오면 쌀밥을 준 뒤 다 먹고 나면 다시 바다로 돌려  보낸다는 말이 지금까지도 전해 내려오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삼국시대 때부터 우리 조상들은 그림을 그릴 때나 아끼는 물건에 귀갑무늬를 새겨 넣어 장수를 빌곤 했다.

대원각사비앞면의 글씨는 김수온 성임, 뒷면의 덧붙이는 글씨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 이종찬


대원각사비돌 거북의 등 한가운데에는 연잎조각이 비신을 보호하듯 네 군데가 위로 말려 올라가 있고, 세 개의 꼬리와 네 개의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정밀하게 새겨놓았다 ⓒ 이종찬


대원각사비 앞에서 마음의 촛불 하나 밝힌다

근데, 왜 이 돌 거북의 등 무늬를 가는 줄이 촘촘히 새겨진 사다리꼴로 새겼을까. 그 까닭은 나그네의 섣부른 지식으로서는 도저히 풀 수가 없다. 선무당이 사람 잡을 수야 없지 않겠는가. 다만, 어렴풋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이 돌 거북을 용처럼 상상 속의 상서로운 동물로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에 거북의 등도 색다르게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비의 글씨는 명신들이 짓고 썼다. 문화재청 자료에는 "앞면의 글씨는 김수온 성임, 뒷면의 덧붙이는 글씨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고 나와 있다. 하지만 너무도 안타까운 것은 이 비문이 가까이 있는 원각사10층석탑(국보 제2호)처럼 재질이 연약한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글씨가 세월의 비바람에 닳아버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면은 32행으로 되어 있고 후면은 31행이 새겨져 있는데, 제4행에서 제15행까지는 세조가 절을 창건하여 김수온이 그 일을 기술하고 그 후에 비를 세운 사실을 간추려 기술하였으며 제15행에서 끝 행까지에는 조성도감과 간행도감의 제조 이하 여러 직원의 관직 및 성명이 새겨져 있었다." -서울시 서울문화재 자료

서울시 자료에 따르면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 절로 세웠다. 그 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가져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3층 사리탑을 세웠다.

세월은 흐른다. 아니 세월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도 사람이 흐르면서 세월을 기워 만들어 놓은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역사 속에 남아 있는 여러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조상들의 삶을 되짚어내고, 조상들의 땀내음을 맡는다. 나그네가 대원각사비 앞에서 마음의 촛불 하나 밝히는 것도 사람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미래의 촛불 하나 밝힐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