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꿈을 먹어버린 멧돼지
농민들의 피 땀을 보상할 현실의 법은 만들 수 없는가?
▲ 아래서 위로 찍은 고구마 밭 밭은 상당히 비탈진 곳이었다. 멧돼지에게는 방비막도 장애물도 소용없는 듯했다. ⓒ 홍광석
멧돼지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심산유곡 산골 마을의 일로만 치부했다. 서울 도심에 멧돼지가 나타났다는 보도를 봤지만 멧돼지의 실수쯤으로 여겼다. 심심치 않게 멧돼지가 출몰한다는 우리 마을 노인들의 이야기에도 그런 사실을 가까이 본적이 없으니 설마 전기불빛이 보이는 마을까지 내려와 설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우리 마을에서는 밤이면 멧돼지들이 마을의 으슥한 곳에 있는 고구마밭을 골라 난장판을 만들고 사라지는 일이 잦아졌다. 명색 나주시에 속하고 대도시인 광주가 인접해 있는 마을에서 멧돼지가 설치다니!
전남의 농촌 자치단체는 노인 인구 비율이 이미 20%를 웃돈다고 한다. 내가 자리 잡은 마을도 예외는 아니다. 총 28가구가 사는 마을인데 장가 못간 총각 혼자 사는 1가구를 제하면 거의 노인들뿐이다. 여성의 평균 수명이 길다는 사실이 맞는 것인지 우리 마을 역시 여성 노인의 수가 절대적이다. 실제 거주하는 노인 남자는 9명밖에 안 된다. 현재 72세의 노인이 이장을 하고 있다면 마을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50대 중반 아내가 각시라고 불리는 곳
노인들만 남은 마을, 50대 중반을 넘긴 내 아내가 각시라고 불리는 곳. 처음에는 우리를 땅이나 사두었다가 값 오르면 팔고 떠날 투기꾼으로 대하던 노인들에게 진심을 보여주기란 쉽지 않았다. 이제 마을 노인들과 마음을 터놓은 사이는 아닐지라도 지나온 세월 이야기도 하고, 가끔은 우리 일도 도와주고, 푸성귀라도 집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인들의 사는 형편이며 자식들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농촌의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다 맞는 말이다. 2년째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농촌의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도시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생활보호대상자로도 지정받지 못하고, 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지급되는 8만여원이 주 수입인 84세 노인의 안타까운 생활도 보고 있다.
도시에서 산다는 자식들 이야기만 나오면 다른 집 자식들만큼 가르치지 못한 것이 아직도 미안하다는 노인도 있다. 근근이 사는 자식들에게 용돈을 받기는커녕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지어서 가을이면 쌀과 고추, 참깨, 고구마라도 싸 보내고도 여전히 미안해하는 노인들을 보면서 나는 한국 어머니의 원형을 보는 듯했다.
대부분 여성 노인들은 평생 농사일에 시달려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허리도 온전하지 못하다. 병신이 될 때까지 허리 펼 날 없이 살았음에도 여전히 가난하지만 지금도 해만 뜨면 흙바닥을 기어 다니며 작물을 심고 가꾼다. 거역할 수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노인들, 나는 그런 노인들의 모습을 보면 마지막 남은 고혈을 쥐어짜면서 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그 어머니들의 고혈이 바로 민족의 저력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해봤다.
송 노인의 고구마 밭을 엉망으로 만든 멧돼지
▲ 위쪽에서 본 고구마 밭 노인은 고구마를 좋아하는 손자들을 생각하며 이 밭을 수 천번 오르내렸다고 했다. ⓒ 홍광석
그래도 이따금 찾아와 용돈이라도 주고 가는 자식을 둔 노인이나 작지만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진 노인들은 아픈 몸을 끌고 농사를 지어도 활기가 있다. 그렇다고 그런 노인들이 일반적인 도시 중산층 정도로 넉넉한 것은 아니다. 밥이며 푸성귀는 그런대로 먹는다지만 혼자 사는 노인 처지이기 때문에 비료와 농약은 외상도 안 통하고 전기, 전화요금은 몇 달 밀리면 끊기는 판이니 떼먹을 수도 없다. 또 당장 빨래하려면 비누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돈까지 자식들이 주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의 사정을 주로 듣고 상대하는 쪽은 아내다. 나는 그 옆에서 대강 듣는 편이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의 사정은 아내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지난 7월 28일, 고흥댁이라는 택호로 불리는 송노인이 아내를 부르더니 간밤에 자기가 심은 고구마밭이 멧돼지에게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미 당한 몇 집의 이야기를 곁들이고 우리 고구마밭 걱정도 하는 것이었다.
논 다섯 마지기 농사지어 자식들 조금 주고 먹을 것 남겨놓고 수매했더니 손에 떨어진 금액이 고작 90만원이더라고 했던 노인이었다. 남이 놀리는 비탈진 산밭을 빌려 고구마를 심어 손자들에게 주려고 했는데 종자를 받기도 어렵게 되었다며 걱정하는 노인을 따라 갔더니 이른 봄부터 가꾼 노인의 정성이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피해액이 20만원 이하라서 보상받을 수 없다?
