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100] 기막힌 우연과 사랑의 좌절
김갑수 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신여성이라는 것
동경에 간 나민혜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녀는 활달해서 남학생들과 곧잘 어울렸다. 그녀는 많은 남학생들과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했다. 게다가 그녀는 서양화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학과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림에는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신주쿠의 찻집을 빌려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꽤 많은 남학생들로 붐볐다. 그녀가 남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다 보니,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여기는 남학생이 몇 생겨났다.
그녀는 연애와 결혼은 별개의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보다 많은 남성과 연애 관계를 갖는 것이 신여성의 풍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좀 특이한 남성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연애 남성을 선택하는 데 주관적 의사가 거의 없었다. 남성에 대한 그녀의 관심도는 오로지 그 남성이 다른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지 여부가 기준이었다.
대체로 여학생들은 부잣집 아들이거나 명문학교 학생을 좋아했다. 나민혜의 주변에는 그런 남성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국내에 있는 김문수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남성들 사이에서 보람 있는 유학 생활을 보낸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같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삿보로에 있는 친구 조순호를 생각했다. 그러자 김문수도 떠올랐다. 나민혜가 언제나 두 사람을 같이 생각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조순호에게 엽서를 띄웠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조순호의 전화를 받았다.
"순호야, 반갑다. 공부하기가 힘들지? 너 언제 귀국하니?"
나민혜는 조순호의 귀국 날짜보다 사흘 먼저 자신의 귀국 일자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김문수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그동안 공부에 바빠 정신이 없었다고 하고, 하지만 김문수를 한시도 잊어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제 방학이 되어 서울에 가려는데 누구보다도 김문수씨가 꼭 마중 나와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문수는 이따금 정릉을 산책하는 일 말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리랑고개 집에 처박혀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생활은 침체되어 있었다. 그는 나민혜의 편지를 받고 다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시종일관 자기를 지지하는 여자는 나민혜밖에는 없어 보였다.
김문수는 경성역에 나가 나민혜를 마중했다. 나민혜는 엷은 화장에 화려한 양장을 하고 출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한강 인도교를 걸었다. 김문수는 귀국하자마자 집에 가지 않고 자기와 시간을 쓰는 나민혜에게 신뢰감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나민혜는 김문수의 팔짱을 끼기도 했다. 김문수는 차마 나민혜에게 조순호의 소식을 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헤어지기 직전 조순호의 소식을 물었다.
나민혜의 마지막 거짓말
"조순호씨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방학인데 귀국은 안 한답니까?"
사실 그것은 달갑지는 않지만 나민혜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그녀는 답변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아, 순호는 공부가 바빠 아직 귀국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대요. 오면 김문수씨에게도 연락하겠지요."
김문수는 나민혜를 바래다주고 아리랑고개로 돌아왔다. 그는 조순호가 귀국한다 해도 자기에게 연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흘 후 저녁 나민혜는 조순호의 집을 찾아갔다. 조순호는 나민혜의 예상과 달리 그저께 집에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민혜는 먼저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물었다. 그러고는 김문수가 자기를 마중했으며 늦어도 올 겨울 학기부터는 동경에 와서 공부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민혜를 보낸 조순호는 곧장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조순호의 할아버지는 여름 내내 위독 상태를 유지했다. 조순호는 어머니와 교대로 할아버지를 간호했다. 그녀는 방학의 전부를 할아버지의 병간호에 쓰느라 외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극진한 병시중에 감동을 받았다.
거의 탈진 상태인 할아버지는 온 힘을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예배 시간에 웃기만 해서 좀 걱정했었는데 넌 정말 훌륭한 손녀로구나."
나민혜는 그 뒤 김문수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김문수는 나민혜가 그림에 바빠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가 많다는 것을 김문수는 알고 있었다. 김문수는 연락 안 하는 나민혜가 조금 서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조순호와 조준호
김문수는 조순호가 서울에 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는 그녀가 교회 예배의 반주자였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녀가 왔다면 분명히 부모와 함께 예배당에 갈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 저녁, 그녀가 다녔던 숭동예배당에 가 보기로 했다.
