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건국 과정을 바라보는 사대주의적 시각
[서평]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 건국절 논쟁에 즈음하여
남북한 건국 60주년
2008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다. 벌써부터 학생동원 운운하는 것을 보면 현 정부는 국가의 환갑을 맞아 아무래도 그 기념식을 거창하게 치를 모양이다. 최근 불거진 소위 '건국절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겐 8월 15일이 1945년 광복보다는 1948년 건국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한반도 역사의 유일한 적자로 주장하는 그들의 역사관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귀결이며, 이념적인 민족보다는 현실적인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국가주의의 발로이기도 하다.
한편 2008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 60주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관례를 보건데 북한 역시 그 기념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듯싶다. 남한정부가 건국 60주년을 떠들썩하게 꾸민 이상, 북한 역시 그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라도 그에 못지않은 규모의 세리머니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의 역사관에 따르면 45년 8월 15일은 미완의 해방일 뿐, 아직 남조선은 제국주의 치하에서 혁명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므로 광복절보다는 혁명의 기지가 건국된 9월 9일이 더 중요한 날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반도 내 두 개의 국가가 자국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건국일을 경쟁적으로 기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은 분명 착잡하고 안쓰러운 일이다. 결국 정통성에 대한 남북한의 강한 집착은 강한 콤플렉스의 소산인 바, 그만큼 자신들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북한은 현실과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서로를 인정할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양측 모두 그 탄생 과정에 있어서 두 '괴뢰' 중 하나가 없어져야지만 온건한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는, 상호간의 부정을 전제로 건국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국가는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 휴전 상태일 뿐, 전쟁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 다행히 동구권 붕괴 이후 두 국가는 서로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그 괴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생존 자체를 그 목적으로 하는 북한과 평화를 전제로 통일비용을 줄이고 좀 더 값싼 노동력과 자원, 그리고 넓은 시장을 원하는 남한과의 만남. 결국 남북합의서나 6·15 정상회담 등은 이와 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타협의 소산이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완화되어 가던 남북 간의 관계는 최근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주지하다시피 다시 경색되어 가고 있다. 비록 실용을 외치지만 정통성이나 대미관계 등에 있어서는 오히려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고수해온 이전 정부들과 달리 남북 간 상호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북한이 그들의 정권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상호주의를 백안시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인 바, 결국 현재 남북관계는 90년대 초반 핵 위기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하듯이 혹자들은 최근 건국 60주년을 맞아 남북한의 정통성 문제를 다시금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지닌다. 비록 해묵은 논쟁이지만 다시 긴장감이 감도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정통성 문제는 가장 본질적이며 핵심적이며, 따라서 그 논쟁 자체만으로도 내부에서 피아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소개될 저서<[비록] 평양의 소련군정>(김국후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은 그 정통성 논쟁의 대표적인 글이다. 저자 김국후는 그동안 발표되지 않았던 구소련의 방대한 비밀문서들을 인용해 북한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북한의 정통성을 훼손하여 남한의 정통성을 세우자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평양의 소련군정>이 조선일보 방일영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모든 것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바, 저자의 주장은 결국 조선일보의 주장과도 그 맥이 닿아 있다.
소련의 위성국가 북한
저자 김국후가 방대한 구소련의 비밀문서를 뒤져 증명코자하는 사실은 단 한가지이다. 바로 북한이 전적으로 소련군정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사실.
저자는 남한이 건국 과정에 있어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것과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100% 소련의 의도에 의해 탄생된 꼭두각시 정권이라는 것이다. 비록 현재 북한은 주체적인 역사를 주장하며 건국에 있어서 김일성의 활약을 중시하고 붉은 군대의 영향을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을 소련에서 결정했으며 따라서 북한 정권은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북한의 건국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마다 소련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주목한다.
