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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보릿고개' 시대, 돈 벌려다 졸지에 전과자 되다

[아르바이트의 추억] 벌금 30만원으로 물거품 된 주막식 카페 '그리메'

등록|2008.07.21 17:05 수정|2008.07.22 08:52

뭉개구름그때 나는 첫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뭉개구름처럼 하얀 꿈을 꾸었다 ⓒ 이종찬


"다들 너무나 어려워서 그런지 학부형들이 애들 다니는 학원도 한두 개씩 줄이는가 봐요. 몇 달 전부터 학생들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어요. 학원 임대비마저 밀리다 보니 건물 주인이 나가라 그래요. 할 수 없이 학원 문을 닫았지요. 요새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해요. 하루에 5천 원도 못 버는 날이 있지만 그래도 평균 1~2만 원은 벌어요."

경남 창원 사파동에서 중고생 논술학원을 하다 그만 두고 오토바이를 한 대 사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민홍기(49)씨의 쓰라린 고백이다. 지금으로부터 5여년 앞 마산에 있는 여중에서 국어교사를 하다가 그만 둔 민씨는 그때부터 창원 사파동에 있는 5층짜리 빌딩 4층에 논술학원을 열었다.

논술 붐 탓이었을까. 학원은 한동안 미어터져라 잘 됐다. 계속 이렇게 나아간다면 임대를 털고 조그마한 논술학원을 직접 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고유가에 생필품값마저 줄줄이 오르자 학생들이 크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학생들이 한두 명만 남게 되자 민씨는 학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지천명의 나이에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민씨. 요즈음 경기가 침체되고 물가가 줄줄이 오르면서(스태그플레이션) 민씨처럼 하루하루를 눈물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서 화분가게를 꾸리고 있는 김아무개(45)씨는 "파리만 날린다. 낮에 가게를 열고 저녁에는 호프집에서 설거지를 하며 아이들 학원비를 번다"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현장노동자들의 아르바이트는 야근이나 철야

"미치것네. 이라다가(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모 공장 문까지 아예 닫히는 거 아이가. "
"내 참! 노동자들 피 같은 월급을 3개월도 넘게 안 주는 회사가 오데(어디) 있노. 내는 공장 문 닫기 전에 길거리로 쫓겨나게 생겼다카이."
"이랄 끼 아이라(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먹고 살 길을 따로 찾아야 하는 거 아이가."

나도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저녁부터 이른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한 쓰라린 기억이 있다. 그 기억은 요즈음 들어 풋 탱자를 씹는 것처럼 씁쓸하게 다가와 '新보릿고개' 시대를 맞아 천 원짜리 한 장에도 발발 떨어야 하는 내 가난한 지갑을 힐끔거린다. 지금 시대는 절약이 능사가 아니라 밤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생계비에 보태야 한다는 투다.
   
1979년 이맘 때, 나는 창원공단에 있는 제법 큰 대기업체 연마실에서 현장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는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 창원공단에 입주해 있는 수많은 기업체들이 심각한 불황과 인플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와 함께 내가 다니는 기업체뿐만 아니라 창원공단 안에 있는 대부분의 기업체에서도 임금이 밀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때 창원공단에서 일하던 현장노동자 대부분은 정상 임금으로는 생활하기 힘들어 앞 다투어 야근이나 철야를 했다.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야근이나 철야가 곧 아르바이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일거리가 점점 떨어지면서 임금마저 밀리기 시작하자 야근이나 철야는 물론 낮에도 일거리가 없어 청소를 하거나 공장 운동장에 난 잡풀을 뽑기 일쑤였다.

그렇다 해도 당시 회사는 일거리가 없다는 이유로 현장노동자들에게 함부로 사직을 강요하거나 공장 문을 닫지 못했다. 왜냐하면 창원공단 안에 입주해 있는 대부분 공장들이 정부 지원을 받고 있는 방위산업체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현장노동자들 80%정도가 병역특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공장으로서는 어쩌지 못한 채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었다.  

낮달그때 그 꿈은 저 낮달이 되어 떠돌고 있을까 ⓒ 이종찬


지독한 돈가뭄에 허덕이던 1979년 '공단보릿고개'

일거리가 사라지면서 임금이 3~4개월씩 밀리게 되자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하는 방세가 밀려 툭 하면 집주인과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쌀까지 바닥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현장노동자들은 임금 일부를 미리 받아 써는 '가불'이란 걸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장에서도 노동자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알고 있었던지 경리과에 가불 신청을 하면 쉬이 가불을 해주었다. 하지만 가불은 한 달 치 임금의 30% 이상은 할 수가 없었다. 까닭에 노동자들은 4개월 치 밀린 임금을 계산, 한 달 치 임금의 120%까지 가불을 하곤 했다. 그렇게 가불을 하다 보니 간혹 한 달 치 임금이 나와도 받을 게 한 푼도 없었다.

