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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촛불 안에도 두 개의 사회 존재한다"

24일 <작은책> 공개강연 취재기

등록|2008.07.25 16:04 수정|2008.07.26 08:59

▲ 박노자 교수는 촛불집회 안에 있는 두 개의 사회를 해소하고 연대와 협력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오승주


드디어 방학이다. 방학을 졸업한 지 오래됐는데도 새삼 방학을 기다린 이유는 '그'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한국학) 교수. 그는 7월 5일 귀국하자마자 광화문을 찾아 '첫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했다. 24일 저녁 7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작은책 강당'에서 열린 작은책 특집 강좌에 박노자 교수가 7월의 강사로 초대됐다.

작은책 관계자는 박노자 교수의 이번 강의에 유난히 많은 사람이 몰렸다고 했다. 80석 규모의 강당에는 자리를 잡지 못해 뒤에 서서 강의를 들은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두 시간 넘는 시간 동안 박노자 교수는 특유의 화법으로 현 정부와 시민사회에 대한 사자후를 쏟아냈다.

촛불 속의 2중구조

▲ 월간 <작은책>은 매월 진보 성향의 지식인을 초빙해 대중을 향한 공개강연을 열고 있다. 9월에는 손석춘, 10월에는 우석훈 박사 등이 연사로 예정돼 있다. ⓒ 작은책

박노자 교수는 노르웨이에서 인터넷 생중계로 촛불집회를 보느라 여러 날 밤을 새웠다고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특히 "사람들이 가족이 아닌, 계층과 계급이 다른 타자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행진하는 모습은 가족주의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문화혁명과도 같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타자 중의 타자인 비정규직 문제와 촛불이 좀처럼 결합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쉬움을 표시했다.

이번 강연에서는 그 문제를 좀더 깊이 있게 다뤘다. 광우병과 비정규직 이슈 사이의 거리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박 교수는 그렇다면 의료민영화나 정권퇴진, 0교시 등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재개로 촉발된 촛불집회는 이명박 퇴진, 대운하 반대, 의료민영화 반대, 0교시 철폐 등 다양한 사회적 논의로 확장됐지만, 유독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만은 침묵했다고 주장했다. 박노자 교수는 이를 근거로 촛불집회를 주도하는 실질적인 힘이 중산층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들과 관련된 교육 문제나 의료민영화 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박노자 식 표현에 따르면 '미친 고용'의 문제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판단, 배제한다는 것이다.

지금 단식하고 있는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나 KTX 여승무원의 요구가 촛불집회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데, 이는 촛불을 주도한 중산층이 분산화된 사회체제에 이미 길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때문에 지금의 상황에서는 사회적인 연대가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박 교수는 이러한 중산층의 분산화, 파편화 덕분에 이명박이 이 위기를 넘어 미친 정책을 계속 밀어붙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오래된 이야기를 들지 않더라도 촛불은 사각을 보듬고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게 박 교수의 주장이다.

계급 의식 하나로 뭉친 유럽의 돌발파업 사건

▲ 작은책이 주최한 강연회에는 100명이 넘는 시민이 몰려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 오승주


고립된 파업과 고립된 투쟁은 오랫동안 끈질긴 투쟁을 해도 패배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또 지배세력에게 별로 위협될 것 없다. 만약 위협이 된다면 그들의 반발이 정치세력화 조직화까지 진전된 경우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지배세력의 장기적 지배구조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

결국 한국 지배세력에게 가장 도움을 주는 것이 반 헤게모니 세력이 지금까지 보여준 지리멸렬한 행동양태다. 진보세력이라고 해도 80년대의 지하서클과 같은 행동양태를 보이고, 그 안에서도 헤게모니 다툼을 벌이다가 분열된 양상이다. 재벌세력의 유일한 견제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진보정당이었는데 사실상 실패나 다름없다.

시민사회를 분자화시키고 파편화시키기 위해서 지배세력도 공을 많이 들였다. 한국의 고용시장은 국가가 주도해서 파괴했다. 파견근로나 비정규직 확대를 사실상 방관한 결과, 노동자 계층을 철저하게 구분하고 분리 통치시키게 됐다.

박노자 교수는 우리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집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10년간의 집권층은 보수 성향에 자유주의적 성향만을 약간 가미한 집단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 교수는 촛불 집회 내내 정당별 지지율 추세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이명박이 7%가 되더라도 한나라당은 33%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순치된 사회가 되었으며, 상당 부분의 노동자까지 거기에 포획됐다는 것이다.

한국은 철저히 이중구조, 즉 하나의 국가에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사회로 가고 있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지만, 반 헤게모니 세력 안에서도 이중 구조가 고착화되는 것은 매우 우려할 만한 문제라고 진단했다. 결국 약자들의 연대와 조직만이 현재의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깨뜨릴 수 있는데, 박노자 교수는 이에 시사점을 줄 만한 사례를 하나 소개했다.

2년 전에 유럽의 런던 히드로 공항. 갑작스런 파업으로 공항 전체가 멈춰져 하루 동안 가동이 안 됐다. 모두들 계획이 없었던 파업을 해서 항공사들에게 상당한 손해를 입혔다. 이 파업의 시작은 아주 작았다.

기내 승객들에게 소비되는 음식을 만드는 업체가 있었는데, 그 회사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영국에 사는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이었다. 그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투쟁을 하려고 했더니 회사는 정리해고를 해버렸다. 그 소식이 노조에 알려지자마자 아예 '백인 노동자'들은 노조 간부들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현장 조합원들끼리 자발적으로 파업을 했다. 그 정도로 연대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행동은 연대나 도덕 같은 단어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추론하기 어렵지 않다. 현지의 노동자들은 아시아 노동자들 다음 순위가 누가 될 것인지 잘 알고 있었을 뿐이다. 때문에 그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에다 외국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식 하나 때문에 행동을 한 것이다. 덧붙여 박 교수는 한국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위해 한번이라도 싸움을 한다면 세상이 바뀌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편 한국으로 귀국해 사회활동과 작품 활동을 계속 하는 게 어떠냐는 질문에 대해서 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자리를 찾기가 하늘에 별 따기와 같다고 말했다. 자신도 가족이 있는 마산에 정착하여 저술활동을 하고 싶지만 여건이 안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리더스가이드에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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