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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 불능 시대에 '반란'을 꿈꾼다

[리뷰] <팔인>, 애호가들의 후원금에 힘입은 '윤리적 창작품'

등록|2008.08.18 10:12 수정|2008.08.18 10:12
이 독백은 일곱 구의 시체가 널브러진 정신병원 라운지에서 들려온다.

"하필 대한민국, 하필 우리 아버지와 엄마, 하필 그런 환경에서, 하필 또 그런 직장, 하필 또 그런 꿈, 하필 또 그 빠, 하필 또 그 남자, 하필 또 그 전에 남자, 그리고 하필 여기. 또 이러고 있는 내가 만들어질 확률은?"

백색독백배우들의 흰색 의상은 현대인의 외면적인 위생집착을 암시한다 ⓒ 마방진


이것은 절벽 같은 소통 부재의 끄트머리에서 움켜쥐고 있다 유언처럼 헤쳐 내보인, 새마을금고에서 대출상담을 하며 생활하던 ‘문자’란 여인의 속마음이다. 이렇게 끝난 연극은 무대 뒤 자막과 함께 폭류처럼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의 홍수로 시작한다.

"연하게 내린 코피, 스캔들 없이 사는 지겨운 굼뱅이, 갑근세를 철폐하라 아니면 재워다오, 아까징끼가 배탈에 좋대서 발랐더니, 흐린 가을하늘에 웬 편지질, 이지러버어지러버, 주례봐드리고 방충망해드립니다, 진인사대천해수욕장에서 하다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꼬일 대로 꼬인 여덟 명의 남녀이들이 서로 엉키면서 관계는 파탄나면서 새롭게 형성된다 ⓒ 마방진


이어 날개 없는 나비들처럼 자신의 정체가 모호한 아이디들이 무대를 어지럽게 배회하며 등장한다.

무대와 음악의 앙상블이 감춘 치명적 반전....

극공작소 ‘마방진(魔方陣 magic square)'의 2008 개관기념작 <팔인(八人)>은 인트로에서 '소통망 속에서 중풍에 걸린 듯한 세상살이'를 한 컷의 사진처럼 상징적인 퍼포먼스로 드러낸 후 어지럽게 회오리친다.

여덟 명의 등장인물들은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편리함과 신속함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는 때에 되려 불통의 네트워크에 갇혀 버린 현대인들이다. 현대인들이 한번쯤은 경험했음직한 사건들이 ‘인트로 MSN’과 에필로그를 포함, 열 한 토막으로 구성된 이야기에서 고함과 몸싸움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그러나 무대는 극 이야기의 뜨거움과는 대조적으로 극히 심플하고 기능적이다. 유일한 무대장치인 곡선형 흰색 큐빅은 극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에스자나 원형으로 변하거나 여차하면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다. 어쩌다가는 사람을 때리는 흉기가 되며 때로는 차폐막처럼 소통을 끊어놓는다. 여덟 남녀들이 서로 원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거부하며 드러내는 소통에의 몸부림에 어울리게 무대 분위기는 공허하고 추상적이며 파편적이다.

815 광복절 저녁, 이 작품의 창작 동기에 대해  매진 공연을 마치고 나온 고선웅 연출가한테서 들어보았다. “우연히 들어간 채팅 메신저 프로그램에서 쉴새없이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벼라별 아이디의 댓글과 욕설을 보면서 소통의 꼬임이 인생의 꼬임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데서 모티브를 얻었습니다.”

극작가이자 연출가 고선웅"소통 부재의 끝은 새로운 소통을 모색하라는 신호탄입니다." ⓒ 김성경


통신네트워크에 출몰을 거듭하는, 그 실체를 짐작할 수 없는 불특정 익명인들의 어지러운 변덕을 반영하듯 조명 또한 변화무쌍 현란하다. 결국 냉랭하게 끝나는 현대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무대 조명 효과는 공기처럼 무대 속으로 스며들어온다. 김사랑이 맡은 가공할 오줌발 음향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에피소드 사이 투명한 막처럼 울려오는 다양한 형식의 음악은 대중스런 파토스를 불러일으키면서도 통속적인 차용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극의 파국에서 귓전을 때리는 라디오헤드의 세계적 히트곡 ‘크리프creep’의 절망적 여운은 또 다른 멋으로 기억된다. 이어 전혀 예측 못한 반전에 관객은 얼떨떨하다.

2006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한 바 있는 고선웅 연출가는 개관 공연이란 점 말고도 이번 무대의 감회가 남다르다. 서울문화재단 사후지원작이기도 한 <팔인>은 연극예술을 사랑하는 66명의 정성어린 후원금과 도움에 힘입은 ‘윤리적 창작극 1호’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극공작소와 후원자 사이의 길고 깊은 소통이 없었다면 기지 넘치는 대사의 향연인 이 연극을 보는 시점은 좀더 늦어졌을 것이다.

비현실적인 조명, 비현실적인 관계의 꿈흐릿한 조명은 통신망 속에서 사라져가는 정체성 또는 변별력 없는 군중들을 시사한다. ⓒ 마방진


<팔인>은 9월6일까지 극공작소 마방진 극장에서 상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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