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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 속에 농염한 빛깔의 꽃들이 지다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마크 퀸 개인전' 8월 3일까지

등록|2008.07.24 14:21 수정|2008.07.24 15:58

▲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입구에 붙은 마크 퀸 전 현수막 작품명 '끝없는 기둥(Endless Column)' 2008 ⓒ 김형순



마크 퀸(Marc Quinn)의 한국 첫 개인전이 오는 8월 3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서 마크 퀸은 해골조각, 꽃 정원 연작, 케이트 모스의 스핑크스(비너스) 연작, 대리석 태아, 브론즈조각 등 최근작 20여점을 선보인다.

마크 퀸은 1964년 런던 생으로 케임브리지대에서 역사학과 미술사를 전공한 후 작가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영국 젊은 작가들(YBAs, Young British Artist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현재는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등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스타작가 중 한 사람이다. 

논쟁을 달고 다니는 이 개념주의 작가는 한때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이를 계기로 몸에 대한 해석과 삶과 죽음, 존재와 생명, 종족번식에 대한 생물학적 고찰 등에 관심을 보여 왔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셰익스피어의 고민만이 아니라 이 작가의 주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피가 섞인 자화상으로 스타작가가 되다  

▲ '마크 퀸의 자화상(Self)' 1991. 이 작품은 냉동장치로 유지된다고 한다. 마크 퀸 사진 2008. 아래는 가나아트센터의 마크 퀸 전 홍보물 ⓒ Marc Quinn



렘브란트는 평생 시대별로 다양한 자화상을 그렸는데 마크 퀸도 이에 고무되어 1991년 '셀프(Self)'라는 자화상을 발표했다. 그는 현대작가답게 아무도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자신의 피로 그린 자화상이다. 평상시에 피를 조금씩 뽑아 냉동시켰다가 정상인의 혈액량과 같은 4.5리터 정도를 자신의 두상에 붓는 방식이다.

마크 퀸은 이 자화상을 로얄 아카데미에서 열린 <센세이션(1997)>전에서 선보였고 이를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다. 이렇게 작가들은 가끔 엉뚱한 실험정신으로 인해 때로 엽기적이고 광적인 존재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는 피뿐만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배설물까지도 작업에 활용한다고 그의 동료인 윌 셀프(Will Self)는 전한다.

작가의 몸과 작품의 혼이 혼연일체라고 할까. 그는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물질로 마치 성서에서 조물주가 흙으로 인간을 빚듯 그렇게 작품을 구현하려 했는지 모른다.
  삶과 죽음을 같이 놓고 동시에 보다  

▲ '환상에 대한 명상(Meditation on Illusion)' 81×43×64cm 브론즈 2007 ⓒ 김형순


  위 작품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한 '바니타스(vanitas) 미술'을 떠올린다. 당시 정물화에도 해골이 많이 나오는데, 그 주제가 삶의 덧없음이나 죽음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강조하는 것이란다. 그런데 그런 미술이 네덜란드의 전성기에 생겼다니 아이러니하다. 하여간 여기도 그런 사상과 전혀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하긴 영국 젊은 작가들(YBAs) 작품에도 유난히 해골그림이 많다. 마크 퀸도 예외는 아니다. 예술도 결국 살, 뼈 등 몸이나 유전인자에서 온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동양사상과 불교에 관심이 많은 그가 유비쿼터스(두루누리)시대를 맞아 서양의 이원론을 벗어나 동양의 일원론(物我一體)을 받아들이며 동서문화를 융합시켜보려는 시도를 하려는 것일까. 하여간 그에게는 삶과 죽음이나 혼백이 구분 없이 하나로 받아들여진다.    몸에 담긴 시대정신 파악하기  

▲ '스핑크스(비너스) 모형(Maquette of Sphinx)' 34×23×19cm 금판 브론즈 2008 ⓒ 김형순


  이 작품은 영국의 유명한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Kate Moss)가 요가 하는 모습이다. 그녀는 영국에서 99번째 부자로 살아있는 신데렐라다. 프로이트의 손자로 유명한 화가인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Freud)도 그녀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는 분명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임에 틀림없다.   마크 퀸도 그를 두고 "우리시대의 미의 아이콘이자, 현대판 비너스이고, 우리를 비추어보는 거울이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작가는 이 작품에서 그 인물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우리시대의 정신을 담으려 했고, 요가 하는 모습은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묶는 매개체로 쓴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분명 예술의 매체로써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퍼포먼스(행위예술)처럼, 몸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두고 해석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서양사에서 몸은 플라톤 이래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다만 포스터모더니즘 이후 겨우 인정받았다.   눈부신 꽃의 화려함 뒤에 숨은 죽음의 그림자  