나 또한 그동안 피붙이처럼 아끼며 조금씩 붓던 적금이나 계를 깰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병역특례를 받고 있는 나와 동료들은 행여 공장 문을 닫으면 어쩌나 조바심을 내야 했다. 공장 문을 닫게 되면 병역특례를 받고 있는 나와 동료들은 일주일 안에 곧바로 군에 입대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수'라 불리며 국내 생산의 3~40%를 차지한다던 창원공단에 급기야 '공단보릿고개'란 지독한 돈가뭄이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설마~ 설마~' 하며, 조금만 더 기다리면 일거리가 몰려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번 찾아든 '공단보릿고개'는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공단보릿고개'가 그렇게 나와 동료들의 허기진 허리를 콱콱 졸라매기 시작하자 저마다 살 길 찾기를 궁리하기 시작했다. 동료 중 몇몇은 밀린 임금을 담보로 달러빚을 내 공장 주변에 조그만 생맥주집을 내기도 하고, 포장마차를 열기도 했다. 게 중에는 퇴근한 뒤 창원공단 주변 길거리에 쪼그리고 앉아 과일이나 생필품을 파는 동료들도 있었다. 

돈이 씨가 말라뿟다 아이가

"뭐어? 니가 장사를 한다꼬? 그것도 술집을? 그라다가 회사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모 우짤라꼬 그라노?"
"한 달 안에 꼬옥 갚을 끼다. 한 달만 열심히 장사를 하모 그 돈보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 안 카나."
"요새 니가 월급을 안 갖다 주가꼬 돈이 씨가 말라뿟다 아이가."

나는 그때 어머니를 조르고 졸라 돈 50만 원을 타 낸 뒤 내가 다니는 공장 가까이 있는 외동마을에 주막식 카페 '그리메'라는 조그만 술집을 냈다. 그때 돈 50만 원은 꽤 큰돈이었다. 내 한 달 임금이 잔업 철야를 빼고 나면 15만 원이었으니까, 50만 원이란 돈은 세 달 치 임금이 넘는 돈이었다.

'주막식 카페'란 막걸리와 소주를 팔면서도 칵테일까지 파는 곳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참으로 멋진 아이디어였다. 특히 노동자들에게 있어서 화려한 조명과 값이 비싼 카페를 한번 가 본다는 것은 그림의 떡이었다. 까닭에 나의 포인트는 멋진 카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술값은 아주 싼 '술집'이었다. 이런 술집은 노동자들의 고급스러움에 대한 갈증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외동마을은 곧 철거를 앞두고 있던 터라 보증금과 집세가 아주 쌌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돈 50만 원으로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5만 원인 5평 남짓한 그 집을 얻었다. 그리고 고급스럽게 보이는 전등과 화려한 벽지, 칸막이, 여러 가지 액세서리 등을 달아 그야말로 카페 분위기가 나게 했다. 각종 주방기구와 그릇, 막걸리, 소주, 국산 양주 등도 주방에 가득 채웠다

우리는 오늘 주막식 카페 '그리메'로 간다

"뭐니뭐니 해도 술집은 홍보로 잘해야 된다카이."
"공장 1, 2동은 니가 맡고, 3,4,5동은 내가 맡을게."
"이 홍보 전단지를 다른 공장에도 좀 뿌려야 되는 거 아이가."
"우선 우리 공장부터 뿌려가꼬 반응부터 한번 살펴보고."

나는 그때부터 같은 공장에 다니는 동무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점심시간 때마다 공장 안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홍보 전단지를 뿌렸다. '술과 낭만이 그대를 부르는 곳-우리는 오늘 주막식 카페 그리메로 간다'는 제법 그럴싸한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홍보 전단지는 대 성공이었다.

