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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거예요"

등록|2008.08.19 11:57 수정|2008.08.19 11:57
한국식으로 올해 고 3인 우리 아들 주변에는 졸업 후 대학에 가려는 친구들이 그리 많지 않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이 10월부터 닥치지만, 불문곡직하고 좁은 문을 향해 일제히 달려가는 모습은 찾기 힘들다.

언뜻 생각하기엔 고3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다면 흥뚱항뚱, 어영부영 수업 시간을 떼울 거라는 짐작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호주의 대다수 고3 교실은 나름 소신대로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고 가꾸는 다양한 면면들로 채워진다.

며칠 전 집에 놀러온 아들의 친구는 얼마 전부터 배관 기술을 익히기 위해 공사 현장을 따라다닌다고 했다. 지금은 비록 '대모도'지만, 견습과정이 끝나고 나면 집짓고 건물 짓는 곳에 수도나 하수 설비를 하는 일이 자신의 장래 직업이 될 것이라며, 묻지도 않았건만 배관공으로서 미래의 꿈을 당당하고 야무지게 피력했다.

그 친구는 새벽 6시면 도시락을 싸들고 공사 현장으로 달려가 오후 늦도록 일을 배운다며,  2년 실습과정을 마치고 자격증을 따려면 새벽잠의 유혹을 떨치고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배도록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호주에도 전체 고등학교 3학년생의 약 30%만이 대학에 진학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나머지 70%는 한국처럼 대학을 '못 가는' 게 아니라, '안 가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는 70%의 학생들이 교실에 멀뚱이 앉아 자신의 소중한 시간만 죽이고 있을 턱이 없다.

아들의 친구처럼 배관 기술을 배우고 싶다면 중학교 졸업장만 가지고도 가능하기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칠 것도 없이 일찌감치 직업 전선으로 뛰어들거나, 진로 업종에 따라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한 경우 최종 학년까지 마무리를 한다. 

등록금을 100% 대출해주고, 이담에 취직을 해서 일정 소득 이상을 벌면 갚아나가도록 하고 있는 이 나라의 학비융자제도를 감안한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호주 본류 사회의 실상이 이러함에도 호주내  한인들 중에는 그래도 그렇지, 돈이야 있든 없든 일단  대학은 가고 봐야 한다는 고정 관념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나또한 은연 중 비슷한 생각을 해왔던지라 몇 년 전에 경험한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에피소드를 소재로 쓴 글을 소개하면서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아들애 친구 중에 판사집 아들이 있다. 직업에 대한 귀천이나 차별의식이 없달 뿐 아무나 판사 되기 어렵기는 이 나라도 마찬가지.  ‘판사 씩’이나 되는 아비를 둔 자식들이라면 응당 부모의 기대가 클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그 집 장남이 대학을 가지 않고 스파게티 집 ‘시다바리’로 들어갔다는 게 아닌가. 

고위직에 있는 부모 체면 생각해서라도 아무데나 ‘대학’자 붙은 데는 들어가 줘야할 것 같았는데 일찍이 요리에 뜻이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요리 학원에 등록을 했더란다.

‘자식이 번듯한 대학을 못갔으니 부모가 지지리도 속상했겠구나. 지금이라도 다시 공부하라고 다그치는지도 모르지. 판사 아버지에 주방 보조 아들이라니.’

하지만 그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가. 본인의 꿈이 정말로 요리사가 되는 것이라면 아비가 판사가 아니라 대통령이라 한들 가고 싶은 제 길을 못 갈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 나라 사람들은 자식의 존재를 부모의 기대충족이나 대리만족을 위한 소유물로 여기지도 않고, 자식의 장래나 미래를 선택하는 일에 부모가 일일이 간섭하지도 않는다. 언뜻 부모 자식간에도 ‘너는 너, 나는 나’ 하는 식으로 냉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이 나라 사람들이 자식들에게 쏟는 정성과 애정의 켜를 자세히 들쳐보면 부모 자신들의 과욕이나 헛된 바람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부모 체면이 걸려있으니 자식이 대학을 가야한다는 허욕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호주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한 인격체로 자식을 대하며, 나름의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뒷받침하는 것이 부모의 몫이자 책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새기고 살아간다. 자기 자식이 성인으로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장래 어떤 일을 하던지 행복하고 건전하게, 성실히 살아주길 진정 소망하면서.
덧붙이는 글 내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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