해방 뒤 일본이 나가고 공백이 되어 버린 한반도에 처음부터 민주기지로서 위성국을 세우고자 했던 소련의 계획에서부터, 소련이 통제가 쉽지 않은 '당 중앙' 박헌영보다는 그들에게 충실한 김일성을 선택하여 제88정찰여단에서 교육을 시킨 사실, 소련이 북한 단독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김구·김규식이 참가했던 남북 연석회의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진행했던 사실, 북한의 헌법이나 내각 등 그 모든 것을 소련이 만들었던 사실 등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나열하여 북한 건국에 있어서 소련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물론 현재의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북한의 역사서술을 감안할 때, 구소련의 방대한 자료를 해석하여 많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해방정국 시기 한반도 이북의 역사는 그 태반이 우리에게 암흑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지만 그 전제조건은 분명 그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사료의 획득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한반도 이북의 모든 상황을 구소련의 자료에 근거하여 북한의 건국이 모두 소련의 의중대로 이루어졌다고 일면 평가하는 저자의 주장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비록 해방정국 소련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다고 할지라도 강대국 중심의 역사해석은 실제로 역사를 만들어간 한반도 내부의 에너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역시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를 윤색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리 소련의 북한 건국 계획이 용의주도했다한들,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 없이 건국은 불가능하다. 비록 지금보다 그 시대의 민의가 호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북한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건립되는 데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소련의 기획이었다는 주장은 또 하나의 과도한 사대주의적 사고일 수밖에 없다.
북한 건국에 대한 또 다른 시각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 지역에 김일성을 위시한 정권이 쉽게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 때문이었다. 하나의 국가를 건립하는 데 있어서 그 중심을 이루는 전위들이나 엘리트도 중요하지만 결국 건국의 기본전제는 그 구성원의 동의와 지지다.
이는 미국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며 괴뢰정부로서의 남한을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아무리 미국이 용의주도하고 남한의 위정자들이 악랄한들 그것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었겠는가.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은 해방 이후 어쨌든 독립 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던 민중들의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남한 인구 95%가 5·10 총선거에 참여했음은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한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북한의 건국이 당시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한과 마찬가지로 독립국가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물론 당시 민중들의 성향이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연구도 있지만 지금이나 당시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에 대한 민중들의 지식이 정치하지 않은 바, 북한 건국에 대한 기대는 본질적으로 독립국가 지지에 가깝다. 결국 국가의 정체성이 사회주의가 되었든 자본주의가 되었든 당시 민중들에 중요한 것은 독립국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친일 청산까지 확실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 당시의 민중들이 북한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의 전격적인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당시 인구의 90% 이상이 농민이고 일제 강점기 지배층의 수탈이 토지를 통해 이루어진 이상, 북한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정책은 민중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만큼 해방의 기쁨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던 주요 기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전격적인 토지개혁과 친일파 척결은 결국 당시 북한 사회를 균질하게 만들었다. 위 정책들은 당시 이북에 남아있던 지주층이나 종교인, 자본가 등을 월남하게끔 만들었고 이로 인해 이질적인 세력이 사라지자 북한의 정책은 더 급진적이고 철저하게 진행되었고 그만큼 북한의 건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각 정치세력이 할거했던 서울과 달리 평양은 붉은 군대의 진출 이후 쉽게 균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사분란하게 펼쳐졌던 정책들은 많은 이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자료가 태부족한 해방정국의 북한 실상을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한계 역시 분명한 이상 연구자는 자료 참조 시 좀 더 많은 비교를 해야 할 것이다.
2008년은 대한민국 건국 60주년이다. 벌써부터 학생동원 운운하는 것을 보면 현 정부는 국가의 환갑을 맞아 아무래도 그 기념식을 거창하게 치를 모양이다. 최근 불거진 소위 '건국절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들에겐 8월 15일이 1945년 광복보다는 1948년 건국으로서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한반도 역사의 유일한 적자로 주장하는 그들의 역사관으로 볼 때 피할 수 없는 귀결이며, 이념적인 민족보다는 현실적인 국가가 더 중요하다는 국가주의의 발로이기도 하다.