멧돼지의 개체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환경 측면에서는 긍정적일 수 있다. 가정의 난방 이 화석 연료로 대체되면서 우리나라 산은 많이 푸르러졌는데 여름철이면 낙엽 관목이나 칡덩굴가지 우거져 다니던 길도 찾기 어렵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산에 온갖 짐승들이 많이 살고, 새들이 노래한다면 오죽 좋은 일인가!
그러나 짐승들의 증가를 반길 수 없는 측면도 있으니 산짐승들의 출몰로 인한 애잔한 농민들이 입는 피해가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농부병으로 허리가 자유롭지 못한 노인의 표정이 어둡기만 했다. 밭이랑에 풀 한포기 없이 맸던 정성, 가을이면 도시 자식과 손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할머니의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했던 희망, 그래도 남는 것은 장에 내어 쌈짓돈을 마련하면서 보람을 느끼려고 했건만 그런 꿈들이 하루저녁에 스러져 버린 일흔 두 살 할머니의 아픔을 누가 어떻게 보상할 수 있을 것인가. 농민들의 피해를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으로 계산 할 수 없다는 문제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장을 통해 읍사무소에 신고하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제(31일) 송노인을 만났더니 이장의 신고로 읍사무소에서담당 공무원이 어제(30일) 다녀갔지만 피해면적이 330㎡, 피해액이 20만원 이상이라야 보상도 받을 수 있다는데, 우선 피해면적이 미달이고, 피해액도 농수산부가 정한 기준에 미달되기 때문에 보상은 받을 수 없다고 했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공무원의 적법한 행위를 탓할 수는 없다. 아마 현장 실사를 나온 공무원도 농촌의 사정, 농민의 심정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금을 잃은 것보다 더 허탈해 하는 노인의 딱한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마음 한쪽의 서운함을 버릴 수 없었다. 피해면적이 330㎡, 피해액이 20만원 이상 되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법과 제도는 가난한 농민들은 아예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른 봄 고구마를 묻어 순을 기르고 다시 그 순을 땅에 옮겨 심고 일삼아 이랑의 풀을 뽑은 노고에 비하면 농민이 차지하는 소득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지난해 장에서 봤던 기억으로는 고구마 10kg 한 박스 소비자 가격이 1만원쯤 되었을 것이다. 옥수수는 한 개에 불과 300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기억한다.
모든 공산품에는 소비자 권장 가격이 박혀 있다. 공산품의 가격은 생산자가 결정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농민들은 자신들의 생산물에 가격을 결정하지 못한다.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맡겨버린 농산물 가격정책 때문에 농민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기나긴 시간 풍수해 등 자연재해는 물론 온갖 병충해와 풀과 싸워가며 가꾼 땀과 정성의 가치를 자신이 주장할 수 없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도 최소한 1000원 한 장이 없으면 구경하기도 어려우나, 밥 한 공기의 쌀 가격이 불과 200원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농민들은 그런 현실에 절망하고 농촌을 떠났을 것이다.
허리 굽은 노인들의 아픔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 산짐승들이 먹어치운 옥수수 민가가 빤히 보이는 곳까지 산짐승들은 달려들고 있다. 줄지어 섰던 옥수수는 겨우 3주만 남았다. ⓒ 홍광석
사실 산업화 과정 속에서 정부는 의도적으로 농민을 희생시켰다. 농민은 산업화 과정에서 필요한 저임금 노동자가 되고, 다시 도시의 저임금 노동자가 된 농민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노동자들의 고향에 사는 부모형제들이 희생을 강요당하는 농산물 정책이 악순환되면서 농촌은 죽어갔기 때문이다.
이제는 정부의 의도적인 정책에 의해 제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의 자식들은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의 늙은 부모들만 남아 정부에 버림받고 짐승들에게 당하며 겨우 맥을 유지하는 곳이 되었다. 나라에서는 농민들을 내팽개친 지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산 짐승으로부터 농작물을 지켜주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노인들은 그런 야박한 나라, 야박한 정치인들을 탓할 줄도 모른다. 매사를 자신의 팔자소관으로 돌리는데 익숙한 노인은 또 다시 체념하며 돌아설 뿐이다.
보이지 않는 산짐승들에게 어째서 어려운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고 원망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그렇다고 농업재해보험이 있는 줄 모르는 노인, 설사 알았다고 해도 보험에 들 형편이 안 되는 노인에게 그런 보험의 장점을 설명할 수도 없다.
한 마지기(330㎡) 밭에서 고구마를 얼마나 수확하는지는 정확하게 모른다. 10kg들이 스무 박스를 수확한다고 해도 돈으로 환산하면 20만원을 넘지 않을 것이다. 가진 사람들의 한 끼니 점심값도 못되는 돈일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자식에게 생색도 내고 손자들에게는 늙은 할머니의 체면을 세워줄 유일한 자랑거리었는데, 생색내고 자랑할 꿈이 무너진 것이다. 멧돼지가 먹어 치운 것은 고구마가 아니라 내년을 기약하기 어려운 노인의 정성과 꿈이었다. 그 꿈과 희망을 빼앗긴 허리 굽은 노인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아픔은 과연 누가 달래줄 것인가?
덧붙이는 글
폐허로 변한 고구마 밭, 3주만 남은 옥수수는 오늘날 농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버림받은 농촌의 모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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