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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독도문제 때문에 읽었던 <조선잡기>

등록|2008.08.13 14:52 수정|2008.08.13 14:52

▲ <조선잡기> 표지 ⓒ 김영사


내가 <조선잡기>를 읽어보려 했던 건 순전히 독도 문제로 촉발된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일시적인 흥분 때문이었다. 난 이번에야 말로 ‘독도’에서 눈길을 떼고 조용히 있으려 했다. 이번에도 우리 쪽 반응이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지만, 늘 그랬듯 그런 반응이 금방 잦아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는 다르다. 일본은 저들의 목적을 이번에도 아주 효과적으로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저들은 우리처럼 거의 모든 국민이 흥분하지 않고서도 독도를 차지하기 위하여 냉정하고도 차분한 전술로 일관하고 있다. 이번 ‘독도 싸움’에서도 일본은 케이오 승을 거두었다. 우리는 마지못해 우리 편을 들어주는 체 한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제스처에 대리만족하는 것으로 싸움을 끝내고 말았다.

독도를 둘러싼 이번 싸움에 대해서도 이쪽 한국에선 말이 많았다. 일본의 국내정치상황이 반영된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우리가 일본의 전술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며 적당한 선에서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경우, 제 각기 정파의 이익에 따라 해석을 달리하였다. 늘 보아왔던 광경들이다. 제각기 일리 있는 얘기들이다. 하지만 싸움을 효과적으로 해 가기 위한 전술이라든가 다음 싸움에 대비하기 위하여 마련해야 할 대안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신통한 대책들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 싸움은 끝났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일본과 그 사람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고 싶었다. 일본에 대해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냉정하게 지켜보고 그들과 대등하게 싸워나갈 수 있는 지구력을 길러 가는 분위기를 우리 사회에 만들어보는 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고 싶었다. 그런 기대와 바람이 얼마나 이뤄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 혼마 규스케는 조선을 정탐하고 조선을 병합하려는 의욕을 가진 사람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 사람들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려고 작정하고 글을 시작하고 있다. 그는 조선이 4천년이나 된 나라로서 자기 시대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일본의 개화를 이끌었던 나라라는 데는 인정한다. 그러나 기백년이 흐르더라도 조선 사람들이 기백을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는 회의적이라고 말한다. 조선은 “기백이 완전히 죽은” 나라라는 이야기다.

문명의 이기를 조선 사람들보다 빨리 누리고 있는 제국의 지식인의 어두운 모습이 그의 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거의 모든 책갈피마다 조선 사람들이 식민지 백성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써 놓고 있다. 조선 사람들에 대해 그는 이렇게 평한다. “비굴하고 구걸 근성이 있다(33쪽).” “스스로 무지몽매에 안주한다(130쪽).” “공동(체) 정신이 없다(143쪽).” 조선 사람들은 “제어하기 쉬운 동물(196쪽).” 

조선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식하고, 무능하고, 지저분하고, 무책임한 사람들인가를 집요하게 그는 추적하고 있다. 조선 사회는 부패해 있으며, 게다가 중국에 대해서도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도 그는 비난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화한 일본국이 하루 빨리 조선을 정복해 저들을 미개화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해 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그는 펴 가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 또는 일상을 살핀다는 것은 잘 알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때, 그리고 그런 자세를 통해 나의 삶이나 일상을 더 풍요롭게 할 때라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혼마 규스케의 자세는 그런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일상을 이렇게 정리한다. “순박한 풍조가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이다(240).” 그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가능성이 없는 나라이며 그 국민들이라고 단정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고 있다.

어리석게도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일본의 한 지식인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다. 책 제목이 그렇듯, 조선 사람들이 이른바 문명화 되기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순박한 생활상들에 대한 사심 없는 이해와 접근이 그의 글에 들어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그의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삶과 그들의 글들을 접한 나로서는 당연히 기대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기대를 혼마 규스케는 채워주지 못했다. 조선 사람들이 두 끼를 먹었다는데, 그건 가난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라든가, 조선 사람들에 대한 그의 비난에 가까운 글을 통해 조선 사람들의 질박한 생활상 간접적으로 읽어 낸다는가 하는  센스가 내게 없었다면 규스케에 대해 나는 더더욱 서운해 했을 것이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문화를 조선의 고유한 그것으로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와도 같이 닫힌 시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시류에 영합하며 제국의 권력의 주변부를 맴돌았던 지식인일 뿐이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감안할 때, 그의 제국주의적 문명관과 조선 사람들의 삶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기술들은 그의 책임만은 아니라 할 것이다. 메이지 시대 이후 정한론이 규스케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구미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략욕에 편승하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야망이 그의 시각에 녹아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간 이해와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시각이 그에게 없는 것을 보며 일제의 조선 침략기 일본 지식인들의 집단적인 야만성을 엿보게 된다.

조선과 조선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 대신에 조선 침략의 뻔뻔한 야욕이 책 전체에 스며있는 것을 보며, 일본의 조선과 조선 사람들에 대한 인식의 뿌리가 얼마나 그릇되어 있으며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가 보여 주었던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시각은 21세기인 우리 시대에도 크게 달라져 있지 않음을 우리는 ‘독도 사건’을 통해서도 보게 된다.

혼마 규스케의 제국주의적 시각을 통해, 나는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국민들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처했던 운명이 얼마나 비참하고도 애처로운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이른바 조선을 정탐한 일본의 한 지식인의 글에 투영된 조선은 이미 독립국가가 아니었다. 조선은 이미 일본인들이 마치 점령군 행세를 하며 사실상 지배를 하면서 거주하고 있는 땅일 따름이었다.

조선은 명목상 1897년부터 1910년까지 독립국으로서 그 지위를 달성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그의 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이미 일본의 조선 침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글을 써 내려갔다.

혼마 규스케가 “불쌍한 인간의 쓰레기 터(138쪽)”라고 보았던 조선과 조선인의 후예로서  우리는 이곳 한반도에 살고 있다. 그곳 ‘쓰레기 터’는 이제 일본에 못지않은 문명국가가 되었고, 그 국민들은 편리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혼마 규스케가 조선을 정탐했던 시기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갈등 구조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 있다. 그가 조선 사람들이 싸우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항상 눈앞의 손해에 대한 요구를 강요하는 것으로 (싸움을) 끝낸다”고 지적한 것은 나의 기억에서 오래 남을 것 같다.

우리 시대 일본이 독도를 정탐하는 것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과 생각이 그들에게 여전히 정탐되고 있음을 우리는 지나쳐선 안 된다. 우리는 이쯤에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연구하고 정탐하는 만큼 우리가 일본을 연구하고 정탐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지닐 때가 되었다. 그런 문제의식을 이 책이 우리에게 줄 수 있다면, 이 작은 번역서는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조선잡기> 혼마 규스케, 최혜주 옮김 / 2008.6 / 김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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