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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남기고간 채소절임 '나라쯔케'

[맛객의 맛있는 이야기] 군산 특산품 나라쯔케를 찾아서

등록|2008.08.17 15:34 수정|2008.08.18 14:29

▲ 주연식품의 박주연대표가 일본식 채소절임인 나라쯔케를 꺼내고 있다 ⓒ 맛객


어린 시절 고향집 장독 속에는 항상 몇 가지 장아찌가 들어있었다. 그 중에서 맛좋기로는 참외장아찌가 으뜸이었다. 풋참외를 반으로 잘라서 씨는 빼고 된장에 넣어두었다가, 알맞게 절여지면 꺼내서 갖은 양념에 무쳐서 먹었다.

특히 밥맛 잃기 쉬운 여름철에 진가를 발휘했었다. 경쾌하게 씹히는 식감은 맛보다 오래 기억될정도로 인상적이었다.

가족이 고향을 떠난 후로 참외장아찌는 추억 속에서만 간간이 생각날 뿐, 잊혀진 미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가 부천 원미구청 옆에 있는 <진화장>에서 희미해진 그 맛을 다시 경험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향집의 장아찌와는 맛이 달랐다.

아삭거리는 식감은 그대로였지만 풍미는 된장에서 꺼낸 맛이 아니었다. 짭짤한 감칠맛보다 감미가 더 농축된 그 맛은, 달근새근한 게 낯선 듯 아닌 듯 묘하기만 했다. 후에 알았다. 그건 우리네 장아찌가 아니라 일본식 채소절임인 나라쯔케였다는 것을.

주문처를 물었더니 군산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알고 보니 군산은 전국 생산량의 70퍼센트를 차지할 정도로 나라쯔케 주 산지였다. 명실공히 군산의 특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군산의 특산물 나라쯔케

▲ 나라쯔케는 울외라 불리는 큰참외가 주재료이다. 한 농부다 큰참외밭을 살피고 있다 ⓒ 맛객


전북 군산시 성산면 창오리는 나라쯔케 산지로 이름나 있다. 지난달 24일 맛객이 찾은 업체는 주연식품. 안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가공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일단 나라쯔케 맛부터 보자고 청해봤다. 몇 십 개의 큰 통이 늘어 선 숙성실에서 나라쯔케를 꺼내 놓는다. 맛을 보니 약간 시큼한 술의 풍미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은근슬쩍 계속 손이 간다. 막걸리나 맥주라도 있었다면 취재고 뭐고 주저앉아 권커니 자커니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 큰참외가 열려있다 ⓒ 맛객


나라쯔케는 일본식 채소절임인 쯔케모노의 한 종류이다. 우리로 치면 장아찌인 셈이다. 하지만 소금물에 절인 큰참외를 술 지게미와 버무려 숙성시킨 게 장아찌와는 차이점이다. 그렇다고 우리와 전혀 연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우리도 쌀겨나 왕겨를 무와 섞어 절이는 전통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게 나라쯔케의 원형일지도 모르겠다. 

나라쯔케의 본고장은 나라현이다. 한때 일본의 수도(710~784)이기도 했던 나라현은 일본이 시작된 지역이라 할 정도로 일찍이 번창하였다. 그 때문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많은 문물이 전래되기도 하였는데, 지금도 불교문화가 많이 남아있는 지역으로 손꼽기도 한다.

나라쯔케의 주 재료인 큰참외(울외)도 그때 중국과 한국을 통해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던 것이 사케가 발달한 지역적 특성과 맞물려 나라쯔케라는 명물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군산에서 나라쯔케가 발달하였다면 군산 역시 청주가 많이 생산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실제 정종의대명사인 백화수복을 만든 백화양조는 해방되던 1945년에 조선양조라는 이름으로 군산에 설립된 회사이다. 그렇다면 해방과 함께 군산에 청주회사를 차린 이유가 무엇일까? 혹, 일본인이 운영하던 청주공장을 인수받아 간판만 바꿔달지는 않았을까? 확인할 길이 없기에 미뤄 짐작만 해 볼뿐이다.

조선양조는 대한양조, 백화양조를 거쳐 두산주류로 인수합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군산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군산 나라쯔케의 명맥이 끊기지 않고 계속되는 이유도 청주공장에서 술 지게미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나라쯔케를 깨소금, 고춧가루, 파, 설탕약간과 함께 무쳐냈다 ⓒ 맛객


암울했던 역사의 아픔이 담겨 있는 나라쯔케, 일제가 남기고 간 지도 어언 63년이 되었다. 그동안 군산의 특산물로서 발전한 나라쯔케는 이제 더 이상 일본의 나라쯔케는 아니다. 군산의 향토음식으로 토착화된 만큼 주박장아찌라는 우리 이름을 달고서 당당히 일본으로 수출되기를 기대해 본다.

오늘은 군산에서 만들어지는 우리 청주 설화 한잔 마셔야겠다. 나라쯔케가 아닌 주박장아찌를 안주 삼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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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객이 외식전문지 <월간외식경영>과 손잡고 맛집투어를 떠납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따라서 충남과 전북, 전남의 맛집을 두루 탐방할 계획입니다. 수도권에서 개발 가능한 신메뉴를 탐험하게 될 맛객의 '서해안고속도로 음식탐험대'에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상세한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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