홍보 전단지를 공장에 처음 뿌린 그날 저녁, 가게는 몇 번이나 자리가 가득 찼다. 같은 공장에 다니는 동무 서너 명이 주방과 홀에서 나를 도와주고 있었지만 술과 안주를 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공장의 조장과 반장, 계장, 과장까지 찾아와 내 등을 두드리며 '종종 올 테니까 열심히 해라'는 조언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자리가 없어, 술이 떨어져 못 팔 지경이었다. 하루 수입이 재료값, 집세 빼고 계산해 보니 대략 3만 원은 남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금빛 꿈에 부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장사가 잘 된다면 어머니에게 빌린 돈 50만 원은 물론 1년 안에 집도 한 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방을 담당하는 여종업원도 한 명 고용했다. '그리메'란 간판이 밤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여 간판에 멋지게 반짝이는 네온사인도 달았다. 의자가 좀 딱딱하다 하여 의자도 푹신한 걸로 몽땅 바꾸었다. 막걸리와 소주를 몇 박스씩 한꺼번에 주문하고, 칵테일용 싸구려 국산 양주도 몇 가지 더 추가했다.   

탱자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풋 탱자를 씹는 것처럼 씁쓰럼했다 ⓒ 이종찬


외상이 소까지도 잡아먹는다더니

"어이~ 오늘 마신 거 외상 좀 달아놓지?"
"계장님 앞으로 외상 장부 하나 만들어 놓을게예."
"야, 오늘 친구들끼리 너거(너희) 집에서 생일파티로 할라카는데 그어도 되지?"
"그래. 걱정 말고 매상이나 많이 올려줘."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나자 외상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밀린 임금을 받으면 외상값을 몽땅 갚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답답했던 것은 간혹 가뭄에 콩 나듯 한 달 치 임금을 받아도 밀린 외상값을 다 갚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외상을 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서로 빤히 아는 처지에서 그나마 다른 가게에 가지 않고 내 가게를 찾아준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했다. 날이 갈수록 들어오는 돈은 아주 적고, 외상값만 늘어나기 시작했다. 허울 좋은 장사였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나중에는 재료값마저 모자라 일수 돈을 빌려 쓰기도 했다.
 
돈가뭄이 또다시 들기 시작했다. 공장에서 밀린 임금 한 달 치가 나오면 재료값으로 나가기에 바빴다. 큰소리 땅땅 치며 어머니에게서 빌린 50만 원도 갚지 못했다. 급기야 나는 주방 일을 보던 여종업원을 한 달도 채 안 돼 내보내야 했다. 가게 수입은 겉으로 남고 안으로 곪는 형국이었다. 한 마디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그런 어느 날 하루는 뜬금없이 경찰이 가게에 들이닥쳤다. 경찰들은 다짜고짜 나를 "식품위생법 위반"이라며 창원경찰서로 끌고 가 유치장에 넣어 버렸다. 창원경찰서 유치장에서 날밤을 샌 나는 그 다음 날 담당 경찰관에게 조사를 받았다. 그 경찰관은 내게 가게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을 했기 때문에 합동단속반에 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술집 알바 하던 현장노동자, 졸지에 전과자 되다

벌금 30만 원에 훈방조치. 그날 나는 점심때가 되어서야 졸지에 전과자가 되어 풀려났다. 그것도 펄펄 뛰는 어머니와 공장 반장이 보증을 선 뒤에서야 말이다. 창원경찰서에서 나오면서 나는 공장 반장으로부터 "가게에 합동단속반이 뜬 것은 가까운 상가 술집에서 장사에 영향을 끼친다고 고발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랬다. 사실, 내가 가게를 열었던 외동 마을은 곧 철거될 곳이어서 허가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그 마을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경찰 또한 그 사실을 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발만 들어오지 않는다면 단속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생계형 범죄라나 뭐라나. 

그 때문에 나는 결국 가게 보증금 30만 원을 되찾아 벌금을 물었다. 그리고 외상값과 일수 빚까지 짊어진 채 가게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창원경찰서 합동단속반이 뜬 그날, 달러 빚을 내 작은 가게를 하거나 포장마차를 하고 있던 노동자 대부분이 합동단속반에 걸려 벌금을 물고 빚만 짊어진 채 가게를 닫아야 했다.

스무 살. 나의 첫 아르바이트는 그렇게 전과자란 오명만 남긴 채 끝이 났다. 그때 진 빚은 모두 합쳐 내 임금 일곱 달 치에 가까운 100여만 원이었다. '제2차 석유파동' 때 공장에서 임금이 밀려 시작했던 나의 첫 아르바이트. 그 아르바이트의 기억은 이명박 정부의 '新보릿고개'를 만난 지금, 뾰쪽한 탱자가시에 엄지손가락을 포옥 찔린 것처럼 더욱 아프고 쓰리다.
덧붙이는 글 "아르바이트 그 달콤 쌉싸래한 기억 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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