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98] 서재필의 만행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독립협회의 위선
김영세는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망한 원인을 다산 정약용에서부터 갑신정변에 이르는 친일 개화파에서 찾아, 조카 김문수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정화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갑신정변의 뒤를 잇는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다. 그는 독립협회의 간부라는 사람들의 행적을 조사해 보았다. 독립협회는 고문 서재필, 회장 안경수, 부회장 윤치호(나중에 회장됨), 위원장에 이완용 등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매국노에 가까운 행적을 보이고 있었다.
회장단 중에서 이완용과 윤치호에 대해서는 이미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안경수(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민 사람이었다. 그 밖의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더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밖에는 없었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대한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모든 일본인들은 일본이 조선에 독립문을 세워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토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김영세는 독립신문의 논설들을 검토해 보았다. 독립신문 논설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고 있었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서재필의 만행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극동에서 다 꺼져가고 있는 약소국 조선에 가면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소국의 황제에게 독립신문을 만들어 나라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야 열강의 침략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회유했다. 황제는 그가 강대국인 미국인이란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약소국의 황제는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황제는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 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소 한 마리가 20원에서 40원 정도였으니 그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구입했다. 갑신정변이라는 이름의 친일 쿠데타에 실패한 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군함을 얻어 타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도 겨우 뱃삯을 장만하여 미국에 갔던 기억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접시 닦으며 워싱턴 대학에 다닐 때의 일도 떠올려 보았다.
마침내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약 그는 약소국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소국의 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소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약소국의 말이나 글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18년 동안 성장한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로 잊은 것이라면 그는 기억 상실증 환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약소국의 황제는 화가 치밀었다. 그 미국인이 독립이라는 위장을 쓰고 교묘히 일본의 편을 들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조정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관하는 독립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미국인은 갑신정변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의 하수인들이 그의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는 약소국의 조정을 협박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조정에 아직 계약 기간이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임금 2만 8800원과 미국행 여비 600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한다. 아니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가련하게도 약소국의 조정은 그의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들을 따로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독립신문이 일본을 많이 도왔으니 도의상 일본 측에서 신문을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신문의 매각 교섭은 귀국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으며, 의장 취임사에서, "만일 대회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의장직을 사임할 것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5년 그 약소국이 독립을 얻게 되자, 80세가 넘은 그는 노구를 이끌고 다시 약소국에 들어와 기웃거린다. 그는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와서 그 나라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약소국에는 그의 똥 속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노회한 사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승만과 불화를 겪는다.
그는 친미 인사인 장덕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그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는 성명을 내고 다시 자기 나라 미국에 돌아가 버렸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서울 서대문 공원에 가면 서재필의 동상을 보게 된다. 1992년에 세워진 동상이다. 서재필은 오른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었다. 동상 아래에는 서재필을 기리는 명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주 개화운동의 위대한 용장이며 우리 민간 신문의 신조인 독립신문의 창간 은인에 관한 공적을 간추려 명문에 대신한다.
서재필의 동상은 2008년 워싱턴에도 세워진다.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이라 하여 하루 쉬는 대한민국의 최대 일간지 조선일보는 1996년 서재필 일대기를 다룬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전시회까지 열어 서재필 붐을 조성하려고 했다.
김영세는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사하고 있었다. 그는 나라가 망한 원인을 다산 정약용에서부터 갑신정변에 이르는 친일 개화파에서 찾아, 조카 김문수에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을 정화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었다.
회장단 중에서 이완용과 윤치호에 대해서는 이미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안경수(일본에서 김옥균에게 이토의 밀정 배정자를 맡긴 이)는 1898년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 양위 음모를 꾸민 사람이었다. 그 밖의 위원으로는 고리대금업을 하면서 친일 단체 정우회의 총재를 지냈던 김종한, 미국 유학 출신으로 총독부 남작 겸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민상호, 을사오적 이근택의 동생이면서 총독부 남작인 이근호 등이 더 있었다. 그러고 보면 간부와 위원 중에서 살아남을 사람은 이상재, 주시경밖에는 없었다.
1898년 독립신문의 논설에는, '이토 히로부미 씨는 당금 세계의 유명한 정치가요, 또 우리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라. 이번 유람차로 오니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라노라'라고 되어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독립은 대한의 자주독립이 아니었다.
그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청나라의 종주권을 없애는 음모를 독립이라고 포장하여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이었다. 당시 모든 일본인들은 일본이 조선에 독립문을 세워 주었다고 자랑하고 다녔다.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는 서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요릿집 국취루에서 환송 잔치를 열어 주었다. 이토는 그 날 윤치호에게서 받은 선물에 대단히 흡족해 했다. 그는 답례로 자신의 사진을 윤치호에게 주었다. 그가 윤치호로부터 받은 선물은 대형 은찻잔이었는데, 거기에는 새로 지은 독립문이 부조되어 있었다.
김영세는 독립신문의 논설들을 검토해 보았다. 독립신문 논설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일방적으로 일본 편을 들고 있었다.
