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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무식 해바라기들, 훗날 평가가 두렵지 않나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권력의 주문에 눈먼 사람들

등록|2008.07.23 13:17 수정|2008.07.23 13:17

▲ 방송통신위원회 앞에서 신태섭 이사 해임 항의 기자회견에 나서고 있는 '이명박정권방송장악저지행동' 소속 회원들. ⓒ 송주민


참으로 용감하고, 또 무식하다. 도통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하나 같이 잘 난 사람들이다. 공부 잘하고, 집안 좋고, 좋은 대학 나오고, 또 내로라하는 명성과 직책을 누렸거나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 사회의 엘리트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한결 같이 무식해지고, 더불어 용감무쌍함을 뽐낸다.

유재천 KBS 이사장, '공영방송 독립' 소신은 어디로 갔나

23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유재천 KBS 이사장이 최근 정연주 KBS 사장을 만나 "이제는 명예롭게 물러나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요청만 한 것도 아니다. "더이상 자진 사퇴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도 했단다. 보도 내용대로라면 퇴진을 요청했다지만, 지금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모양 사납게 그만두게 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이나 다를 바 없다.

유재천 이사장은 평생을 언론학을 해 온 사람이다. 그가 공영방송의 위상과 그 역할, 권력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모를 리 없는 사람이다. 그는 지난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내내 공영방송은 권력에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던 사람이다. 이들 권력과의 '불화' 때문에 편 주장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원로 언론학자로서 그의 주장은 경청할 대목이 있었다.

하지만 이게 뭔가. 그가 정연주 사장에 대한 이 정권의 사퇴 압력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그것이 KBS의 공영성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모를 리 없다. 그런 그인데, 정연주 사장을 만나 시청료 문제 등을 꺼내면서 그만두라고 했다고 하니, 정말 믿을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사실은 그가 김금수 전 이사장의 자리를 이어받을 때부터 그런 그에게 도대체 왜 그런 자리를 탐할까 하는 주변의 지적들이 있었다. 그 자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곳인지 뻔히 예견되는 상황에서 그런 자리를 선뜻 수락한 원로 언론학자의 처신과 행보를 안쓰럽게 바라 본 시선이 적지 않았다.

요즘 그 권한을 120% 뽐내고 있는 곳은 단연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이처럼 대단한 기관인 줄 어찌 알았으랴. 네티즌들의 '표현의 자유'에 일일이 선을 긋고, 저널리즘의 오랜 숙제이자 앞으로도 두고두고 고민해야 할 공정성의 쟁점을 단칼에 정리해버렸다. 그것만 두고 보자면 방통심의위는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더해 '검찰'의 권한까지를 합한 것 같다.

▲ 지난 7월 1일 서울 목동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전체회의에서 'PD수첩' 광우병 편의 제재여부와 일부 보수성향 언론 광고주를 대상으로 진행중인 온라인 불매운동과 관련한 포털 다음 내 업무방해 및 권리침해 심의안을 상정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황광모


조·중·동 광고주 압박운동 게시 글 등의 삭제 여부는 그 위법성의 판단은 물론 표현의 자유 문제에 시민운동·소비자운동으로서의 정당성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지극히 복잡하고 예민한 쟁점이다.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도, 그리고 설령 검찰일지언정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자면 치밀한 검토와 논의가 필요한 사안들이다. MBC 'PD수첩'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의 공정성과 객관성 문제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고 있는 만큼 방통심의위가 일도양단의 결정을 내리기 힘든 문제였다.

하지만 방통심의위 정부 여당 추천 위원들은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용감한 것인지, 무식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을 주도한 위원장이나 부위원장은 모두 내로라하는 언론학자 출신들이다. 위원들 가운데는 또 법조계의 유명인사도 끼어 있다.

방통위 위원들은 자신의 결정을 책임질 자신 있나

당장 궁금해진다. 과연 그들이 강단이나 법정에서도 그들이 내렸던 것과 같은 '판단'과 '결정'을 지금처럼 과감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그들은 지금까지 대학 강단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지금과 같은 결정을 내린 '판단의 기준'이 옳다고 주장해왔던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들은 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는 위원회 회의를 툭하면 비공개로 돌리고,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도 녹취록도 남기지 않는 그런 식으로 공적인 결정을 내려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방송통신위원회 위원들의 행보는 더 그렇다. 예정에도 없던 안건을 상정해 처리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어떻게 KBS 이사직 수행을 위해 대학의 해임 위협도 감수한 신태섭 KBS 이사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KBS 이사직에서 해임할 수 있는가? 그것도 교수 해직이 부당하다며 법적 소송을 진행중인 데도 말이다.

평범한 선남선녀들도 이런 순환논법이 얼마나 억지스러운지는 금세 알아차린다. 그런데 명색이 언론인 출신이고, 대학 교수 출신들인 방통위원들이 이런 황당한 논리를 그대로 밀어붙였다고 하니, 평소 그렇게 명민한 그들의 두뇌 구조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따지고 보면 사람은 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잘난 사람들일수록 그런 경우가 더 많다. 권력이라는 태양에 눈멀기 일쑤다. 온갖 언설로 그들은 그들의 해바라기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그 권력이 빛을 잃으면 그들의 해바라기는 축 늘어진 초라한 몰골을 여지없이 드러낼 것이다.

하루해는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인생은 짧다지만 또 얼마나 길고 긴 여로인가. 굳이 역사까지 들먹일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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