▲ '광화학적 구름들(Photochemical Clouds)' 168×254cm 캔버스에 유화 2007. 이번 전에 이런 화려한 꽃 연작이 10여 점 더 소개된다 ⓒ 김형순



마크 퀸이 가장 좋아하는 꽃은 서양란이란다. 이번 전시된 작품 중 서양란과 사계절에 피는 꽃과 과일 등을 모아 그린 꽃 그림이 가장 많다. 색감이 농염하고 색정적이라 관객의 눈길을 많이 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를 가공된 색소를 노출시켜 그 허망함도 보여준다.

그는 회화작가라기보다는 조각가로 봐야 할 것 같다. 환한 빛의 꽃을 더 화려하고 선명하기 보이기 위해 얼려서 조각처럼 작업한다. 이렇게 강한 원색으로 발화된 꽃을 통해 시대에 따라 달라진 '인간의 욕망'을 나타내려 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꽃 그림에서 신이나 자연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욕망을 언급한 점은 분명 현대적 해석이다. 그러나 그렇게 눈부신 꽃의 화려함 뒤에 숨은 죽음의 그림자도 은밀하게 들통 낸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배반하는 돌연변이 방식
 

▲ '미녀와 야수(Beauty and the Beast)' 왁스와 동물의 피를 섞어 만든 폴리머 동상 2005.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상을 연상시킨다. ⓒ 김형순


  작가는 '미녀과 야수'에서도 반인반수,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같이 놓고 있다. 숭고한 아름다움과 함께 동물적 관능성, 그 양면성을 다 보여준다. 그의 소통방식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극과 극이 서로 통하는,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배반하는 돌연변이 방식이다.   지적이고 타협할 줄 모르는 이 작가에게 해골과 요가 하는 슈퍼스타와 화려한 색채를 뽐내는 꽃들을 어떻게 연결시켜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그는 자신을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이기보다는 예술적 노력의 기록과 자취를 찾아가는 원형개념주의자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런 시도의 한 과정일지 모른다.   역사학도가 본 권력의 덧없음이여!  

▲ '루이16세(Louis XVI)' 79×72×51cm 1989.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右)' 124×41×30cm 1989. 빵으로 구워 브론즈로 완성한 작품. ⓒ 김형순



  이 작품은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작으로 루이 16세와 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한 것이다. 절대왕가의 부부를 조롱하며 권력의 무상성을 암시한다. 누더기가 되어 버린 권력의 영화는 이제 보니 그렇게 웃기는 코미디일 수가 없다.   이 작품에서 작가의 재능은 빛난다. 조금은 일그러지고 찌그러진 것에서 마음이 편해지고 속이 풀린다. 같은 색이라도 민족마다 그 취향이 다르듯 우리는 너무 완벽하고 인위적이면 답답해한다. 이런 풍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그들에게 그 화려하고 현란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인가. 역사학도로서 작가가 역사적 인물을 작품에 반영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새 시대를 짊어질 예술가는 누구인가?  

▲ '젊은 예술가의 초상(Portrait of an artist as a young man)' 39×98×67cm 브론즈 2005.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제목과 같다. ⓒ 김형순


  위 작품을 보니 작가는 한 시대를 열 예술의 옥동자를 갈망하는 것 같다. 또한 무한한 시간 속에 인간의 유한함을 의식하며 새 시대에 맞는 예술을 제시하고 싶은가보다.   작가란 기존방식과는 거꾸로 나가는 사람들이다. 마크 퀸은 마찬가지다. 욕망과 생명과 관능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면에 담겨진 죽음과 고통과 허무를 더 강력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작업하는 방식은 예술적으로 완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여간 그는 작가로서 또한 미술사가로서 생명의 원초성과 예술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되찾고 싶었나보다. 석유가 고갈되면 이를 대체한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듯 미적 창조의 샘이 말라버리면 이를 대체할 새로운 예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역할을 하고 싶은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종로구 평창동 97번지 www.ganaart.com
전화: 02)720-1020 / 관람시간: 10:00~19:00 교통편 홈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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