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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야! 한 번 더 집짓는 수고 해라

[여수 진례산] 조용한 산길을 걷는 나는 불청객

등록|2008.08.12 20:19 수정|2008.08.13 09:39

진례산 풍경.안테나가 보이는 곳이 정상이다. ⓒ 전용호


뜨거운 여름, 홀로 찾아나선 산

해가 중천에 섰다. 8월의 더위는 식을 줄을 모른다. 8월 10일. 진달래로 유명한 전남 여수시 진례산(영취산, 510m)을 봄에 갔던 길을 따라 올라가기로 했다. 누구랑? 혼자서. 삼일동사무소에서 올라가는 길을 잡고 밭두렁을 지나니 산길이 풀로 가렸다. 아! 험한 길을 예고하고 있다. 풀들을 헤치고 들어서니 좋은 길이 나오며, 등산로는 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다.

산길은 인적이 오래전에 끊어졌음직하다. 봄철에도 홀로 산행을 했는데. 이 뜨거운 여름에 좋은 길 나두고 풀로 우거진 숲길을 걸어갈 등산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숲길은 좋은 길과 풀로 우거진 길의 반복이다.

무당거미길을 막아서고 있다. ⓒ 전용호


베짱이인기척에 깜짝 놀란 눈으로 쳐다본다. ⓒ 전용호


숲속의 주인들 잠을 깨우다

풀 속에서는 난데없는 불청객에 놀란 풀벌레들이 이리저리 튀어 다닌다. 나방은 단잠을 깨웠다고 항의를 하는지 나한데 돌진을 하기도 한다. 거미는 집을 짓고 길을 막아서고 있다. 길은 사람만 다니는 게 아니라 동물도 다니고 풀벌레도 다닌다. 그리고 거미는 목 좋은 길목을 지키고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거미야! 나를 잡으려고 거미줄을 친 건 아니겠지. 내가 이 길을 가야겠는데 어쩌니?"

거미는 대답이 없다.

"미안하다. 한 번 더 집을 짓는 수고를 해라."

내가 숲의 주인이 아닌데도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잠시 지나갈 뿐인데 열심히 지어 놓은 집까지 부수면서 말이다. 나도 모르게 숲이 내 것인양 내 마음대로 숲을 헤집고 다닌다. 나중에는 거미줄에 짜증까지 낸다. '왜 이렇게 거미줄이 많아.' 매미가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고 있다.

발밑에서는 메뚜기가 뛰고, 나무 위에서는 베짱이가 놀라 달아난다. 베짱이는 밤새 울어대느라 잠을 설쳤는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왜! 잠을 깨우고 그래요."
"네가 있는 줄 몰랐다. 산에 들어설 때는 나무만 보이더라. 근데, 나는 너만 보면 놀기 좋아하고 게으르기만 한 이미지가 떠오를까?"
"다 이솝 때문이야. 그만큼 한 번 만들어진 이미지는 바꾸기 힘들어요. 우리는 야행성이라 밤에 주로 활동을 하고 낮에는 쉬어야 한다고요."

여름 산조용하고 넉넉하다 ⓒ 전용호


싱그러운 소나무푸른 빛이 더욱 진해져간다. ⓒ 전용호


더위 먹은 산은 말이 없고

원추리산길에 홀로 핀 원추리가 유일하게 나를 반겨준다. ⓒ 전용호

산은 잔뜩 더위를 먹었다. 길옆으로 있는 풀들은 빨대마냥 둥그렇게 잎을 말고 있다. 오랜 가뭄에 살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무숲을 벗어난 산은 뜨겁기만 하다. 온몸에서 땀이 빠져 나온다. 뜨거운 열기는 발밑에서부터 온몸을 타고 올라온다. 갈증이 심하게 난다. 잠시 쉬며 목을 축인다.

정상은 아직 멀리 있다. 이름 모를 봉우리에 앉아 주변경치를 바라본다. 이 무더운 날에도 소나무는 싱싱함을 자랑하고 있다. 아니 더욱 푸른 빛을 내고 있다. 아래로 흥국사가 내려다보이고 더위 먹은 산들은 말없이 이어지고 있다.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데도 원추리는 노란 빛을 잃지 않고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이 여름. 원추리도 끝물인가 보다. 꽃잎을 떠나보낸 열매는 탱탱하게 여물어 간다.

흥국사로 내려가는 샛길이 보인다. 중간에 내려가고픈 유혹이 강하게 밀려온다. 삼거리에 서서 고민을 한다. '그만 내려갈까?'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산길을 걸어가는 게 즐겁지만은 않다. 정상에 가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나의 투정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 혼자 가는 산행인데.

정유공장더운 여름에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정유공장 ⓒ 전용호


진례산 정상하얀구름이 피어나는 하늘과 대비되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 전용호


북적거림이 사라진 여름산은 고독을 즐긴다

산길 내내 아래 공장의 기계음은 쉴 줄 모른다. 정상이 다가올수록 온몸은 탈진이 되어 발걸음이 무척 무겁다. 최대한 체력소비를 줄이면서 서서히 정상으로 올라선다. 산행을 시작한 지 1시간 50분이 지났다. 민둥산 정상에는 안테나가 이정표처럼 서있다. 표지석은 옛 이름이 좋은지 영취산이라는 이름표를 아직도 달고 있다.

그늘이 없는 바위에 앉아 점심으로 과자를 먹었다. 북쪽으로 뭉게구름이 한없이 피어올라 하늘이 하얗게 반짝거린다. 산들바람이 불어온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시원함을 느낀다. 봄에는 서있을 자리도 없었던 진달래 꽃길에 지금은 나 홀로 앉아 있다.

혼자 차지한 산 정상. 오래도록 느끼고 싶었다.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그림을 그려본다. 하얀 구름도 그리고, 산도 그리고, 바다도 그려본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나만 알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내 마음대로 그린 그림. 그래도 내 눈에는 구름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바다도 보인다. 망초는 키 자랑을 하듯 무리지어 서있다. 표범나비가 짝을 지으며 하늘거리다 내려앉는다.

정상에서 내려본 풍경마을도 보이고, 논도 보이고, 바다도 보인다. 바다 건너 남해도가 지척이다. ⓒ 전용호


표범나비팔랑거리며 날아다니다 휴식을 취하고 있다. ⓒ 전용호


덧붙이는 글 여수 진례산은 진달래로 유명한 영취산과 이름이 바뀌었다가 최근에 다시 찾았습니다. 영취산은 건너편 봉우리입니다. 삼일동사무소 방면으로 오르면 조용한 산행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 도솔암이 있으며 물맛이 시원합니다. 산 아래에는 호국사찰 흥국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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