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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51) 바람구멍

[우리 말에 마음쓰기 392] '장삿배'는 버리고 '상선'만 쓰는 한국사람

등록|2008.08.03 12:47 수정|2008.08.03 12:47
ㄱ. 바람구멍

.. 맨 처음에 적당한 크기의 공간이 생길 때까지 흙을 파내고 거기에다 뺑 둘러 흙벽을 쌓아 굵은 나뭇가지로 서까래를 해 얹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가마니를 덮고 다시 그 위에다 흙을 퍼올려 덮었다. 그 다음에 비로소 거기에 이엉을 덮어 초가지붕을 만들었다. 그런데 지붕의 한가운데다 미리 네모진 구멍을 남겨 놓아 통풍구를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는 네 개의 나무판자로 네모난 상자를 만들어 이 구멍에 끼워넣었다 ..  <애그니스 데이비스 김/이정자 옮김-한국에 시집온 양키 처녀>(뿌리깊은 나무,1986) 74쪽

서양사람이 한국에 시집을 왔기에 한국사람 사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하나하나 적바림해 놓을 수 있구나 싶습니다. 우리들은 늘 이곳에 살기 있기 때문이기도 할 터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적바림해 놓는 일이 몹시 드뭅니다. 수많은 사진이 나오고 그림이 나오고 글이 나오지만, 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사진과 그림과 글, 책이든 영화든 만화이든, 우리 삶을 담아낸 작품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적습니다. 학문으로 살피든 문학으로 담든 예술로 꽃피우든 어떻게 하든.

생각해 보면,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찬찬히 돌아보는 일이 드물다 보니, 우리가 늘 쓰는 말과 글을 덜 살피게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과 글을 제대로 안 살피는 버릇이 몸에 굳어지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말하거나 대충 글쓰면서 우리 나름대로 우리 말 문화를 북돋우지 못하지 않나 싶기도 해요.

 ┌ 바람구멍
 │  (1) 바람이 들락날락하는 구멍
 │  (2)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늘 나오는 구멍이나 바위틈
 ├ 구멍
 │  (1) 뚫거나 뚫린 자리
 │  (2) 어려움을 헤치거나 벗어나갈 길
 │  (3) 허술한 구석이나 빈틈
 │  (4) 앞뒤 말이 맞지 않는 곳
 │
 └ 통풍구(通風口) : 공기가 통하도록 낸 구멍

보기글을 살펴봅니다. “네모진 구멍”을 남겨 놓아서 ‘통풍구’를 만든다고 합니다. ‘통풍구’는 “공기가 드나들도록 마련한 구멍”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네모진 구멍”은 ‘공기가 드나드는 네모난 구멍’인 셈이네요.

 ┌ 공기가 드나드는 구멍 : 공기구멍
 ├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 : 바람구멍
 ├ 물이 드나드는 구멍 : 물구멍
 └ 불이 나가는 구멍 : 불구멍

국어사전을 찾아보아도 그렇고, 보기글을 보아도 그렇고, ‘구멍’을 만든다고 하면서 ‘口’라는 한자를 빌어 옵니다. 공기이든 바람이든 드나들도록 한다면서 ‘通風’이라는 한자를 빌어 옵니다.

우리 나름대로 한결 수월하고 알맞춤하게 새 낱말을 지을 생각을 못합니다. 바람이 드나드는 구멍을 만든다고 한다면 ‘바람구멍’이라 하면 될 텐데(국어사전에도 이 낱말은 실려 있습니다), 굳이 ‘바람구멍’을 한자로 옮겨서 ‘通風口’로 적어야만 했는지 궁금합니다.

 ┌ 숨구멍
 └ 기공(氣孔)

고등학교였나 중학교였나, 학교에서 처음 생물을 배울 때 ‘기공’이라는 말을 듣고 참 어려웠습니다. 공기놀이할 때 그 ‘공기’도 아니고, 우리가 마신다는 ‘공기’를 뒤집은 말도 아니고, ‘기공’이 뭔가, 기계공고를 줄여서 ‘기공’이냐 뭐냐 하면서 뒷통수를 긁적였습니다. 요즈음도 이 ‘기공’이라는 말을 쓸까요? 아니면 ‘숨구멍’이라는 우리 말을 잘 살려서 쓰고 있을까요?

ㄴ. 장사배/장삿배

.. 넓다란 항구에는 작은 산 덩어리같이 큰 외국 배들이 여러 척 떠 있었어요. 열 척도 넘어요. 스무 척 가까이 있었어요. 코펜하겐에서 온 덴마크의 장사 배 여러 척, 놀웨이 돛단 배 한 척, 영국에서 온 멋진 욧트가 한 척도 그 중에 끼어 있어요 ..  <욘 스웬선/이석현 옮김-논니와 만니의 모험>(성바오로출판사,1969) 14∼16쪽

퍽 오래 묵은 어린이책을 들춰보다가 ‘장사 배’라는 낱말을 봅니다. 이때에는 ‘장사 배’가 한 낱말이 아니었는지 띄어서 적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한글학회-큰사전>(1957)을 뒤적입니다. 이때에는 안 실립니다. 다음으로, <신기철,신용철-새 우리말 큰사전>(1974)을 뒤적입니다. 이때에는 실립니다. 실리는데, “장삿배 = 상선”으로 풀이가 달립니다.

 ┌ 상선(商船) : 삯을 받고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데에 쓰는 배
 ├ 상박(商舶) = 상선(商船)
 ├ 고박(賈舶) = 상선(商船)
 ├ 고선(賈船) = 상고선(商賈船)
 └ 상고선(商賈船) : 장사할 물건을 싣고 다니는, 그리 크지 아니한 배

국립국어연구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1999)을 뒤적이니, ‘상선’ 말고도 ‘상박’이니 ‘고박’이니 ‘고선’이니 ‘상고선’이니 하는 낱말이 더 실려 있습니다. 모두 같은 말입니다. 한자는 한 마디씩 다르지만, 하나같이 “장사하는 배”, 한 마디로 ‘장삿배’를 가리킬 뿐입니다.

 ┌ 배
 └ 선박(船舶)

우리 말은 ‘배’입니다. ‘배’를 한자말로 옮기면 ‘船舶’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 말씀씀이를 보면, “배를 뭇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고, “선박을 건조(建造)”한다는 말만 있습니다. ‘배무이’라는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조선(造船)’이라는 말만 떠돕니다. ‘배무이터’ 또한 쓰이지 않고 ‘조선소(造船所)’만 쓰입니다.

 ┌ 장사 + 배 = 장삿배
 └ 商(장사) + 船(배) = 商船

우리 배무이 문화가 자취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으니, 배무이와 얽힌 낱말뿐 아니라 ‘배’라는 낱말마저 사라져야 할 판입니다. ‘배 船’이고 ‘배 舶’이지만, ‘배’라고는 말할 줄 모르고 ‘船舶’이라고만 말할 줄 압니다.

신문에서도 방송에서도,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사회에서도 역사에서도, 우리는 다른 이 손이 아닌 우리 두 손으로 우리 말을 내동댕이칩니다. 누가 시키지 않았고 누가 억지로 밀지 않았으나,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까뭉갭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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