김문수는 예배가 끝날 시간에 맞춰 숭동예배당을 찾아갔다. 무던히도 더운 여름밤이었다. 그는 주보를 집어 읽고는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반주자 이름에 조순호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맨 뒷자리에 가 조용히 앉았다. 하지만 조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가 시작되었다. 김문수는 어설픈 동작으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기도가 끝나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설교대 너머 성가대 석의 파이프 오르간에 조순호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교회 안은 그리 밝지 않았고 거리는 멀었지만 반주자는 조순호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찬송과 축도가 있은 후 예배가 끝났다. 김문수는 교회 문 옆에서 조순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신도들이 몰려 나왔다. 김문수는 조순호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조순호가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김문수는 조순호의 뒤로 따라 붙었다. 그는 조순호의 등 뒤로 가 다급하게 불렀다.
"조순호씨!"
하지만 그녀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불렀다.
"조순호씨!"
그러자 조순호가 살짝 아주 조금만 머리를 돌렸다.
"말도 없이 가시더니 그래도 방학이 되니 이렇게 오셨군요?"
순간 조순호는 거의 돌아보지도 않고 되쏘듯이 말했다.
"… 왜, 아니꼬우세요?"
김문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 날 밤 김문수는 조순호의 꿈을 흑백으로 꾸었다. 조순호는 전차에 서 있었다. 그가 아무리 손짓을 해도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차는 가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유행하는 말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독살 미인 김정필 사건 때문에 생긴 말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죽이려고 주먹밥을 줬는데, 남편이 먹고 구토를 하자, 다시 독 묻은 엿을 먹여 죽였다고 해서 유행된 말이었다. 그 말은 "엿 먹어라"였다.
다음으로는 신식 양장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생기면서 유행된 말이 있었다. 대체로 여자들의 신식 양장은 남자들에게 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의 복장을 문제 삼아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일이 생겼다. 그럴 때 여자가 하는 말이 있었다.
"왜, 아니꼬우세요?"
김문수가 이 유행어를 경멸했음은 물론이다. 조순호는 김문수가 가장 경멸하는 언어를 김문수에게 직격탄처럼 사용한 것이었다. 김문수는 조순호가 자신의 감정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것은 조순호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김문수는 두 가지 이유로 가슴이 아팠다. 첫째는 그 따위 말을 여자에게 들은 자신이 한심했고, 둘째는 조순호가 그렇게 야비한 면이 있는 여자임을 안 것이 씁쓸했다. 그는 꿈에서 손이라도 흔들어 기꺼이 조순호를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현실성을 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순호에게는 동갑나기 작은집 사촌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큰집 순호를 본받으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자주 들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정말 그녀는 순호를 본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호가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아주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그녀는 순호가 단발머리를 하자 자기도 단발머리를 했다. 다음으로 그녀는 의과대학에 유학 가려고 했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본받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적이 아주 밑바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조순호가 일본으로 떠나자 조순호의 교회 반주를 이어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조준호였다. 그 날 김문수가 주보에서 읽은 이름이었다.
여기까지 말해도 그 날의 사건은 다 해명될 수가 없다. 그 날 조준호는 웬 남자가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왜 모르는 남자에게 그리도 험한 말을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녀는 그 말을 험한 말로 생각하기보다는 멋진 말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참혹한 결과를 빚는 세상의 일들이 갖는 공통적인 속성은 비현실성이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김문수를 절망시킨 것은 조순호의 사촌이었지 조순호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 날 저녁 그 시간에 조순호는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문수를 절망케 한 두 소녀, 나민혜와 조준호는 다음 날 검은 양장을 하고 발갛게 부운 눈으로 조순호의 집에서 문상을 하고 있었다.
동경에 간 나민혜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녀는 활달해서 남학생들과 곧잘 어울렸다. 그녀는 많은 남학생들과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했다. 게다가 그녀는 서양화가이기도 했다. 그녀는 학과 성적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림에는 어느 정도 재능이 있었다. 그녀가 신주쿠의 찻집을 빌려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꽤 많은 남학생들로 붐볐다. 그녀가 남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다 보니, 그녀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여기는 남학생이 몇 생겨났다.