▲ <평양의 소련군정> ⓒ 한울
한반도 내 두 개의 국가가 자국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건국일을 경쟁적으로 기념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것은 분명 착잡하고 안쓰러운 일이다. 결국 정통성에 대한 남북한의 강한 집착은 강한 콤플렉스의 소산인 바, 그만큼 자신들의 정통성이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북한은 현실과 상관없이 태생적으로 서로를 인정할 수 없는 관계임이 분명하다. 양측 모두 그 탄생 과정에 있어서 두 '괴뢰' 중 하나가 없어져야지만 온건한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는, 상호간의 부정을 전제로 건국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국가는 현재까지도 공식적으로 휴전 상태일 뿐, 전쟁 진행 중인 것이다.
그러나 이론은 이론이고 과거는 과거일 뿐, 다행히 동구권 붕괴 이후 두 국가는 서로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그 괴리를 줄여오고 있었다. 생존 자체를 그 목적으로 하는 북한과 평화를 전제로 통일비용을 줄이고 좀 더 값싼 노동력과 자원, 그리고 넓은 시장을 원하는 남한과의 만남. 결국 남북합의서나 6·15 정상회담 등은 이와 같은 현실적인 필요에 따른 타협의 소산이다.
세계적으로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완화되어 가던 남북 간의 관계는 최근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주지하다시피 다시 경색되어 가고 있다. 비록 실용을 외치지만 정통성이나 대미관계 등에 있어서는 오히려 매우 이데올로기적인 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고수해온 이전 정부들과 달리 남북 간 상호주의를 천명한 것이다. 북한이 그들의 정권 존립 자체를 흔들 수 있는 상호주의를 백안시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인 바, 결국 현재 남북관계는 90년대 초반 핵 위기 이후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반영하듯이 혹자들은 최근 건국 60주년을 맞아 남북한의 정통성 문제를 다시금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분명한 정치적 의도를 지닌다. 비록 해묵은 논쟁이지만 다시 긴장감이 감도는 남북관계에 있어서 정통성 문제는 가장 본질적이며 핵심적이며, 따라서 그 논쟁 자체만으로도 내부에서 피아를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소개될 저서<[비록] 평양의 소련군정>(김국후 지음, 한울아카데미 펴냄)은 그 정통성 논쟁의 대표적인 글이다. 저자 김국후는 그동안 발표되지 않았던 구소련의 방대한 비밀문서들을 인용해 북한의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북한의 정통성을 훼손하여 남한의 정통성을 세우자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평양의 소련군정>이 조선일보 방일영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모든 것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바, 저자의 주장은 결국 조선일보의 주장과도 그 맥이 닿아 있다.
소련의 위성국가 북한
저자 김국후가 방대한 구소련의 비밀문서를 뒤져 증명코자하는 사실은 단 한가지이다. 바로 북한이 전적으로 소련군정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사실.
저자는 남한이 건국 과정에 있어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것과 북한이 소련의 지원을 받은 것은 그 차원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100% 소련의 의도에 의해 탄생된 꼭두각시 정권이라는 것이다. 비록 현재 북한은 주체적인 역사를 주장하며 건국에 있어서 김일성의 활약을 중시하고 붉은 군대의 영향을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을 소련에서 결정했으며 따라서 북한 정권은 정통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저자는 북한의 건국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마다 소련이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 주목한다.
