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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물 고추 수확, 속이 쓰리고 아프다

탄저병 걸려 못 쓰게 된 고추들을 보며

등록|2008.08.12 08:29 수정|2008.08.12 08:32
첫 새벽, 소쿠리를 들고 고추밭으로 갔다. 어제 아랫마을 오촌당숙님 댁에 들렀을 때 올해 처음 수확한 고추가 마당에 널려 있는 것을 보고 '벌써 고추가 익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었다.

왜냐하면 며칠 전 고추밭에서 장마통에 듬성듬성 난 풀을 뽑을 때, 이제 막 붉어지는 고추를 보고 한참은 더 있어야 첫 수확을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추밭에 막 도착하자 이슬이 잔뜩 내린 초록빛 잎사귀 사이에 고추가 제법 빨갛게 익어 새벽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고추밭고추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빨갛게 익었다. ⓒ 이연옥


요즘 연일 찜통더위가 계속되자 고추도 속도를 내서 그동안 가꾸어 준 주인 허락을 받을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익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추밭 고랑에 서서 바라보니 뿌듯하다. 해마다 느끼는 기분이지만 첫 물 고추를 딸 땐 왜 붉은 고추가 더 빛나 보이고 더 탐스러워보이는지. 내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나 첫 아이가 처음 입학했을 때 소중하고 뿌듯했던 것 같이 첫 물 고추도 그 뿌듯함을 마음 가득히 안겨 준다.

고추제법 많이 붉어 있는 고추 ⓒ 이연옥


탐스러운 고추 하나를 따서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한 개의 색깔 고운 고추를 만나기 위해서 봄부터 밭을 고르고 좋은 고추모종을 준비했다. 그리고 바쁘다는 다 큰 아이들을 데리고 흙을 만지게 하고 그 흙 속에 좋은 뿌리 내림을 위해 구덩이 파고 물을 주고 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요즘 젊은이들이 흙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안일주의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었던 일도 생각난다. 

고추밭봄내 여름내 가꾸어 온 고추밭 이랑 ⓒ 이연옥


고추를 심고도 고추밭 일은 끝이 없도록 많았다. 고춧대를 세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 시켜주고 고추나무마다 샛가지를 칠 적마다 제거해줘야 한다. 또 잘 자라라고 영양제를 공급해주고 또 때에 맞추어 병충해 방제를 하는 등 심혈을 기울였다.

처음 따는 고추는 유난히 길쭉길쭉하고 탐스러우며 반짝이는 빨간 빛이 있다. 그래서 소쿠리를 채우는 일도 금방금방 한 가득 담겨진다. 거의 다 땄을 무렵 한 자루를 채우고 두 자루가 좀 안 되게 채우고 있는데 아랫마을 사시는 당숙모님이 고추밭을 지나가시다가 들여다보시며,

고추늘씬하고 탐스러운 첫 물 고추 ⓒ 이연옥


"첫 새벽에 고추를 따 나? 올 고추농사가 잘 되었구먼."
"네, 저희는 조금 심었지만 당숙모님네는 많이 따셨죠?"
"많이는 뭘. 탄저병이 심해서 올해는 시원치 않아. 그런데 자네네는 탄저병이 없나봐."
"없긴요. 나무마다 몇 개씩 있어서 따 버리기도 하고 나무 전체가 병든 나무도 있어서 아주 뽑아버리기도 해요."
"올해는 여름내 비가 오락가락해서 그래. 장마가 좀 길었어야지."
당숙모님은 혀를 쯧쯧 차시며
"얼마 안 남았으니 어서 따고, 배고픈데 아침 먹으러 들어가게" 하신다.

고추탄저병이 든 고추를 볼 때마다 마음이 쓰리다. ⓒ 이연옥


당숙모님 말씀대로 긴 장마를 견디기가 힘들어 우리 고추밭에도 여기저기 탄저병이 든 고추가 매달려 있다. 그렇게 병든 고추를 따낼 적마다 속이 아프고 쓰리다. 그런데 올해는 집집마다 탄저병이 심하다고 한다. 어떤 집은 탄저병을 주체하지 못하고 고추밭 전체를 뽑아버리고 김장 배추를 심어야겠다고 하는 집도 있다.

탄저병소쿠리 한가득 담겨진 탄저병 고추 ⓒ 이연옥


그런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나마 우리밭의 고추가 고맙기만 하다. 병든 고추를 따놓고 보니 두 소쿠리를 담고도 넘치게 많았다. 참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나마 밭 전체가 다 병들지 않은 것 만도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다음 번 고추를 딸 적엔 탄저병이 없는 아주 깨끗한 고추를 만나기를 고대하면서도 마음이 씁쓸했지만 올해 처음 수확 한 고추 담은 자루를 보니 마음이 흐뭇하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shpeople.net 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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