대체로 여학생들은 부잣집 아들이거나 명문학교 학생을 좋아했다. 나민혜의 주변에는 그런 남성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국내에 있는 김문수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기가 남성들 사이에서 보람 있는 유학 생활을 보낸다고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같은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여름 방학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삿보로에 있는 친구 조순호를 생각했다. 그러자 김문수도 떠올랐다. 나민혜가 언제나 두 사람을 같이 생각하는 것은 일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조순호에게 엽서를 띄웠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조순호의 전화를 받았다.
"순호야, 반갑다. 공부하기가 힘들지? 너 언제 귀국하니?"
나민혜는 조순호의 귀국 날짜보다 사흘 먼저 자신의 귀국 일자를 잡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김문수에게 편지를 썼다. 그녀는 그동안 공부에 바빠 정신이 없었다고 하고, 하지만 김문수를 한시도 잊어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제 방학이 되어 서울에 가려는데 누구보다도 김문수씨가 꼭 마중 나와 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였다.
김문수는 이따금 정릉을 산책하는 일 말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리랑고개 집에 처박혀 보내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생활은 침체되어 있었다. 그는 나민혜의 편지를 받고 다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도 시종일관 자기를 지지하는 여자는 나민혜밖에는 없어 보였다.
김문수는 경성역에 나가 나민혜를 마중했다. 나민혜는 엷은 화장에 화려한 양장을 하고 출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한강 인도교를 걸었다. 김문수는 귀국하자마자 집에 가지 않고 자기와 시간을 쓰는 나민혜에게 신뢰감이 들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나민혜는 김문수의 팔짱을 끼기도 했다. 김문수는 차마 나민혜에게 조순호의 소식을 묻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헤어지기 직전 조순호의 소식을 물었다.
나민혜의 마지막 거짓말
"조순호씨는 잘 지내고 있겠지요. 방학인데 귀국은 안 한답니까?"
사실 그것은 달갑지는 않지만 나민혜가 기다리고 있던 말이었다. 그녀는 답변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아, 순호는 공부가 바빠 아직 귀국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대요. 오면 김문수씨에게도 연락하겠지요."
김문수는 나민혜를 바래다주고 아리랑고개로 돌아왔다. 그는 조순호가 귀국한다 해도 자기에게 연락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흘 후 저녁 나민혜는 조순호의 집을 찾아갔다. 조순호는 나민혜의 예상과 달리 그저께 집에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왔다는 것이었다.
나민혜는 먼저 할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물었다. 그러고는 김문수가 자기를 마중했으며 늦어도 올 겨울 학기부터는 동경에 와서 공부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민혜를 보낸 조순호는 곧장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조순호의 할아버지는 여름 내내 위독 상태를 유지했다. 조순호는 어머니와 교대로 할아버지를 간호했다. 그녀는 방학의 전부를 할아버지의 병간호에 쓰느라 외출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극진한 병시중에 감동을 받았다.
거의 탈진 상태인 할아버지는 온 힘을 내어 그녀에게 말했다.
"네가 예배 시간에 웃기만 해서 좀 걱정했었는데 넌 정말 훌륭한 손녀로구나."
나민혜는 그 뒤 김문수에게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 김문수는 나민혜가 그림에 바빠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가 많다는 것을 김문수는 알고 있었다. 김문수는 연락 안 하는 나민혜가 조금 서운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조순호와 조준호
김문수는 조순호가 서울에 왔는지가 더 궁금했다. 그는 그녀가 교회 예배의 반주자였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녀가 왔다면 분명히 부모와 함께 예배당에 갈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요일 저녁, 그녀가 다녔던 숭동예배당에 가 보기로 했다.