- 1896년 독립신문 제6호 논설 : 일국이 두 해 전에 청국과 싸워 이긴 후에 조선이 분명한 독립국이 되었으니 그것 또한 조선 인민이 일본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을 터이나, 조선 인민 중에 일본을 감사히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없는 것은 다름 아니라...
- 1896년 독립신문 제44호 논설 : 일본 정부와 일본 인민들이 조선이 진보하는 것만 즐거워하지, 어떤 나라이든지 도와주는 것은 상관 아니 하노라.... 조선 사람들이 일본이 조선을 위한다는 것을 자세히 모르는 것이다.
- 1897년 독립신문 제144호 논설 :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불쌍히 여기사, 일본과 청국 사이에 싸움이 생겨 못된 일하던 청인 놈들이 조선서 쫓겨 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에 천만 번이나 다행한 일이다.
- 1898년 독립신문 별호 논설 : 조선은 계속해서 일본 돈을 써야 한다. 일본 은전을 여전히 일용한 일로 고시를 하였다 하니 우리는 전국 재정을 위하여 크게 치하하노라.
서재필의 만행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인이 있었다. 그는 극동에서 다 꺼져가고 있는 약소국 조선에 가면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약소국의 황제에게 독립신문을 만들어 나라의 독립 의지를 천명하자고 제의했다. 그래야 열강의 침략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회유했다. 황제는 그가 강대국인 미국인이란 점을 감안했다. 그래서 약소국의 황제는 그를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황제는 그에게 신문사 건물을 장만해 주고 창업자금 4400 원을 따로 주었다. 그리고 미국인의 연봉으로 3500원 정도를 약속해 주었다. 소 한 마리가 20원에서 40원 정도였으니 그 돈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그는 신문사 창업 자금 중 1400원으로 자기 저택을 구입했다. 갑신정변이라는 이름의 친일 쿠데타에 실패한 후, 목숨을 부지하려고 군함을 얻어 타 일본에 갔고, 일본에서도 겨우 뱃삯을 장만하여 미국에 갔던 기억이 격세지감으로 느껴졌다. 그는 미국에서 접시 닦으며 워싱턴 대학에 다닐 때의 일도 떠올려 보았다.
마침내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했다. 일약 그는 약소국의 지도급 인사로 부상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약소국의 말과 글을 전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약소국에 와서 단 한 번도 약소국의 말이나 글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만약 그가 18년 동안 성장한 그 나라의 언어를 정말로 잊은 것이라면 그는 기억 상실증 환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약소국의 황제는 화가 치밀었다. 그 미국인이 독립이라는 위장을 쓰고 교묘히 일본의 편을 들면서 군중을 선동하여 조정을 공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주관하는 독립협회는 친일파들이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미국인은 갑신정변 때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졌다. 하지만 그의 하수인들이 그의 출국을 만류했다. 그는 영어로 단호하게 말했다.
"귀국 정부가 나를 필요 없다고 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는 약소국의 조정을 협박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조정에 아직 계약 기간이 7년 10개월이 남았으니 그에 해당하는 임금 2만 8800원과 미국행 여비 600원을 일시불로 달라고 요구한다. 아니면 미국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가련하게도 약소국의 조정은 그의 요구를 전부 들어 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일본인들을 따로 만났다, 그는 그동안 독립신문이 일본을 많이 도왔으니 도의상 일본 측에서 신문을 매입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독립신문의 매각 교섭은 귀국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는 훗날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연합대회를 개최하면서 스스로 의장이 되었다. 그는 회의가 시작될 때에 미국 국가를 부르게 했으며, 의장 취임사에서, "만일 대회 중에 미국을 비방하는 언동이 있게 되면 의장직을 사임할 것입니다"고 말하기도 했다.
1945년 그 약소국이 독립을 얻게 되자, 80세가 넘은 그는 노구를 이끌고 다시 약소국에 들어와 기웃거린다. 그는 미국 군정청 고문 자격으로 와서 그 나라의 국사를 좌지우지하려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 약소국에는 그의 똥 속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라는 노회한 사람이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승만과 불화를 겪는다.
그는 친미 인사인 장덕수가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어느 날 그는 어지러운 시국을 개탄하는 성명을 내고 다시 자기 나라 미국에 돌아가 버렸다.
지금도 한국인들은 서울 서대문 공원에 가면 서재필의 동상을 보게 된다. 1992년에 세워진 동상이다. 서재필은 오른 손에 독립신문을 들고 있었다. 동상 아래에는 서재필을 기리는 명문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 조국의 자주 독립과 민주 개화운동의 위대한 용장이며 우리 민간 신문의 신조인 독립신문의 창간 은인에 관한 공적을 간추려 명문에 대신한다.
서재필의 동상은 2008년 워싱턴에도 세워진다. 독립신문 창간일인 4월 7일을 신문의 날이라 하여 하루 쉬는 대한민국의 최대 일간지 조선일보는 1996년 서재필 일대기를 다룬 특집 기사를 대대적으로 게재했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전시회까지 열어 서재필 붐을 조성하려고 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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