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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여름, 해미의 하늘은 깨끗했다

[밀짚모자의 답사여행 이야기] 해미

등록|2008.08.09 18:53 수정|2008.08.09 18:53
서산을 지나 운산을 거쳐 구불구불한 지방도를 다급하지 않게 뒤 쫒아왔다. 오는 길에 바라본 낮은 언덕과 산의 풍경이 매우 이색적인 시선의 질감으로 느껴졌다.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진 푸른 초원의 부드러운 굽이침이 반복적으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얼마 간 달려왔는지 농협중앙회 가축개량사업소라는 푯말이 눈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초록빛이 만발하게 깔린 목장의 평화로운 땅과 푸르게 짙은 하늘이 맞닿은 교접의 선을 감상할 수 있었다.

해미읍성1쌍둥이 딸내미가 해미읍성 아래 앉아있다. ⓒ 이성한





이윽고 눈앞에는 완만한 형태로 하나의 마을을 포근하게 둘러친 평지의 성곽이 나타났다. 큰 돌이 아래로 가고, 중간 돌이 중간에 놓이고, 작은 돌이 위로하여 순조롭게 쌓아진 아담하고 단아한 성벽이었다. 이름 하여 '해미읍성'이라고 했다.

충남 서산시 해미읍에 위치한 해미읍성은 성곽 길이 1.8km, 높이 5m, 면적 약 20만㎡ 규모로 조성된 평지 석성으로 조선시대 읍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읍성의 남문인 진남문의 성루에 올라 성벽이 둘러치고 있는 안 쪽 공간의 모양새와 행색을 관찰했다. 낮은 평지를 감싼 둥근 원형의 둘레와 군데군데 소박하게 보이는 옛 관아 건물을 비롯한 몇 채의 한옥 집들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읍성의 밖으로도 시선을 쪼개었다. 동북쪽에는 멀찌감치 지켜보며 읍성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가야산과 상왕산의 자락이 든든하게 서 있었다.

해미읍성의 아이들쌍둥이 딸내미들이 뜨거운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읍성의 느낌을 만끽한다. ⓒ 이성한



읍성의 모습은 몹시 평화로운 이미지였다. 가만가만 둘러보았지만 내 눈에는 꼭 사람들의 커다란 놀이마당처럼 오붓하게 느껴졌다. 이탈리아에는 콜로세움이 있다지만 해미읍성에는 오래 전 마을 사람들의 삶과 생활의 자취가 벤 그 어떤 분위기가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성벽에는 표면을 오밀조밀 덮고 있는 초록 담쟁이의 싱싱한 번창이 있었고, 아기자기한 돌과 풀의 조화로운 공존이 보였다. 성벽의 돌은 부담 없이 넉넉한 등을 내어 주었고, 초록 담쟁이는 파릇한 그의 모든 손바닥을 꼼꼼히 펼쳐 한 여름 내리쬐는 뜨거운 뙤약볕으로부터 성벽의 돌을 가려 주었다.

성벽의 아래로 내려가 주변을 살펴보았다. 성벽의 안 쪽에 산발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해 머리를 풀어헤친 미루나무 한 그루의 뜨거운 절규가 있었다. 나무는 너무나 맑은 하늘과 쨍쨍한 뙤약볕에 대한 거친 반항처럼, 매우 강렬한 모습으로 그 곳에 서 있었다.

해미읍성2너무나 명징한 하늘아래 해미읍성이 있었다 ⓒ 이성한


나는 징그럽도록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삼복 여름날의 달궈진 공기를 할 수 없이 들이켰다. 가슴에 숨이 컥컥 막히는 듯한 거북하고 답답한 호흡이었다. 하지만 나는 명징한 하늘아래 숨죽인 채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열기를 허공으로 발산하며 그 자리에 기필코 있는 해미읍성의 조신한 모습을 끝내 바라보았다.

오늘의 햇빛은 맑고 투명했지만, 그늘이 아닌 곳에서 일을 하거나 걷는 사람들을 힘들고 지치게 했다. 오늘의 햇빛은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반짝거렸고 날카로웠다.

