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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로 살 것인가, 헛된 이념으로 죽을 것인가?

하진의 <전쟁 쓰레기>

등록|2008.07.19 21:34 수정|2008.07.19 21:34

▲ <전쟁 쓰레기>겉표지 ⓒ 시공사

20세기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가 극단적으로 충돌했고 그것은 전쟁을 낳았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해외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려는 미국과 중국이 그랬다. 그들은 군대를 출동시킨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군인으로 온 그들 역시 비극의 역사 속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하진의 장편소설 <전쟁 쓰레기>의 주인공 유안은 순박한 청년이었다. 군관학교를 나온 경력으로 보면 호전적일 것 같지만 돈이 없으나 뭔가를 배우고 싶어 진학했던 것이었다. 어머니를 공경하고 약혼녀를 사랑하는 그는 영락없이 마음씨 좋은 동네 이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본인의 의사는 아니다. 나라에서 가라고 하니 가는 것이었다.

도대체 한국전쟁은 왜 벌어지게 된 것일까? 유안은 모른다. 그는 이데올로기 같은 건 모른다. 살아 돌아와야 한다, 는 생각뿐이다. 유안과 함께 가는 청년들도 그랬다. 전투 경험은 고사하고 훈련 또한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많은 사람들은 그랬다. 집에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미군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는다. 그들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한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죽고 포로가 된다. 유안도 포로가 됐다. 공산당은 '포로'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유안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두려울 법도 하지만,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이것이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수용소는 국민당 출신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은 중국 본토가 아닌 '타이완'으로 가라고 강요하기 때문이었다. 그곳 또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지독한 협박과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 하진의 <전쟁 쓰레기>에서 볼 수 있는 그 고문들은 왜 벌어져야 했던 것일까? 유안은 그것을 계속 묻는다. 도대체 왜 그래야 했던 것일까? 이데올로기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나 혹은 신념이 있어서 그리한다면 차라리 이해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불안에 떨면서도 그것을 강요한다. 안쓰러울 정도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들은 그리했다. 죽이는 것조차 서슴지 않으며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하고 있었다.

하진은 그 광경을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묘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에 미쳐 날뛰는 사람들은 물론 '전쟁 쓰레기'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것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동시에 그 속에서 조금씩 드러나는 휴머니즘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 잔혹한 전쟁을 그리면서도 가슴을 애틋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비슷한 소재를 배경으로 한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의미에서 각별한 것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중국인이지만 그가 경험한 것들은 우리 땅에서 벌어진 것이다. 한국 전쟁 당시 수용소 등을 배경으로 한 우리 소설들이야 다양하게 있었지만 외국인의 눈을 통해 그린 것은 보기 어려웠다.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하진 덕분에 그것을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중국인 포로의 눈으로 이 땅의 '그곳'에서 벌어진 것들을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한국전쟁은 물론 수용소 안에서의 비극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중국인을 주인공으로 한 <전쟁 쓰레기>, 그 여운이 묵직하면서도 진지한 것이 본격 소설의 힘을 느끼게 해준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만큼 소설이 그린 내용이 우리에게는 여러 모로 슬프기는 하지만, 소설의 힘만큼은 반갑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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