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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았기 때문에 이어진 '한국'

[서평] 한국사 傳

등록|2008.07.21 17:58 수정|2008.07.21 17:58
'위키백과'에서 '알파걸'을 검색하면 '골드미스(Gold Miss)'와 같은 뜻으로 분류된다. "30대 이상 40대 미만의 미혼 여성으로, 학력이 높고 사회와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진 사람"을 지칭한다. 미국 하버드대 아동심리학 교수 댄 킨들러의 2006년에 출간된 <새로운 여자의 탄생- 알파걸>에서 처음 정의된 말이다.

소현세자빈 강씨'KBS 한국사 傳'의 '새로운 조선을 꿈꾼 여걸' 방송 장면 ⓒ KBS 한국사 傳


소현세자빈의 일생을 알고 난 후,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가 바로 '알파걸'이었다. 물론 미혼의 여성이라는 알파걸의 조건과는 차이가 있지만, 어려운 환경요건을 개선해 특유의 추진력으로 일을 해결해 나간다는 점에서는 모자람이 없다.

병자호란(1637) 후,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현재의 중국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게 된다. 하지만 소현세자빈은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조선과 청나라의 교역에 앞장선다. 기울던 심양 생활을 일으키고 청나라 노예로 팔려나가던 조선의 백성들을 도운 그는 어느 면으로 보나 현대의 알파걸과 닮았다.

'인물'로 만나는 또 하나의 역사

▲ <한국사 傳> ⓒ 한겨레출판

<한국사 傳>(KBS, 한겨레출판)은 KBS에서 방송 중인 역사프로그램으로, 방송된 내용 중 흥미로운 것을 골라 책으로 엮어 지금까지 1, 2권을 출판했다.

나는 두 권 중 2권 속 인물들이 더 눈길을 끌어 먼저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책 속 인물들은 이야기 전개에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나처럼 마음이 가는대로 선택해도 무방할 듯하다.

책 <한국사 傳>의 가장 큰 장점은, 왕 위주의 역사서술에서 벗어나 역사속 조연들의 삶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시, 세자빈, 학자, 선비들의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어느새 역사 전체를 아우른다.

개인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모두 읽어내면, '아, 이 사람들이 이렇게 연결돼 있었구나'하며 애쓰지 않고 큰 그림이 그려진다.

여기 또 눈길이 가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백헌 이경석'. 청나라에 대한 항복식인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다)를 치른 인조는 손꼽히는 문장가 네 명을 부른다. 바로 청나라에 대한 항복 비문인 '삼전도비'에 쓰일 글을 쓰기 위해서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었던 역사

아프다는 핑계와 일부러 못 쓴 문장 등으로 책임을 회피한 다른 이들과 달리, 이경석은 나라의 안위를 위해 치욕의 역사를 기록한다. 흠잡을 곳 없는 실력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에게 씻을 수 없는 경력을 안겨주는 일이었다.

삼전도비병자호란이 370년을 맞은 지난 2007년, 낙서로 훼손된 삼전도비의 모습 ⓒ KBS 한국사 傳

그는 그 뒤에도 서슬퍼런 청나라 사신 앞에서 조선 조정을 보호하기 위해 책임을 모두 뒤집어 쓰는 등 최고 책임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역사는 그를 매국노로 기록한다. 책은 말한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이어질 수 있었던 역사 앞에서 이들 행동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넓은 만주벌판도 지금의 한국땅이었을 거야'라고 말한다. 말은 쉽다. 하지만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이 100퍼센트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외교라고 말할 수 있는가. 언젠가는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어떤 방법으로든,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있는지도 모른다. 서기 2008년을 온전한 제 나라에서 보내고 있는 한국인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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