해미의 하늘과 막내딸그 해 여름 해미의 하늘아래 막내딸이 바람을 맞는다. ⓒ 이성한

성루에서의 휴식뜨거운 열기와 후덥한 공기를 피해 성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 이성한



성루의 그늘에서 하늘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없었지만, 마치 있었던 것 같은 환상으로 떠오르는 1866년 병인년의 기억이었다. 해미읍성 한 복판 쯤에 서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눈에 보였다. 나무는 조선말기 고종임금 시기에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다가 매달았고, 무참히 고문했던 슬픈 박해의 이력이 나이테로 새겨진 고목이었다.

사람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나는 지독하게 맑고 쨍쨍한 한여름 해미읍성에서 스러지고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생각했다. 그들이 죽어가야만 했던 당시 조선의 역사를 생각했다.

"아, 불쌍한 조선의 순교자들이여!"

나는 조선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읍성을 시로 표현한 어느 시인의 이야기를 가만히 눈을 감고서 더듬거려 읊어 보았다.

해질 무렵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당신은 성문 밖에 말을 잠시 매어두고
고요히 걸어 들어가
두 그루 나무를 찾아보길 권한다.
...
언젠가 해미읍성에 가시거든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사이를
걸어보실 일입니다. 

나희덕<해미읍성에 가시거든>중에서 

나는 해미읍성을 떠나 근처에 가까이 있는 천주교 성지로 갔다. 둥근 돔 형태로 세워진 건물과 높다란 망루처럼 세워진 건축물의 조형적 구성은 빼어났다. 현대적이지만, 전통적 요소를 조화롭게 안배한 건물의 디자인과 배치가 단 번에 눈길을 잡아당겼다. 본당 건물 정면으로 들어서니 양팔을 한껏 벌려 가슴을 열어놓으신 하얗게 순결한 성모 마리아께서 계셨다. 오늘따라 지독하게 하얀 백색의 햇빛은 마리아의 성의에 내려 나를 눈부시게 했다.

해미 천주교성지천주교 성지 건물의 모습은 신령스러웠다. ⓒ 이성한

성모 마리아와 딸가슴을 펼쳐 '내게 오라'시는 성모 마리아처럼 딸내미는 팔을 벌려 하늘을 향했다. ⓒ 이성한




본당의 건물 아래로 걸어들어 갔다.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없는 한산한 침묵과 고요함이 있어 좋았다. 아니 그 곳은 숙연하고 신령스러웠다.

천주교 성지 옆으로는 작은 해미천이 흐르고 있었다.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일일이 처형하는 것이 어려워 해미천에 구덩이를 파고 한꺼번에 생매장하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비극의 물가였다. 그 물가에 백색의 햇빛과 청한 하늘빛이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는 명징함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1866년부터 1872년 사이 천주교 박해 당시 1000여명의 신자가 생매장 당한 이 곳은 천주교인들의 순례가 끊이지 않는 순교성지가 되었다. 나는 본당의 건물 아래 안쪽으로 서서히 스며들어가며 비감과 긴장이 서린 참배공간을 들렀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감정으로 전해져 오는 슬픔과 상처의 그림자는 진하고 깊숙하게 내게 다가왔다.

물 속에 몸을 담그신 성모마리아물빛 그림자에 어린 사람들의 죄악과 세상의 혼탁함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 이성한



참배공간을 얼마 지나니 작은 연못이 있었다. 나는 연못이 있는 아래로 내려가다 그만 섬칫 순간적인 놀라움을 느끼고 말았다. 연못 속에는 백색의 체광을 빛으로 발하며 용서와 사랑을 머금은 채 숭고한 미소를 짓고 계신 신비로운 성모 마리아께서 홀로 계셨다. 마리아님은 못 속에 스스로 몸을 담그고서 물빛에 비친 사람들의 죄악과 세상의 혼탁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 분의 슬픔 어린 시선을 감히 마주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나는 두 손을 모아 마리아님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서 뒤돌아섰다. 나는 걸어가며 한 순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무작정 돌아보지 않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몇 발짝 걸음 뒤에서 환청으로 들리는 그 분의 음성을 귓가에서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형제여, 언제나 평화롭고 마음이 고요하기를… 잘 가시오!"

덧붙이는 글 지난 8월 3일 답사여행 다녀온 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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