해방 뒤 일본이 나가고 공백이 되어 버린 한반도에 처음부터 민주기지로서 위성국을 세우고자 했던 소련의 계획에서부터, 소련이 통제가 쉽지 않은 '당 중앙' 박헌영보다는 그들에게 충실한 김일성을 선택하여 제88정찰여단에서 교육을 시킨 사실, 소련이 북한 단독 정부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김구·김규식이 참가했던 남북 연석회의를 처음부터 기획하고 진행했던 사실, 북한의 헌법이나 내각 등 그 모든 것을 소련이 만들었던 사실 등 저자는 이 모든 것을 나열하여 북한 건국에 있어서 소련의 절대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물론 현재의 필요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북한의 역사서술을 감안할 때, 구소련의 방대한 자료를 해석하여 많은 사실을 그대로 기록하려는 저자의 노력은 존중되어야 한다. 해방정국 시기 한반도 이북의 역사는 그 태반이 우리에게 암흑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역사는 해석의 문제라지만 그 전제조건은 분명 그 해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사료의 획득에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시 한반도 이북의 모든 상황을 구소련의 자료에 근거하여 북한의 건국이 모두 소련의 의중대로 이루어졌다고 일면 평가하는 저자의 주장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비록 해방정국 소련의 힘이 절대적으로 컸다고 할지라도 강대국 중심의 역사해석은 실제로 역사를 만들어간 한반도 내부의 에너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역시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를 윤색할 수 있지 않은가.
아무리 소련의 북한 건국 계획이 용의주도했다한들, 광범위한 민중의 지지 없이 건국은 불가능하다. 비록 지금보다 그 시대의 민의가 호도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엄연히 북한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건립되는 데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소련의 기획이었다는 주장은 또 하나의 과도한 사대주의적 사고일 수밖에 없다.
북한 건국에 대한 또 다른 시각
해방 이후 한반도 이북 지역에 김일성을 위시한 정권이 쉽게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 때문이었다. 하나의 국가를 건립하는 데 있어서 그 중심을 이루는 전위들이나 엘리트도 중요하지만 결국 건국의 기본전제는 그 구성원의 동의와 지지다.
이는 미국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며 괴뢰정부로서의 남한을 주장하는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아무리 미국이 용의주도하고 남한의 위정자들이 악랄한들 그것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성립되었겠는가. 결국 대한민국의 건국은 해방 이후 어쨌든 독립 국가를 세우고 싶어 했던 민중들의 열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분단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남한 인구 95%가 5·10 총선거에 참여했음은 이를 보여준다.
따라서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는 김일성의 항일운동에 대한 진위는 차치하더라도 북한의 건국이 당시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한과 마찬가지로 독립국가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물론 당시 민중들의 성향이 사회주의에 가까웠다는 연구도 있지만 지금이나 당시나 사회주의, 자본주의 등에 대한 민중들의 지식이 정치하지 않은 바, 북한 건국에 대한 기대는 본질적으로 독립국가 지지에 가깝다. 결국 국가의 정체성이 사회주의가 되었든 자본주의가 되었든 당시 민중들에 중요한 것은 독립국가 그 자체였던 것이다. 게다가 북한은 친일 청산까지 확실하지 않았던가.
또한 그 당시의 민중들이 북한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북한의 전격적인 토지개혁 때문이었다. 당시 인구의 90% 이상이 농민이고 일제 강점기 지배층의 수탈이 토지를 통해 이루어진 이상, 북한의 토지 무상몰수 무상분배 정책은 민중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만큼 해방의 기쁨을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던 주요 기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전격적인 토지개혁과 친일파 척결은 결국 당시 북한 사회를 균질하게 만들었다. 위 정책들은 당시 이북에 남아있던 지주층이나 종교인, 자본가 등을 월남하게끔 만들었고 이로 인해 이질적인 세력이 사라지자 북한의 정책은 더 급진적이고 철저하게 진행되었고 그만큼 북한의 건국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각 정치세력이 할거했던 서울과 달리 평양은 붉은 군대의 진출 이후 쉽게 균질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일사분란하게 펼쳐졌던 정책들은 많은 이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은 남북분단으로 인해 자료가 태부족한 해방정국의 북한 실상을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한계 역시 분명한 이상 연구자는 자료 참조 시 좀 더 많은 비교를 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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