김문수는 예배가 끝날 시간에 맞춰 숭동예배당을 찾아갔다. 무던히도 더운 여름밤이었다. 그는 주보를 집어 읽고는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반주자 이름에 조순호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는 교회의 맨 뒷자리에 가 조용히 앉았다. 하지만 조순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교가 끝나고 기도가 시작되었다. 김문수는 어설픈 동작으로 머리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기도가 끝나고 그가 눈을 떴을 때 그는 경이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설교대 너머 성가대 석의 파이프 오르간에 조순호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교회 안은 그리 밝지 않았고 거리는 멀었지만 반주자는 조순호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찬송과 축도가 있은 후 예배가 끝났다. 김문수는 교회 문 옆에서 조순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신도들이 몰려 나왔다. 김문수는 조순호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는 조순호가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김문수는 조순호의 뒤로 따라 붙었다. 그는 조순호의 등 뒤로 가 다급하게 불렀다.
"조순호씨!"
하지만 그녀는 못 들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불렀다.
"조순호씨!"
그러자 조순호가 살짝 아주 조금만 머리를 돌렸다.
"말도 없이 가시더니 그래도 방학이 되니 이렇게 오셨군요?"
순간 조순호는 거의 돌아보지도 않고 되쏘듯이 말했다.
"… 왜, 아니꼬우세요?"
김문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그 날 밤 김문수는 조순호의 꿈을 흑백으로 꾸었다. 조순호는 전차에 서 있었다. 그가 아무리 손짓을 해도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전차는 가 버리고 말았다.
당시에 유행하는 말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독살 미인 김정필 사건 때문에 생긴 말이었다. 그녀가 남편을 죽이려고 주먹밥을 줬는데, 남편이 먹고 구토를 하자, 다시 독 묻은 엿을 먹여 죽였다고 해서 유행된 말이었다. 그 말은 "엿 먹어라"였다.
다음으로는 신식 양장을 하는 여자들이 많이 생기면서 유행된 말이 있었다. 대체로 여자들의 신식 양장은 남자들에게 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들은 여자의 복장을 문제 삼아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는 일이 생겼다. 그럴 때 여자가 하는 말이 있었다.
"왜, 아니꼬우세요?"
김문수가 이 유행어를 경멸했음은 물론이다. 조순호는 김문수가 가장 경멸하는 언어를 김문수에게 직격탄처럼 사용한 것이었다. 김문수는 조순호가 자신의 감정을 명백히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것은 조순호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김문수는 두 가지 이유로 가슴이 아팠다. 첫째는 그 따위 말을 여자에게 들은 자신이 한심했고, 둘째는 조순호가 그렇게 야비한 면이 있는 여자임을 안 것이 씁쓸했다. 그는 꿈에서 손이라도 흔들어 기꺼이 조순호를 보내지 못한 것이 아쉽기도 했지만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해야 현실성을 띨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조순호에게는 동갑나기 작은집 사촌이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큰집 순호를 본받으라는 말을 어머니에게 자주 들으며 성장했다. 그런데 정말 그녀는 순호를 본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순호가 피아노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아주 열심히 피아노를 쳤다. 그녀는 순호가 단발머리를 하자 자기도 단발머리를 했다. 다음으로 그녀는 의과대학에 유학 가려고 했지만 아직 그것까지는 본받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성적이 아주 밑바닥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녀는 조순호가 일본으로 떠나자 조순호의 교회 반주를 이어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조준호였다. 그 날 김문수가 주보에서 읽은 이름이었다.
여기까지 말해도 그 날의 사건은 다 해명될 수가 없다. 그 날 조준호는 웬 남자가 자기에게 접근하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는 왜 모르는 남자에게 그리도 험한 말을 했던 것일까? 아마도 그녀는 그 말을 험한 말로 생각하기보다는 멋진 말로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참혹한 결과를 빚는 세상의 일들이 갖는 공통적인 속성은 비현실성이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김문수를 절망시킨 것은 조순호의 사촌이었지 조순호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 날 저녁 그 시간에 조순호는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문수를 절망케 한 두 소녀, 나민혜와 조준호는 다음 날 검은 양장을 하고 발갛게 부운 눈으로 조순호의 집에서 문상을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필자 김갑수는 최근 장편소설 <오백년 동안의 표류>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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